기성 이명직 목사, 친일 행적 '시끌'…"목사로서 성결하게 살았다" 주장도

   
▲ 서울신대 안에 있는 도서관. 이명직 목사를 기념하는 도서관이다. ⓒ뉴스앤조이 이승규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총회장 강선영 목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활천>(1941년 9월호)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우리는 황국의 신민이다.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세계 어느 곳으로 가든지 일등 국민의 대우를 받는 것이다. 만세일계 천황봉대에 천황의 적자이다…이것은 실제로 영광이다.'

이것은 기성에서 교단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는 이명직 목사의 글로 이 목사는 이보다 앞선 1940년 8월 종교와 국가를 영과 육체의 관계로 비유하면서 천황을 모시고 정부 지도자와 육해군의 보호로 인민이 안전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말을 했다.

이어 10월에는 성결교회 제9회 이사회에서 '우리는 성서교훈에 의하여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 난 줄을 믿으며, 대일본제국을 통치하시는 천황을 봉대하고 국헌을 중시하며 국법을 순종한다'라고 헌법을 개정하기에 이른다(<다시 써야 할 한국기독교사>).

기념사업회에 도서관까지…

이명직 목사는 명실상부한 기성 교단의 지도자다. 그를 기념하는 사업회가 총회와는 별도로 조직 운영되고 있으며, 서울신학대학교(서울신대·총장 목창균)에는 기념도서관이 세워져 있을 정도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오는 6월28일부터 열리는 기성총회에서는 서울신대 안에 이명직 목사 추모비를 세워달라는 기념사업회측 헌의안이 안건으로 올라와 있다.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 기성측 인사들 역시 인정하는 편이지만, 성결교를 위해 일한 업적이 더 크기 때문에 업적은 업적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서울신대 박명수 교수(교회사)는 이명직 목사가 실질적으로 지금의 성결교를 만든 사람이라고 말한다. 교단 총회장과 서울신대 총장을 거쳤으며, 성결교단 잡지인 <활천>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이 목사의 친일 행적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한 사람을 평가하는데 잣대 하나만을 들이대는 것은 부적절한 평가라고 지적한다. 이명직 목사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목회자로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목사가 "돈과 여자에 대한 추문이 하나도 없었다"며 "이 목사처럼 성결하게 산 목사도 없다"라고 말했다.

친일 부분에 대해서도 "당시에는 대한민국에 사는 것 자체가 친일이었다"며 "신사참배 등 친일 행각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하지만, 그때 상황에서 일제 부역은 어쩔 수 없었다"는 상황 논리를 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목사의 구체적인 친일 행적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이명직 목사는 일제시대 때 성결교 수장으로서 어떠한 일을 했던 것일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943년 발표한 성결교해산성명서다. 이 성명서에 따르면, 이명직 목사는 창씨개명한 후 성명서에 서명했다. 이 목사뿐만 아니라, 최석모·이건·박현명·최영택 장로·안창기·박영순 등 성결교 지도자 7명이 성결교해산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보다 앞선 1938년 12월12일에는 이명직 목사를 비롯해 양주삼(감리회) 홍택기(장로교) 등 목사들이 전국 기독교를 대표해서 일본의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에 신사참배를 하기도 했다.

해방 후 모든 공직에서 사퇴

또 성결교회 제2회, 6회 이사회에서는 만주사변 당시 황군 위문을 위해 모든 교회가 연 세 차례에 걸쳐 특별헌금을 할 것을 결의하고 70원10전을 기부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40년 12월6일 국민총력성결교회연맹 이사장 이명직은 전국 성결교회 애국반에 다음과 같은 시행령을 전달한다.

내용은 △국방헌금 △교회내 일본국기 게양 △황성요배 △무운 장구기도 △전몰영령 위해 기도 △출전군인 환송식 적극 참여 △노무시간 외 근로봉사 등이다. 이후 1941년부터 <활천>에는 성결교회 신도 실천 보고가 실렸으며, 십일조를 걷어 총독부에 내게 된다.

또 설교 시간임에도 12시가 되면 전체가 일어나 일본을 위해 1분간 묵도를 했다. 이명직 목사는 <활천> 219호에 '황실은 신성불가침이요 절대요 통치자이므로 공경해야 한다. 신자는 제도에 순응해야 한다'는 글을 싣기도 했다(<다시 써야 할 한국기독교사>).

물론 모든 성결교 목사들이 친일 행각을 벌였던 것은 아니다. 박봉진 목사와 정태희 장로는 끝까지 신사참배에 항거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박 목사는 일본 형사들로부터 "천황이 높으냐, 예수가 높으냐"라는 질문에 "천황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천황이 하나님보다 높다고 할 수 있겠는가? 천황은 나보다 높을 뿐이다"라고 대답하다가 해방 1년 전 숨졌다.

하지만 친일 행적이 분명했던 이명직 목사 같은 사람들은 기념사업회가 따로 존재하고, 박 목사나 정 장로 같은 순교자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교단에서는 순교자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기껏해야 1년에 한 번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족하고 있다.

박명수 교수는 이명직 목사의 친일 행적에 대해 반론을 펴기도 한다. 반론 요지는 1943년 발표된 해산성명서는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제 강요에 의해서 한 일이었으며, 해방 이후 공식으로 친일 행적에 대한 회개는 하지 않았지만 모든 공직에서 물러남으로써 사실상 회개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박 교수 주장대로 성결교해산성명서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이명직 목사를 비롯한 성결교 지도자들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일제 강압에 의해 서명했다는 주장도 있다.

"추모비 세울 만한 목사 아니다"

그러나 1943년 성결교가 해산된 이유는 일본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재림 교리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은 성결교의 재림사상이 일본의 천황사상과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강제로 해산시켜 버린 것이다. 물론 성결교에서는 이 사실을 놓고 일제에 항거하다가 해산했다는 주장을 펼 수도 있다. 재림 교리를 표기하지 않은 것이 일제에 항거한 증거라는 것이다.

또 이 목사 공직 사퇴와 관련해서는 아무리 그렇더라도 기념할 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김승태 실장(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은 "이명직 목사가 해방 이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점은 인정한다"라고 말하면서도 친일 행적이 분명한 이상 그것에 대해 구체적인 회개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추모비를 세우거나 기념할 만한 목사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이명직 목사의 업적은 인정해야 하지만, 친일 행적 등 공적인 부분은 공적인 사과가 뒤따라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성결교해산성명서


우리 조선 예수교 동양 선교회 성결교회는 조선에 포교된 이래 삼십 오륙 년, 그간 장기에 걸쳐서 미국인 선교사의 지도를 받은 것 뿐 아니라 재정적 기초도 역시 미국에 의존하여 왔기 때문에 부지불식간 적 미영 사상의 포로가 되어 지금까지도 그 잔재를 말살키 어려움은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다.

더구나 교리로서 신생(新生) 성결(聖潔) 신유(神瘉) 재림(再臨)의 4중복음을 고조하여 왔는데 취중(就中) 재림의 항은 그리스도가 가까운 장래 육체로써 지상에 재림하여 유대인을 모으고 건국하여 그 왕이 될 뿐 아니라 만왕의 왕의 자격으로 전 세계 각국의 주권자로부터 그 통치권을 섭정하여 이를 통치한다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국체의 본의에 적합하지 못할뿐더러, 신에 대하여도 성서의 해석에 기초한 여호와 이외에 신이 없다는 사상을 선포하여 온 것은 현대 우리들의 심경으로 보면 실로 국민사상을 혼미에 빠트린 것으로 그 죄를 통감하는 바이다.

 

…필경 성서는 그 기지(基址)를 유대사상에 두어 우리 국체의 본의에 배반하는 기다적(畿多的)치명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성서 자체로부터 이탈치 못한다면 완전한 국민적 종교로서 성립하지 못할 것으로 결론에 도달하였다. 우리들은 장년월간(長年月間) 부지불식중에 그와 같은 불온 포교를 하여 온 책임을 통감하고 이금(爾今) 맹서하여 결전하 황국신민의 자격을 실추시키지 않을 것을 기함.


조선 예수교 동양 선교회 성결교회

소와 18년 12월29일(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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