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삼·김활란·정춘수 등 감리회 인사들도 부역…친일 행각 지도자 내리고 순교자 재발굴해야

   
▲ 감리회 역시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양주삼, 정춘수, 김활란 등이 대표적인 친일 인사다. 사진은 광화문에 있는 종교교회. 양주삼 총리사 기념교회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뉴스앤조이 이승규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근처에는 종교교회(기독교대한감리회·최이우 목사)가 있다. 이 교회 앞에는 '양주삼 총리사 기념교회'라고 쓰인 커다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럼 양주삼 총리사는 누구인가. 과연 누구길래 기념교회를 세운 것도 모자라, 기념비까지 세워져 있는 것일까.

양주삼 총리사는 1930년 12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가 조직됐을 당시 초대 총리사를 지냈다. 이 후에 열린 1934년 제2회 총회 때도 총리사로 당선돼 8년 동안 감리회를 책임지는 수장이 되었다.

이덕주 교수(감리교신학대학 교회사)는 양주삼 목사에 대해 쓴 글에서 "행정과 조직에 남다른 재능을 보유하고 있던 그였기에 한국 감리교회는 창립 초기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그가 지휘하는 총리원을 중심으로 감리교회 특유의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를 구축하고 다양한 선교 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양주삼, 친일 잡지에 '일본 지지'

양주삼의 업적은 또 있다. 협성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1915년 10월부터 자교교회를 맡아 1년간 시무했으며 1916년 9월 윤치호의 부탁으로 개성 한영서원(韓英書院) 부교장이 되어 2년 간 시무했다. 1918년 11월부터 남감리회 선교 100년 기념 사업회 총무로 남감리회 전도 사업을 총괄하게 되었는데 1920년 시베리아와 만주 선교를 개척한 공을 남겼다.

위의 업적만 놓고 본다면, 양주삼은 감리회의 '어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업적(?)'이 있다. 바로 친일이다. 양주삼은 1936년 4월, "신사 의식은 예배 의식이 아니라 국가 의식이다"는 내용의 학무국 통첩을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는 감리교회 기관지 '조선감리회보'에 게재함으로 감리교회가 신사참배를 수용한 첫 번째 교단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도록 만들었다.

이후 중일전쟁(1937년) 발발 직후 총독부에서 주최한 '종교단체 시국대연설회'에 나가 '내선일체'를 주제로 한 시국 연설을 하였고 1938년 10월, 총리사로서 마지막 임기를 마치는 제 3회 감리교 총회에서 총회원을 인솔하고 '애국일' 행사를 벌인 후 총독부를 방문하고 조선신궁에 참배하였다.

총리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교회 지도자'로서 일제 당국의 요구에 응하여 대동민우회·흥아보국단준비위원회·임전대책위원회·조선임전보국단 같은 '친일' 단체 임원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동양지광>이나 <매일신보> 같은 '친일' 언론매체에 일본의 정책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다. (한국교회 친일파 청산에 대한 역사신학적 접근, 이덕주)

김활란, "징병제는 커다란 감동"


   
▲ 1930년 일제는 장로교와 감리회 등에서 발간하는 교단 신문을 통폐합해 하나의 신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신문은 창간호에 일본왕과 왕비의 사진을 싣는 등 친일의 역사를 갖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승규
여성계의 지도자로 꼽히는 김활란 역시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김활란은 1942년 12월 '신세대'라는 잡지에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 여성은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는 글을 썼다.

감리회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친일을 한 인사는 정춘수 목사다. 정춘수 목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대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면서 그의 친일은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이 되어 버렸다.

정춘수 목사는 1944년 3월 자신이 통리사로 있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을 통해 전국에 있는 감리교회를 통폐합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명분은 미약한 교회의 강화를 위해서지만, 속뜻은 다른 데 있었다. 장로교가 비행기 한 대를 헌납한 데 자극받은 감리교회는 교회를 통폐합해 남는 잉여자금으로 애국기(비행기)를 헌납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양주삼 총리사와 김활란의 친일은 '소극적 친일'로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덕주 교수는 둘의 친일은 정춘수 목사의 친일과 구분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교수가 이들의 친일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양 총리사의 경우 일제 말기 일제가 동원되어 끌려나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점에서 그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조이제 목사(새누리교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여러 사료에 양주삼 총리사의 이름이 올라가 있지만, 본인이 직접 서명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양 총리사의 이름을 쓴 경우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감리교회의 교회사를 전공한 학자들은 소극적 친일이든, 적극적 친일이든 친일의 잔재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이덕주 교수는 "그들의 행위가 교회와 민족의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도자의 행위였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키 힘들다"고 했다. 그들의 행위를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와 함께 해방 직후 친일 청산의 기회를 잃어버림에 따라 오히려 한국교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교회 내 친일 당사자들이 없어진 지금이 친일을 청산할 수 있는 시기라고 말했다. 과거 잘못된 역사를 제대로 기술하고 평가함으로 양심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지 못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후세에 보여줘야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정춘수, 감리교회 병합자금 헌납

조이제 목사는 아예 지도자를 다시 세우자고 말한다. 친일을 저지른 당사자를 한국 교회의 지도자라고 내세우는 데, 이들은 지도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순교자를 찾고 발굴해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새로운 지도자를 제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조 목사는 그동안 많은 언론들이 교회 지도자들의 친일을 알리는 행위에만 집중한 반면 친일 청산의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며, 친일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로 친일 인사들의 행적이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이제는 대안을 제시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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