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총신 전신도 친일…평양신학교는 황민화 교육에 열성

지난호 <복음과상황>에 한신대가 친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내용의 기사(감추고 싶은 '친일'에 발목 잡힌 한신대)를 쓴 뒤 독자들로부터 항의성 메일과 전화를 받았다. 그들은 신학대학의 친일은 비단 한신대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장신대와 총신대의 전신인 평양신학교, 감신대 등도 신사참배와 친일에 나섰다고 항변했다. 오히려 한신대는 소극적인 축에 들 뿐 아니라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간 뒤 생긴 목회자 양성의 공백을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메우는데 크게 공헌했다고 주장했다.

   
▲ 많은 사람들이 '진보는 친일, 보수는 반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한신대가 친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듯이 총신대와 장신대도 친일 전력을 갖고 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그런데 평양신학교 후예들은 '우리 선배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동안, 너희는 뿌리부터 썩었다'라는 거친 표현을 써가며 공격(?)하니 억울하다고 독자들은 말했다. 사실 친일 부역을 둘러싼 교인간의 이러한 설전은 심심치 않게 발생했고, 여전히 일어난다. 그러나 한국 교회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진보=친일, 보수=신사참배 반대' 도식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학교 문을 스스로 닫은 것은 사실이며, 조선신학교가 친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평양신학교, 스스로 폐교 결정

'일제의 갖은 억압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의연히 임무를 수행해 왔으나,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 안이 총회장에 의해 불법 선포되므로, 신학교는 이에 동참할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무기 휴교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장신대 홈페이지 中 학교 소개 '평양에서 광나루까지').

선교사들이 철수해 목회자를 양성할 길이 막히자, 우리 민족의 힘으로 세계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신학교를 만들자는 당찬 뜻을 품고 조선신학교가 출범했다. 당시까지 선교사들은 목회자 교육을 '교인보다는 높게 선교사보다는 낮게' 실시하는 정책을 폈는데, 미국이나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신학자들에게 선교사들의 교육 지침은 '우민화 정책'으로 비쳤다. 우리 힘으로 우리 신학을 하자는 정신으로 조선신학교를 설립한 것은 선교사에 맞서 신학의 주체성을 이루려는 움직임이었다.

조선신학교의 신학적 자립의 의미가 훼손되어서는 안되지만, '친일'이라는 비판 역시 숨길 수 없다. 김인수 교수(장신대)는 "보수적인 목사 대부분이 투옥된 상태에서 (조선)신학교 재건은 당연히 자유주의 신학적 배경과 친일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발기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 실제 조선신학교 설립에 참여한 채필근, 차재명, 송창근, 김관식, 김길창, 한경직 등에게는 신사참배와 친일 부역이라는 부끄러운 꼬리표가 붙어 있다.

그러나 재건된 평양신학교는 조선신학교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친일의 길을 걸었다. 당시 교단 주도권을 쥔 서북지방 인사들은 신학교가 평양이 아닌 서울에 선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에 서북지방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총회에 평양에 신학교 설립 추진안을 청원했고, 이미 친일 어용단체로 전락한 총회는 1940년 2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냈다. 덕분에 조선신학교는 인가를 받지 못하고 경기도지사의 강습소 인가로 개교했다고 김재준은 회고했다.(<한국기독교회사 2>, 생명의말씀사 펴냄)

나아가 같은 해 가을에 열린 제29회 총회는 조선신학원 보고에서 '장로회 목사 양성'을 '장로회 교역자 양성'으로 개정해 가결했다. 조선신학교 출신에게 목사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특히 조선신학교 설립위원장 채필근 목사는 총독부 인가와 동시에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가는 기회주의적 순발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조선신학교를 억누르면서 목회자 양성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평양신학교도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었다. 평양신학교 건물을 소유한 선교부가 건물 사용을 거절한 것이다. 선교부는 '신사참배하는 총회와 관계를 끊었으며, 신앙 양심으로 기존 신학교 시설 일체의 사용을 허용치 않기로 결의'했다. 또 선교부는 과거 학적부 등 모든 서류를 넘겨달라는 평양신학교의 요구도 거절했다. 일부 과격한 평양신학교 학생과 인사들이 건물을 강제로 점유했다가 일제 당국이 사용을 허용하지 않아 물러가는 추태도 벌어졌다.

할 말 없는 장로교 보수 진영

평양신학교는 1941년 2월부터 한 달간 황민화를 위한 목사 재교육을 실시하는 등 일제교화기관으로 변질되었다. 김승태 실장(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은 평양신학교가 졸업반 학생들에게 10월22일부터 11월2일까지 성지 참배와 내지 견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을 방문, 신사참배를 시켰다는 내용의 <장로회보> 1941년 12월24일자 '내지견학기' 기사를 소개했다. 학생들을 인솔한 김관식 목사는 일제가 모든 교파를 강제로 통합해 만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통리를 지냈고, 해방 뒤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모체인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을 맡았다.(<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다산글방 펴냄)

친일만큼은 장로교내 보수 진영도 내세울 것이 없고, 상대방을 비난할 처지도 못된다. 자유주의파는 친일했고 보수주의에서는 이를 반대했다며 이를 두 신학의 대결로 연결시키려는 것에 대해 민경배 총장(서울장신대)은 터무니없는 일로 보았으며 박형룡 박사의 행보를 예로 들었다.

"보수신학의 거두인 박형룡 박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주기철 목사와 다투다가 일본에 가 있었으며, 신사참배를 벌써 하고 있었던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옮겼다. 이 신학교는 조선기독교를 비롯해 다섯 교파를 망라해 설립한 에큐메니칼 신학교였다. 보수계의 비에큐메니칼 선언의 합리성도 여기서 역리(逆理)로 끝나고 만다." (<한국기독교회사>, 대한기독교출판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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