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호 특집 성서한국과 회심 2.0] 주제 강의 미리 맛보기① 선구자 그리스도를 향한 회심
이번 성서한국 대회의 주제는 회심이다. 회심은 마음을 돌이킨다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로, 그리고 예수께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남자를 만나 마음을 돌이키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를 만나 마음을 돌이키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회심은 우리가 신앙인이 되는 첫 관문을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돌이킴을 유지하고 새롭게 하는 지속적 과정이기도 하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혹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탐구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우리의 돌이킴이 예수를 향한 것이라면, 우리가 만난 예수의 모습에 따라 우리의 회심이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회심에 대한 우리의 반성은 “우리가 어떤 예수께 돌아선 것인가?”하는 물음을 포함한다. 우리가 만난 예수는 어떤 분인가? 회심 이후 내 삶에 2%가 부족한 것은 내가 아직 내 삶의 근거요 주인이신 예수님에 대해 뭔가를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
예수의 의미를 말하라면, 우리 대부분은 “내 죄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에 관해 말한다. 내 예수는 언제나 십자가에 달린 분이다. 우리는 이 사실이 고맙다. 그리고 이것을 “은혜”라 부른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나를 위해 예수께서 돌아가셨고, 그 은혜로 인해 하나님은 나를 의롭다 여겨주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아래서, 나는 언제나 죄인이다.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기 위하여 나는 늘 죄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가 예수의 유일한 그림은 아니다. 첫 단추가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옷을 다 입는 것이 아니듯, 내 죄를 대속하는 예수가 내가 필요로 하는 예수의 전모는 아니다. 없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그의 제자로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의 다른 모습도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초상화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다른 그림의 하나다. 곧 선구자 예수의 모습이다.
히브리서는 예수를 “선구자”라 부른다. “구원의 선구자”이기도 하고(2:10) 혹은 “믿음의 선구자”(12:2)이기도 하다. 개역에는 “주”라 번역되었지만, 보통 “주님”(퀴리오스)과는 전혀 다른 아르케고스라는 단어로, “창시자”(author) 혹은 “선구자”(pioneer)로 번역할 수 있다. 또 6장에서는 “먼저 달려가신 분”(프로드로모스) 곧 글자 그대로 선구자(先驅者, forerunner)에 해당하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6:20). 이 선구자 그리스도라는 초상은 균형 잡힌 복음 이해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그림이다. “대속”의 개념으로는 담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차원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구자란 모두가 가야 할 길을 “먼저 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먼저 달려가신 분”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 뒤를 따라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물론 예수의 사역에는 우리가 뒤따를 수 없는 대목이 있다. 우리 죄를 “대신 하신” 부분이 그렇다. 하지만 대속이 구원의 전모는 아니다. 우리 “대신”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가 “함께” 참여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래서 예수는 선구자다. 우리가 가야하지만 갈 수 없었던 길을 몸소 먼저 가시고, 이로써 우리가 뒤따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십자가가 예수의 유일한 그림은 아니다
예수의 선구자적 역할을 설명하는 다른 그림의 하나가 대제사장 예수의 그림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생각이 담겨있다. 우선 대제사장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이처럼 예수도 우리와 똑같은 존재가 되셨고, 우리와 동일한 시험을 받으셨다. 우리와 같은 자리에서 출발하셨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뼛속 깊이 이해한다. 하지만 그는 보통의 대제사장이 아니다. 그는 죄가 없으신 분이다. 이는 그의 존재론적 순결함보다는 실천적 무죄함을 가리킨다. 우리처럼 시험을 받았지만 죄를 짓지 않고 순종하셨다는 것이다. 곧 그는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받았고, 오히려 이로써 순종하는 법을 배웠다. 이렇게 그는 구원자로서의 온전한 자격을 갖추셨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이 점에서는 그는 인간적 대제사장과 구별된다. 히브리서 식으로 말하면, 그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 계통의 영원한 제사장이다.
대제사장 예수께서 드리는 제사는 인간 제사장들의 제사와 다르며, 그가 세우는 새 언약은 첫 언약과 다르다. 예레미야가 설파한 것처럼, 첫 언약의 한계는 불순종이었다. 첫 언약의 제사가 일시적으로 죄인의 육체를 거룩하게 할 수는 있었지만, 사람의 양심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했던 이 제사는 죄를 기억나게 하는 것이었지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흠 없는 자신의 피를 드린 예수의 제사는 사람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며, 이로써 죽은 행실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한다. 죄를 해결하고, 순종을 가능케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율법을 돌 판에 새겼던 첫 언약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김으로써 순종하는 자녀들을 만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약속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 대제사장 예수, 선구자 예수를 마음에 깊이 새기라고, 이 예수를 뚜렷이 바라보라고 촉구한다. 우리는 이 새 언약의 약속에로, 이 약속을 이루시는 대제사장이요 선구자이신 예수를 보아야 하고, 그를 마음에 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삶을 위한 약속임을 믿고 기대해야 한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속하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우리 앞서 걸어가신 선구자적 여정의 절정이기도 했다. 갈보리는 죄 용서를 인해 감격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경유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십자가는 내 죄인 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내 온전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선구자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는 것이 우리 삶을 더욱 값진 것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권연경 (안양대학교 신학대학) yonkwon@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