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 하에서 피임은 여성에게만 적용…남성은 여전히 책임 떠넘겨

나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낙태를 반대하는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일상적으로 성폭력을 경험하는 사회에 살면서 '혹시 내가 불행을 당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잠재적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싶어서였을까. 낙태 반대는 율법처럼 내 안에 각인해야 할 주제 같았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내가 만난 기혼 여성 중에 낙태를 경험해보지 않은 여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부모 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동년배 가운데서도 결혼한 여성은 한두 번이라도 낙태를 해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여성들에게 생명 존중 사상이 희박해서인가?

놀랍게도 우리나라 낙태의 70%는 기혼 여성이 하고 있다. 이것은 흔히 추측하듯 청(소)년들의 무책임한 성관계가 낙태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뒤집는 것이다. 기혼 여성들이 모두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닐 테고, 또 산전 검사를 통한 장애아 판정 비율이 그토록 높은 것이 아니라면, 분명 낙태의 큰 원인은 피임 실패라고 할 수 있겠다.

낙태 70%가 기혼 여성

   

▲ 아담은 언제까지 '이 여자가 …해서'라고 말하며 숨을 것인가? ⓒ뉴스앤조이 신철민

사실상 한국 사회는 그동안 낙태를 피임 수단으로 용인 혹은 묵인해왔다. 이것은 피임을 전적으로 여성의 몫으로 돌리는 문화의 한 반영이다. 최종 피임인 낙태가 있으니 자기 욕구에 '충실하게' 행동한 남성은 '그런 건 여자가 알아서 해야지' 혹은 '난 못 키운다. 당신이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책임을 떠넘기기 쉽다. 생명체는 여자의 몸 안에 있으니 결국 수술대 위로 올라가는 행동은 여자가 하지만, 이것은 여성의 '선택'이기보다는 '내몰림'이라고 할 수 있다. 성관계를 가지기 이전 단계에서부터 여성이 성관계를 원하는지의 여부와 피임 도구가 준비되었는지에 대해 적극적인 의사 표현과 결정을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피임은 말 그대로 임신을 피하는 것이다. 임신을 피하려면 임신 과정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성관계를 가지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임신을 피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철저하게 남성의 쾌락과 본능을 중심으로 성이 이해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성 피임에 대해 부정적이다. 남성의 성을 어떤 식으로든 통제하거나 억제하는 것은 건강에 좋지 못하다거나 남성성에 손상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즐기고 난 후에도 남자는 임신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아이를 낳아도 키우는 건 여자 일이니 번거롭게 자기 욕망을 통제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원하지 않는 임신'은 결국 여자가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한편 한국 사회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은 자녀의 수나 임신 시기뿐만 아니라 임신한 아이의 정신적 · 신체적 건강 여부와 성별 요인도 복합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딸이 둘 있는데 또 임신했을 경우, 옛날처럼 아들 낳을 때까지 낳을 수는 없고 이 아이가 아들이면 낳겠다는 결심을 할 경우에는 자녀의 수와 성별 모두가 고려되는 것이다. 요즘도 이런 사람이 있느냐고 하겠지만, 직접적인 성감별 낙태는 아니더라도 아직도 많은 한국 여성들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부담을 안고 있다. 딸 둘이 이미 있는데 터울이 많이 나는 셋째로 아들을 낳은 어떤 사람은 "아들 낳으려고 더 낳은 건 아니고요"라며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을 했다. 생각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임신을 한 후배는 태아가 아들인 것을 알고는 어차피 하나로 끝낼 건데 아들이어서 속 편하다고 했다. 시댁의 압력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아직도 '아들이 좋아'

모든 인간은 태아의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낙태는 현존하는 인간 존재들과 연속성을 가진다. 2001년 11월28일자 <한겨레>에 프랑스 법원이 장애우의 태어나지 않을 권리를 인정해주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낳은 부모가 임신 초기에 의사가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고소했고, 결국 이들이 승소한 것이다. 그러자 많은 장애우들이 태어날 권리마저 부인되는 현실에 분개했다고 한다. 장애우에 대한 낙태가 지금 생존하는 장애우에 대한 위협이라면, 여아 낙태는 지금 생존하는 여성에 대한 위협이다. 자기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들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거나 탄생 자체를 거부당할 수도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여성은 평생 자신을 부적합한 자로 여기며 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여성주의자들은 자기 몸에 대한 권리로 낙태를 주장하는가? 그것은 남성이나 국가가 자신의 몸을 지배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다.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의 재생산권은 국가 정책에 따라, 부계 혈통에 따라 통제 대상이 된다. 낙태, 유아 살해, 불임술은 재생산권의 통제라는 큰 틀에서 같은 선상에 놓인 것들이다. 국가는 국가 이익에 부합하는 종족은 많이 번식시키고 그렇지 않은 종족은 단명시키려는 정책을 쓰는 경향이 있다. 국가가 부적합하다고 판정한 소수 민족이나 원주민 혹은 장애 여성 · 남성 들에게 불임술을 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주의자들은 자기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비로소 여성이 자율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요구는 계급이나 인종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달라진다. 미국의 중산층 백인 여성이 낙태할 권리를 요구한다면, 남미의 원주민 부족들은 강제 불임술을 당하지 않고 (자녀들이 귀중한 노동력이니 만큼) 원하는 대로 아이 낳을 권리를 요구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도 여전히 낙태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불과 5~6주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나를 입덧으로 몸져눕게 만들 정도로 자기 존재를 알려준 경험을 한 것이다. 내가 아는 선배도 유학 생활 중에 이미 아이가 둘 있는 상태에서 셋째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데, 주변에서 유산시키라는 압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아이는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미국의 한 학자도 여성들의 이러한 경험을 입증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낙태와 모성이 어떻게 정치에 이용되는지를 연구한 크리스틴 루커(Kristin Luker)는 낙태반대운동을 하는 여성들 가운데는 정치적인 이해보다는 경험에서 오는 확신으로 운동하는 여성들이 많다고 했다.

책임자인 남자는 어디로 갔나

   
▲ 양혜원씨. ⓒ뉴스앤조이 신철민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 사회의 낙태반대운동은 달라져야 한다. 흔히 낙태를 반대하는 운동은 낙태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비디오 상영과 사진 전시, 강의 그리고 안내 전단의 배포 등으로 이루어진다. 임신을 해본 그리고 낙태를 해본 여성은 그런 것을 보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낙태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낙태하는 여성에게만 낙인찍는 태도는 낙태가 발생하는 사회적인 맥락을 무시하는 것이다. 낙태반대운동을 낙태하는 여성과 살해되는 태아라는 대립 구도에서 전개하는 것은 오류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행위자이자 책임자인 남성은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담은 언제까지 '이 여자가 … 해서'라고 말하며 숨을 것인가? 아이를 지운 일 때문에 가슴아파하며 회개하는 여성들이 있다면, 자신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아내 혹은 여자 친구를 낙태로 내몰았다고 가슴 치며 통곡하는 남자의 회개도 있어야 할 것이다.

양혜원 / 번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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