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셨네 보셨네, 예수 꼴불견 보셨네”

한국교회가 때마다 외치는 구호가 있습니다. ‘화해와 일캄입니다. 이념, 교회 규모, 목회자의 출신학교, 지역에 따라 갈기갈기 찢긴 탓입니다. 그러나 이런 여망을 일거에 달성한 때가 있었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전 교단 교파가 하나로 통합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제냐고요? 그때는 1945년 7월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제가 패망하기 한 달 전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슬 퍼런 권력의 위세가 살아 있던 때였습니다. 물론 창피한 역사입니다. 사실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통폐합된 것이거든요.

일제가 무너지고 이 땅에 광복과 자유가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교회는 갈가리 찢겨집니다. ‘출옥 성도’들이 ‘너희와 같이 예배 못한다’며 고신으로 갈라져 나갔고, ‘자유주의 신학’ 아니냐며 기장을 도려냈고, WCC에 가입하느냐 마느냐 놓고 통합·합동인 교단 명칭이 무색하게  분열하고, 이후로 줄줄이 이어진 분파의 과정은 한국교회 역사의 한 단면입니다.

이런 분열에 대한 반성의 의미에서 생겨난 것이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입니다. 2001년까지는 새벽에 진행됐는데, 2002년에 이르러서는 거대 운동장에서 낮에 치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합’ 행사라는 명칭을 달아놓고 서로의 명분과 위상, 가치는 첨예하게 다릅니다. 누가 설교하느냐, 누가 사회 보느냐, 누가 축도 하느냐. 그것이 뉴스가 되고, 논란이 되어 또 다른 분열의 소지가 됩니다. 더 어이없는 것은 이 행사만을 위해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놓고는 나중에 그 기구를 배제하는 해프닝도 연출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 예배에서는 설교자인 조용기 목사와 부인의 편의를 위해 순복음교회 측 인사들이 ‘용상’을 연상케 하는 고급 의자를 단상 위로 올렸다가 KNCC 측 인사들과 마찰을 빚은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꼴불견으로 보시는 예수님. 만약 2006년에 다시 사신다면 도로 “이 꼴 보기 싫어 도로 들어간다”라며 무덤 속에 은둔하지 않으실까요?

“남쪽 하늘 붉은 노을”

일제하 기독교 이야기해보죠. 잘 아시는 대로 한국기독교는 주기철 목사를 파면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원조인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38년 9월 신사참배를 결의합니다. 참배 행위가 ‘애국적 국가의식’이라는 이유로 말이죠. 하지만 주기철 목사는 거부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주 목사를 붙잡아가 어르고 달래고 협박하고 주리 틀고 ‘별짓’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끄떡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었던 경찰, 결국 노회에다 압박합니다. “걔 설교하지 못하게 해!”라고 말입니다. 목사에게 설교 못하게 할 법리적 근거는 ‘목사직 파면’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듬해 12월 평양 남문밖교회에서는 ‘주 목사를 파면시키고 신사참배할 교역자를 주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임명하기’를 결의합니다.

그리고 67년 뒤. 2006년 4월 17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는 신사참배 결의와 주 목사의 순교와 관련해서 참회예배를 하고, 파면 조치했던 주 목사를 복권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한국교회의 과거사 정리가 완결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제 정신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그의 ‘열’부터 재봐야 할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의 파면건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입니다. 일제의 간악한 태평양전쟁에 부역한 행위, 성도들을 신사참배를 통해 우상숭배하게 한 일, 주기철 목사 외에 여러 양심적 신앙인들이 겪은 고난에 침묵한 일 등. 따지고 보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식의 윤회설은 믿지 않지만, 적어도 역사에 있어서 윤회설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일제 앞에 무릎 꿇은 한국교회. 훗날 독재권력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이제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권위 앞에 순복합니다. 이는 친일행위의 연장선상이라는 감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주 목사는 독립투사라기보다, 반일주의자라기보다, 교단 내 비주류 인사라기보다, ‘신앙인’이었습니다. 이라크를 침략해 무고한 생명을 학살한 자가 기독교라는 이유로 그를 칭송하고 경배하는 사람들은 주 목사의 순교에 대해 감히 가타부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 목사의 명예뿐 아니라, 그의 정신도 복권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빈치 코드>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영화 <다빈치 코드>의 개봉으로 때 아닌 예수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신앙의 대상인 예수가 세속적 흥행물의 소재가 되는 현실이 흔쾌할 리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소니 픽처스 최고위급 경영자는 "이 영화의 개봉으로 미국 극장가는 지난해 20여 년 만에 맞은 최악의 흥행 부진을 씻고 부활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속은 끓지만 한기총 식의 ‘상영저지’의 행태에는 동의하지 못하는 다수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는지 고민입니다. 이런 와중에 부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발표한 성명서 한 장은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겠습니다.

“<다빈치 코드>는 문화의 한 코드로서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고자 하는 것이며, 포스트모던의 흐름 가운데 있는 문화의 한 부분입니다. 포스트모던은 상대주의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하여 또 다시 종교의 권위를 주장한다는 것은 대중에게 불을 붙여주는 꼴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내의 윤리적인 면을 자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중들에게 신성모독이라는 미명으로 강변하기보다 정직하게 사는 삶이 어쩌면 가장 설득력 있는 ‘방어 논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의 대안으로는 한 편의 비기독교영화가 나오면 우리는 두 편의 아름다운 감동이 있는 영화를 만들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과 희망을 계속적으로 심어주는 성경적인 대안들을 실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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