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증언하고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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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과상황 신철민 | ||
적극적 의미의 평화는 사회정의가 행해지고 있는 상태, 사회정의의 현존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삶을 위해 능력과 수단이 균등하게 분배되어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상태로 적극적 의미의 평화는 규정된다. 기독교의 평화 개념은 소극적․적극적 평화 개념을 연결시키면서 정의의 강조를 통하여 적극적 평화 개념을 우선시킨다. 평화라는 의미로 쓰인 구약성서의 히브리어는 ‘샬롬(shalom)’이라는 말이다.
‘샬롬’이라는 말은 포괄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말로 ‘완전하게 하다’, ‘온전하게 하다’, ‘안전하게 하다’, ‘끝마치다’ 등의 여러 형태로 쓰인 샬렘(shalem)으로부터 파생된 말이다. 샬롬의 기본적 의미는 ‘완전성’, ‘총체성’, ‘온전함’, ‘안전함’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샬롬이 가진 뜻은 건강·질서·온전함·정의·조화·안정·구원·복지 등의 다양하고 포괄적인 의미가 담겨진 말이다. 샬롬의 의미는 어떤 유기체나 인간공동체·민족·가족 등이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고 완전하며 안전하게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신구약에서 말하는 평화
구약성서의 평화는 정의로운 평화이다.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곳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다. 정의가 평화를 창조한다. 시편에는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을 맞춘다는 시적 형식으로 말함으로써 정의와 평화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말한다(시 85:10.) 예언자 이사야는 평화는 정의의 결과라고 말한다(사 32:17). 평화는 정의가 실현되는 것,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 빼앗긴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평화는 관계적 개념이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하나님과 자연이 바른 관계를 지키며 살아갈 때, 상호친교 속에서 지낼 때 평화가 이루어진다(창 1:26f).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착취적 지배관계가 아니라 관리적 지배관계이다. 자연과의 평화를 통하여 생태적 정의가 실현된다.
더 나아가 구약의 평화사상은 미래지향적 기다림이며, 메시아적인 기다림은 평화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이다(사 2:2~4, 미 4:1~3). “하나님께서 민족 사이의 분쟁을 판가름해 주시고 강대국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시리라. 그리되면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칼을 빼어 드는 일이 없어 다시는 군사를 훈련하지 아니하리라”(미 4:3). 메시아는 궁극적인 평화에 대한 보증이 된다(사 9:1~6, 사 11:1, 미 5:1). 평화의 왕 메시아는 정의를 구현함으로써 평화를 성취한다.
신약성서에서 평화라는 말은 에이레네(eirene)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본래 세속 그리스어로 전쟁의 반대 상태 내지 종식을 뜻한다. 평화는 질서와 법이 유지되는 상태이며 여기에서 복지가 비롯된다. 에이레네는 신약성서에 91회, 복음서에만도 24회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서에서 평화는 전쟁의 반대 상태나(눅 14:32, 행 12:20), 외적인 안전(눅 11:21), 구약성서와 연관되어 무질서의 반대 상태로 종말론적으로 이해된다(고전 14:33). 또한 사람들 사이의 화해를 표현하며(행 7:26, 갈 5:22, 엡 4:2), 메시아적 구원 개념이나(눅 1:79, 2:14, 19:42) 그리스도교적 선포 일반의 내용과 목표를 의미하기도 한다(엡 6:15).
기독교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평화요, 평화의 왕으로서 왔다(히 7:2). 예수가 탄생할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라고 하였다(눅 2:14). 천사들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을 평화로서 규정했다. 신약성서의 평화는 화해와 연관된다. 그리스도는 화해의 사건이다(엡 2:14).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담을 헐고 평화를 가져온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롬 5:1).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약성서에 나타날 평화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사이며,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새로운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이다(계 21:1~4).
십자군·나치에 악용된 전쟁신학
평화의 반대 개념은 전쟁이다. 성서에 ‘야웨전쟁’이라는 말이 있다(민 21:4, 삼상 18:17). 이스라엘의 ‘야웨전쟁’사상은 다윗왕국 때 이론적으로 확립되었다. ‘야웨전쟁’ 이론에서 ‘거룩한 전쟁’, ‘의로운 전쟁’이라는 전쟁신학이 추출되었다. 전쟁신학은 십자군전쟁, 나치 하의 독일의 침략전쟁 등에 악용되었다. 이 ‘야웨전쟁’을 ‘거룩한 전쟁’, ‘의로운 전쟁’으로는 미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야웨전쟁은 본래 이스라엘의 이기주의적인 민족주의적 침략사상에서 생겨난 이론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거룩한 전쟁, 의로운 전쟁은 비기독교적이다. 없다. 전쟁신학은 세계평화 실현을 위해서 공헌할 자리가 없다. 전쟁을 통해서는 평화가 실현될 수 없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은 어떤 이유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이다.
평화신학의 선구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평화는 하나님의 계명이자 그리스도의 현존이라고 하였다. 그는 군비 경쟁으로는 평화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했다. 군비를 통한 안보는 불신을 요구하며 이런 불신은 전쟁을 초래한다고 강조하였다.
평화 연구에 있어서 또 평화실현 과정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가 폭력의 문제이다. 폭력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문제를 놓고 서구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산상수훈(마 5:38~48)의 말씀을 가지고 그 해결방법을 찾는 논의를 해왔다. 예수의 산상설교의 중심은 비폭력을 통한 폭력의 극복, 폭력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이다. 원수 사랑을 통한 적대감의 극복이다. 즉 평화를 창조함으로써 적대관계를 극복하는 것을 말한다. 보복하지 말라(마 5:38~42)는 예수의 말씀을 그동안 폭력의 포기로 간주되어 왔으나, 이것은 폭력의 포기라 아니라 폭력으로부터 자유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평화의 실현은 비폭력적 방법에 있으나 이 비폭력의 방법은 비폭력 무저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도 말하고 있듯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는 폭군이나 폭정․불의에 대하여는 항거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가능한 한 비폭력적 그리고 지속적 저항운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순교의 희생을 동반할 수 있다. 이것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일이 될 것이다.
폭력의 극복의 방법으로써 다음의 두 가지를 고려할 수 있다. 첫째, 권력의 행사를 법과 결부시키고 둘째, 폭력의 통치권을 거절하고 이 통치권과 모든 협력을 거부하면서 형성하는 국민과 연대(連帶)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절대적 평화주의나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600만 유태인이 학살당하게 되는 일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적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되는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정당화된 폭력사용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때에도 비폭력저항의 정신에서 폭력의 최소화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평화는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 실현되어가는 과정이다. 평화는 만들어가는 것이다. 교회는 평화를 건설해가는 평화수립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증언하고 평화를 만드는 자(peacemaker)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다(마 5:9). 평화를 실천하는 것이 오늘 기독교인과 교회에 맡겨진 책임이며,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한반도의 기독교인은 한반도의 평화 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며 평화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유석성 /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