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와와 인문학 강좌] 에드워드 사이드, 프리모 레비, 서경식

향기에 찬 우리 조국의
비탈과 언덕으로 날아가 쉬어라!
요르단 큰 강둑과 시온의
무너진 탑들에 참배하라
아, 너무도 사랑하는 빼앗긴 조국이여
아, 절망에 찬 소중한 추억이여
우리 가슴의 기억에 다시 불 붙이고,
지나간 시절을 얘기해다오.
예루살렘의 잔인한 운명처럼
쓰라린 비탄의 시를 노래 부르자.
ㅡ히브리 노예들의 합창(Hebrew Slaves Chorus)
중국인들은 우리를 동이(東夷) 곧 ‘동쪽 오랑캐’라고 했고, 일본인들은 우리를 ‘조센징’이라고 경멸했다. 사실 히브리라는 단어는 알고 보면 굉장히 굴욕적인 단어다. 누군가 우리를 ‘동이족’ 혹은 ‘조센징’이라고 한다면 황당할 텐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라는 비루한 표현을 스스로 쓰고 있다.
성경에서 ‘히브리’라는 단어는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창 14:13)에 처음 등장한다. 여기서 히브리라는 말은 ‘건너온 자’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이 유프라데스 강을 ‘건너’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는 뜻이다. ‘건너다’의 뜻인 ‘아바르’의 발음과 ‘이브리’란 발음이 서로 같은 자음이라고 한다.
또한 아삐루(‘Apiru), 하삐루(Hapiru), 하비루(Habiru) 등의 어원에서 비롯된 히브리라는 말은 기원전 2천 년경 안정된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던 하층민 곧 용병, 노예, 반란자 등을 뜻했다. 불안한 족장 시대였던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시대 때,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문명 지역 사람들은 주변 지역 사람들을 ‘히브리’라고 멸시하며 불렀다고 한다.
아삐루(‘Apiru)혹은 하비루(Habiru)라는 말은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가나안 그리고 이집트에 흩어져 있는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을 말한다. 이 말은 근동 지역에 세워진 나라의 시민권을 갖지 않은 사회적 계층을 말한다. 아삐루는 사회의 중심에 자리 잡지 못한 뿌리 없는 존재로 살고 있는 ‘방황자’ 혹은 ‘이방인’을 말한다(Bernhard W, Anderson, Understanding the Old Testmant, New jersey, Prentice-Hall, Inc., Englewood. 1975. 33면).
어떤 종족이 아니라, 당시 근동 지역에서 유랑하던 하층민들을 가리키던 사회학적 용어였다는 말이다. 히브리인 아브라함도 정처 없이 떠돌던 대상 무역을 하던 사람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히브리인이 곧 하삐루인은 아니었지만, 하삐루인으로 불리는 사람 중에 히브리인들도 섞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히브리인들은 당시 강대국인 이집트, 바빌로니아 용병으로 고용돼 전쟁에 가담했고,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으며, 특히 이집트에서는 다른 하삐루들과 함께 피라미드를 쌓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포로 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유대교는 그들의 전통으로서의 ‘히브리적 역사’를 이데올로기적으로라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베르디(Giuseppe Verdi,1813~1901)의 오페라 ‘나부꼬(Nabucco)’ 3막에 나오는 합창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장면이다.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노동하면서 옛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장면이다. 히브리인들은 포로 시대 이후, 히브리적 뿌리를 정치적 유대교와 연결시켰던 것이다(로버트 쿠트・메리 쿠트 지음, 장춘식 옮김, <성서와 정치권력>, 한국신학연구소, 2000).
그래서 <탈무드>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역사서 <학가다> 첫 구절은 “우리는 이집트 파라오의 노예였노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우리 역사 교과서가 “우리는 동이족이고 조센징이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이스라엘의 힘은 바로 이 비루한 굴욕(屈辱)을 잊지 않는 다짐에서 나온다. 굴욕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민족사, 무서운 다짐이다. 굴욕을 잊지 않으려는 까닭일까. 그들은 유대인 언어를 히브리어라고 하고, ‘히브리 유니온 대학’, ‘미국 히브리 총회연합’ 등의 말을 쓴다.
본래 헤브라이즘(Hebraism)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문화를 뜻했는데, 중세철학과 몇 단계를 거쳐, ‘유대교+기독교 사상’으로 의미가 복잡하게 확장되면서, 그리스철학을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과 함께 유럽 정신을 형성한 두 기둥이다(사실 ‘예수운동’의 본질은 히브리적인 것과 헬레니즘 모두를 부정하고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예수-운동’을 헬레니즘으로 포괄시키는 것은 이해는 가지만 본질적으로는 범주화의 오류라고 나는 생각한다).
AD 70년, 로마제국에 저항해서 탄압받던 유대인들의 세계 유랑이 시작되었다. 흩어진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 離散) 유대인들은 끊임없는 박해를 받았고, 고향의 상징인 시온 산이 있는 땅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시오니즘’이라고 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영국은 시오니스트들에게 전쟁 협력을 요구하고, 1917년 밸푸어선언과 함께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위임통치령의 형태로 팔레스타인을 직접 지배했다. 1930년대 나치스가 유럽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가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하자, 독일계 유대인이 자본과 기술을 팔레스타인에 가지고 왔기 때문에 유대인 사회가 크게 성장했다. 전쟁이 끝나자 팔레스타인에서는 무력 충돌이 격해졌고, 영국에 대한 테러가 빈발했다. 이에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국제연합(UN)에 맡겼고, 국제연합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지구와 유대지구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드디어 1947년 11월 임시국가위원회는 이스라엘 독립선언문을 발표한다. 히브리인의 국가가 건설된 것이다.
“이스라엘 땅은 유대민족의 출생지다. 여기서 그들의 영적・종교적・민족적 정체성이 형성됐다. 여기서 그들은 독립을 달성했고, 민족적・보편적 의의를 갖는 문화를 창조했다. 여기서 그들은 성서를 썼고 그것을 세계에 전했다.”
19세기 중반에 등장한 시오니즘 담론은 마침내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현실화되었다. 그런데 이 국가가 몇 번의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뒤, 어느 순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는 폭력적 국가의 이미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피해자였던 히브리인이 새로운 히브리인을 학살하는 역설이 생겨난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They cannot represent themselves ; they must be represented.
- Karl Marx, The 18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
칼 마르크스는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자기들 스스로 자기들의 아픔을 알리지 못한다는 뜻으로 위와 같이 말했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1935~2003)는 이 말을 그의 명저 <오리엔탈리즘>(1978)의 맨 첫 장에 써 놓았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 글을, “동양인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고 읽은 것이다. 약자 동양인에 대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관심은 핍박받는 팔레스타인에게 전이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과연 무엇일까? 사이드가 보았을 때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이 만들어 낸 왜곡된 동양관에 불과하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프랑스 철학자인 푸코(Foucault, 1926~1984)의 영향을 받아, 오리엔트에 관한 유럽인들의 작품을 하나의 ‘담화’(discourse)로 보았다. 이러한 시각에서 사이드는 유럽인 작가인 르낭, 플로베르, 로렌스의 작품을 분석했다. 그 결과 이들의 작품에는 비(非)유럽적인 것을 ‘오리엔트’라는 추상적인 세계로 정하고, 그것을 비하하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세계관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서양 인문학에는 유럽과 오리엔트의 관계는 ‘주/객(主/客)’, 더 나아가 ‘주/종(主/從)’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사이드는 확인한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세대 동안 엄청난 물질적 투자에 의해 동양에 관한 지식 체계로서 생겨난 것이고, 서양인의 의식 속에 동양을 주입하기 위한 필터 역할을 해 왔음을 사이드는 밝혀 낸다.
이러한 ‘주/종’ 관계는 물론 ‘서양/동양’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같은 지역에서도 발생한다. 문화 예술은 때에 따라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히틀러 시대의 파시즘 선전 영화, 그리고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요란하게 울렸던 바그너 음악, 스탈린 시대의 포스터, 대한민국의 제5공화국 전두환 시대에 울렸던 건전가요 ‘아아 대한민국’, 레이건 정부의 힘과 권력을 상징하던 영화 <람보> 시리즈 등은 문화 헤게모니를 이용했던 표상들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오리엔탈리즘은 인간 상실과 민족 해체의 역사”(Edward W. Said, Orientalism, New York: Viking, 1978, 337면)라 했고 “지식인들을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사고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것”(위 책, 339면)이 그가 글을 쓰는 목적이라 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퍼붓는 폭력을 사이드는 용납할 수 없었다. 2000년경 컬럼비아대학 교수 에드워드 사이드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 병사에게 돌을 던지는 장면은 큰 충격이었다. 이 사진은 세계로 퍼져 갔고, 광주 비엔날레 등 여러 미술전에서 패러디되어 그림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충격적인 행동 이전에 그는 학술서를 통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청소년으로 이루어진 평화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연주회를 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폭력에 저항하는 외침은 전 세계에 퍼졌다.
나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관해 분노한다. 가자 지구는 150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다. 이 감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조직적으로 힘을 합쳐 버텨나가고 있다.
ㅡ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돌베개, 2011. 28면
요즘 많이 읽히고 있는 에셀 옹의 <분노하라>에서도 이스라엘의 폭력을 고발하고 있지만, 훨씬 전에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양인의 동양인에 대한 폭력을 이론적으로 입증했으며, 서양인의 폭력이 이스라엘에 전이되었음을 서술했다.
그러나 사이드의 연구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중동학 발전에 끼친 중동학자들의 공헌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둘째, 사이드가 본 동양은 이집트, 중동, 인도에 불과하다. 그는 한국, 중국, 일본까지 연구의 대상으로 확대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론은 보다 구체적으로 이론화되기 시작했다. 서양은 지배를 확장시키고 이식하는 반면에, 동양은 아직도 그 문화적 충격과 종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2차 대전 이후 아프리카・남미・아시아의 상황, 신식민지적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현상을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 혹은 트리컨티넨탈리즘(tricontinentalism)이라고 하기도 한다. 로버트 J.C. 영은 식민지와 종주국 사이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 있다(Robert J.C.Young, Postcolonialism-An Historical Introduction, Blackwell, 2001). 이 책 제1부에서 그는 ‘식민주의→신식민주의→포스트 식민주의’의 흐름을 설명하면서, 오늘날 포스트 식민주의는 아프리카・남미・아시아에 세 대륙에 걸쳐 만연되고 있다며, 세 대륙 곧 ‘트리컨티넨탈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서경식, 누가 피해자인가 
한일 관계에 주목하던 그는 2002년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시대의 증언자’인 프리모 레비를 다룬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한국어판 제목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창비, 2006)로 일본 이탈리아문화원 마르코 폴로 상을 받는다. 유대인 프리모 레비를 통해 그의 관심은 히브리인의 후예인 이스라엘로 향한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지옥을 겪었던 히브리인의 나라 이스라엘이 피해자 의식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며, 백기를 든 피난민들에게 총질을 가하고 유엔 구호 트럭조차 폭파시키는 절망적인 상황을 목도한다. 자신이 겪은 피해자, 약자, 소수자의 아픔을 연구해 온, 누구보다도 피해자의 마음을 아는 그는 피해자 의식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피해자가 피해자로서 기억하고 있다, 피해자로서만 서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누군가 비판할 때, 그 피해자로서의 기억, 피해자로서의 서사가 진짜 참된 것인지, 진지한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따져 보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서경식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철수와영희, 2009) 110면 -
이 질문은 곧바로 아우슈비츠의 피해자라는 ‘히브리 국가’ 이스라엘로 향한다.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하며, 수천 년간 피해를 입은 국민이기에, 피해자의 이름으로 팔레스타인에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양 행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1982년 6월 이스라엘이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군사 거점 공격을 명목으로 레바논을 침공하자 프리모 레비는 ‘이스라엘군의 레바논에서의 철수 요구서’에 서명했다. “우리 모두가 이웃의 장소를 빼앗고 그 대신에 살고 있다”고 근원적인 물음을 스스로 던져 온 프리모 레비에게 나치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가는 이스라엘은 견디기 힘든 수치였다.
레비는 가족이 살해되고 고향의 공동체를 파괴당한 유대인, 그것도 아우슈비츠의 지옥을 함께 살아 나온 그의 동료들에게 이스라엘은 매우 소중한 피난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비를 포함한 많은 유대인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생각에도 심한 균열이 생기는 때가 왔다. 1982년 6월에 이스라엘군이 PLO의 군사 거점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레바논을 침공한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가 자신이 바라는 유대 민족의 피난처라는 이미지와는 반대로 군사적 방향으로, 미숙한 방식의 파시즘적 방향으로 바뀌어 공격적인 의미에서의 내셔널리즘이 강화되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레비는 “우리는 우선 민주주의자인 다음에 유대인, 이탈리아인 등 그 밖의 존재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국가가 그 이웃에 취하는 태도는 그의 양심을 찌르는 가시와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곤란에 빠졌을 때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레비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이스라엘에 있는 친구 몇몇에게서 “그동안 유대인이 흘린 피에 눈을 감고 있다”는 ‘비수를 꽂는 듯한’ 편지를 받기도 했다.
ㅡ서경식,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창비, 2006. 258~261면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해, ‘증인’으로서 마지막 일을 완수하기 위해 애썼던 프리모 레비. 밖으로는 동족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퍼붓는 폭력, 안으로는 동료들에게 ‘비수를 꽂는 듯한’ 비판의 편지를 받으며 괴로움 속에서 프리모 레비는 조용한 자살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서경식은 현재 이스라엘 지도층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이 사실은 아우슈비츠에서 고난받은 이들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이러한 문제는 현재도 아시아를 무시하고 있는 일본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스스로 원폭의 피해자로 규정하면서, 원폭을 받게 된 침략 전쟁에 대해서는 절대 반성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피해자라는 거짓 기억을 이용하여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있는 이스라엘과 비근하다고 서경식은 지적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히브리 이스라엘 국가를 향해 돌을 던지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동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연주회를 열었다면, 서경식은 팔레스타인의 얼굴도 모르는 한 어린 아이를 위해 매월 얼마씩 후원하고 있다.
과거 독일의 영토였으나, 2차 대전에 대한 책임과 사죄의 의미에서 폴란드에게 일부 영토를 할양한 독일에 비하면, 독도를 둘러싼 일본의 입장은 파렴치하다. 독도를 노리는 일본 정부는 동시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우리는 원폭의 피해자였다’라고 강조하는 66주년 행사를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희생자였다’를 강조하는 히브리 후손들의 피해자 의식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너무 먼 이야기일까.
미시(微視) 파시즘과 끊임없는 대화
짧은 지면에 너무도 큰 담론들을 써 보았다. 이 글에서 ‘히브리’라는 말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피해받은 히브리인들이 어떻게 폭력적인 파시즘의 주체가 되었는가 너무도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글에 대해 “그래서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듣는 경우가 있다.
세계사속에서 파시즘적 요소 가령, 거대 금권, 거대 권력들은 개별적 인간에게 희생과 복종만 강요한다. 이렇게 세계사적이고 거대한 거시(巨視) 파시즘에 힘없는 개인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냉소하거나 포기해야 하는가. 냉소나 좌절의 태도를 지젝은 ‘미시 파시즘’(들뢰즈)적 태도라고 지적하면서, 바로 아래 인용문 같은 태도를 비판한다.
점에서 점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우글거리며 도약하는 분자적 초점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는데, 이것은 국가사회주의(나치) 국가에서 분자적인 초점들이 다함께 또는 도시 구역의 파시즘, 젊은이의 파시즘과 퇴역 군인들의 파시즘, 좌익의 파시즘과 우익의 파시즘, 커플, 가족, 학교나 사무실의 파시즘
ㅡ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천개의 고원> 새물결, 2001. 214면
이러한 미시 파시즘은 우리 일상 곳곳에 파시즘적 폭력이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반파시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나치즘이라는 거대 파시즘보다 가부장적 생활 세계를 보여 주고 있는 ‘선량한 미시 파시스트’인 부권 권력의 해체에 몰두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 안의 파시즘’이란 한때의 담론도 약간 위험성이 있다. 미시 파시즘을 주창하는 자들은 주요 모순마저도 기본 모순 곧 자잘한 모순으로 나열하며, “사는 게 그렇지” 혹은 “어디에나 그런 문제가 있지”라며 문제점들을 나열만 한다. 가령, 쌍용이나 한진의 해직자 문제도 “사는 게 그렇지, 자본주의란 가난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라며 결국은 냉소주의자나 이기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어쩌면 자기 이득에는 적극적 전력으로 현실 참여하면서, 타인의 고통에는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겠지”라며 관심 두지 않는 태도도 이와 닮아 있을 위험성이 있다.
이에 반해,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적대(antagonism)’라는 어네스토 라클라우의 개념이다. 라클라우가 말한 헤게모니적 절합(切合, articulation)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절대 화합할 수 없다는 ‘주요 모순(Mao)’이라는 말과 조금 다르면서도 유사하다. ‘적대’ 관계로는 한 공동체를 만들 수가 없다.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한 사회를 근원적으로 균열시키는 ‘적대’와 투쟁하는 것이다. 다양한 기본 모순 중에 핵심적인 주요 모순을 절합하여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미시 파시즘에 대한 지젝의 분노는 그의 <신체없는 기관>(b)이란 책에서 핵심에 해당된다. 중립에서 초연하기, 냉소주의와 무관심한 태도에 반해, 적대적인 거대 담론과 투쟁했던 인물들은 이렇게 말한다.
안위를 위해 자유를 포기하는 자는 둘 중 어느 것도 얻지 못한다.
He(Sic) who sacrifices freedom for security deserves neither. - 벤쟈민 프랭클린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개념은, 그 체제하에서 가장 약한 자가 가장 강한 자와 똑같은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소통(疏通)이다. 통하기 위해서는 대화 상대자와 대화할 수 있는 인식의 지평을 확보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불평등한 인식 구조를 구축시키는 ‘주요 모순’들이 오리엔탈리즘, 포스트 콜로리얼리즘, 미시 파시즘을 장악하고, 이 사회를 점점 양극화시켜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문학은 대중에게 드러내야 한다.
우리가 ‘히브리’라는 피해자의 고통에 동정하는 동안, 바로 그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역사의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고, 원폭의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일본은 아직도 반성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 진정한 ‘히브리’는 누구인지 살펴보고 진정한 히브리와 연대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일상적 참여가 시작될 때, 문제 많은 거대 담론들은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조금씩 모퉁이가 부서지면서, 그러다가 갑자기 해체되고 바뀔 것이다. 한 순간도 빠짐없이 거시 파시즘과 미시 파시즘의 문제에 대해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대화’(endless discourse)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것은 구도자의 종교적 예배일 수도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 프리모 레비, 서경식은 히브리인이 진정한 히브리인이 되기를 원했던 지식인들이다. 그들의 태도에서 나는 그리스도 사랑을 향한 영구 혁명의 편지를 온몸으로 썼던 바울의 심정을 가끔 엿보곤 한다. 가끔.
김응교 시인, 숙명여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