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는 나사렛 예수의 죽음을 초래하는 각기 다른 등장인물의 행보들이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접근할수록 의미심장하게 합류하고 있는 점에서 절정에 달한다.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 처형으로 몰아간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그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 게 보인 무한정한 목자의 사랑과 왕적인 돌봄 사역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의 종교 및 정치권력자들이 외면했던 사람들의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통치를 실제로 맛보게 했다.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시고, 종교적으로 정결치 못한 상태에 있던 병자들을 자유자재로 접촉하여 정결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병자를 치유했고, 유대 종교권력자들이 필사적으로 수호하던 안식일의 신성불가침적 권위와 성전의 권위를 기탄없이 도발했다.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감복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세상의 중심을 차지한 권력자들에 의해 버림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복구시키려 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둘째,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로 인해 종교적 기득권과 정치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한 종교권력자들과 정치권력자들(헤롯 왕가와 로마 총독 빌라도)의 담합이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시기심, 질투심, 그리고 불의한 이익을 지키려는 권력욕 안에서 평소에는 적대적인 세력들이 예수를 증오하고 배척하는 일에서는 놀랍게 하나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원래 다른 신을 소개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돌로 쳐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다(신 13장, 18장). 그러나 예수의 적대자들은 그가 돌로 쳐 죽임을 당하여 순교당한 예언자의 반열에 등재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대신 “나무에 달려 죽은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은 자”라고 말하는 신명기 21장 22~23절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은 예수를 빌라도의 법정에 넘겨주어 로마제국의 십자가 처형 방식에 호소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가이사의 세계 지배 체제에 저항한 정치적 모반자로 몰아가 죽인 것이다. 로마의 십자가 처형은 “죽어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은 자라고 본 유대인들의 인습적인 이해에 잘 맞아 떨어지는 죽임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을 참칭하다가 신성모독죄로 죽었음을 선포할 생각이었다.
이 과정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무기력한 최후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좌초하고 말았다. 예수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죽음의 위기에 처한 스승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한 베드로의 영적 파산이 가장 극적이었다. 마태복음 26장 26~34절(세 번 배반할 것을 예언하시는 예수)과 26장 69~75절(세 번 부인)은 베드로의 무모한 의협심이 산산조각 나는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수난주간의 목요일 밤 성만찬 후에 예수가 자신이 체포되고 곤경에 처하며 모든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칠 것이라고 예고하자,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이 주 예수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주 예수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죽기까지 스승과 함께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의 예언대로 새벽을 알리는 닭이 두 번 울기도 전에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 그냥 모른다고 부인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저주를 동반한 맹세의 형식으로 예수와 자신의 무관함을 강조했다. 그는 당장의 곤경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십자가 처형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극한치를 보여주는 예수의 동선과는 정반대로 베드로와 제자들은 배반과 영적 파산의 길로 치달았다. 복음서의 마지막 장면들에는 변절한 제자들을 다시 모으셔서 파괴된 신뢰를 복구하시는 부활하신 예수의 사역이 나온다. 특히 요한복음 21장 1~21절은 베드로의 영적 재활‧복구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베드로와 제자들을 위해 새벽녘에 조반을 준비하신 후 아침식사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의 장면이다. 갈릴리 해변의 예기치 않은 성만찬 자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베드로의 무거운 죄책감을 벗겨 주시고 그의 영혼을 소성케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안식을 해치는 가장 큰 적은 죄책감이다. 죄책감은 우리가 행한 죄악들이 영혼에 가하는 부담감으로서 영혼을 손상시키고 영적 감수성을 손상시킨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이 죄책감 때문에 무미건조해지거나 냉랭해진다. 하나님과의 쌍방 소통이 사라지고 나면 신자들은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고립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영적 교착상태는 영혼을 피폐케 하고 신앙 경주를 계속 감당할 영적 활력을 앗아가 버린다. 그 결과 신앙생활은 홀로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 최면을 시키거나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내려는 종교적 분투가 되어버린다.
- 기자명 김회권
- 238호 (201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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