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호 서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19대 총선의 투표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진보진영의 정치인과 유권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야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가 무참히 꺾인 순간이었다. 여러 가지 주목할 사항들이 많겠지만,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정당들의 패배는 그냥 쉽게 넘길 수 없는 사안이다. 최근 터진 통합진보당의 경선 비리는 진보적 정치인들과 공동체의 체질 개선이 근본적으로 절실한 시점이라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노동자들의 ‘귀족화’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보편화라는 양극단의 구도에서 노동 권력의 문제는 또 다른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 시점의 한편에서는 이데올로기 자체의 논쟁이 가속되겠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념이나 강령을 근본에서 급진적으로 추구하자는 진중한 운동이 큰 탄력을 받을 것이다.

김상봉 교수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이런 정치적 맥락과 한국적 현실을 참조하면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 글을 쓴 저자는 ‘원래 진보신당 강령의 전문을 작성한 사람으로서 강령 실천에 대한 철학적 또는 이론적 논거를 확충하면서, 동시에 현실적 상황에서 강령 구현을 위한 구체적 행동 지침을 찾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김상봉은 이미 진보진영이 노동문제의 본질에서 많이 벗어났으며, 투쟁 자체가 도구화되고 경직화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저자는 주식회사라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에서 개체화된 공동체를 주목하여 노동운동의 이념과 실천 맥락을 환기하고 있다. 그런 의도의 핵심에 무엇이 있는지 이 책의 제목과 겉표지의 카피 문구로 올라온 구절을 보면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다. 저자는 ‘기업이 누구의 것인가’를 주식회사에 대한 ‘노동자의 경영권’의 잣대로 되묻고 있다. 말하자면 노동자에게 경영권의 획득을 통해 기업이 일종의 작은 공화국으로 자리 잡게 하는 노동운동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을 자발적이고 평등한 만남의 장소로

김상봉, 그는 ‘만남’의 아이콘이다. 그의 책 <서로주체성의 이념>(길)과 대담집 <만남>(돌베게)은 그의 철학적 관심이 어떻게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과 만날 수밖에 없는지 잘 보여준다. 나르시즘적 ‘홀로주체성’을 극복하고 나와 너의 만남에서 존립하는 ‘서로주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진정한 자유를 가진 주체가 출현한다. 자기로 모든 것을 환원해 버리는 주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만남을 통해 새롭게 열리는 ‘서로주체’를 통한 공동체야말로 참된 만남의 공동체일 것이다. 이 책은 이런 고민을 그대로 경제의 문제, 특히 기업과 노동자의 문제에 적용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홀로주체성’을 극복하는 ‘서로주체성’의 이념이 기업에 대한 존재 분석으로 이어진다.

김상봉은 이전의 저작에서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유일한 길은 아니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진보신당의 강령 전문을 작성한 저자가 “오직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만 인간의 자유와 참된 만남의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강령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주식회사와 시장을 긍정하는 듯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상봉은 처음부터 시장의 자유를 완전히 제거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신자유주의 양쪽 모두를 극복하는 노동운동이 그의 관심이다. 그래서 때론 그의 정확한 견해가 무엇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김상봉에게 기업에 대한 ‘서로주체성의 이념’이란 주주와 노동자의 더 나은 공생관계 그 이상이 아닌 듯싶다가도,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을 펼쳐보여 주지 않을까 하는 이중 심리가 작용한다.

이 책은 초두에 ‘서로주체성’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의 비정규 임금 노예로 전락한 노동자들을 해방시키고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 시대 세계화의 주역이 된 기업을 참된 만남의 공동체로 만들어 시장을 약탈과 착취의 지평이 아니라 인류의 보다 확장되고 고양된 만남의 지평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48쪽) 기업의 세계화가 착취의 세계화가 되지 않고 공동의 이익을 나누는 만국 노동자들의 만남의 세계화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엿볼 수 있다.

경제 활동이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을 뿐더러 국가 권력이 자본 권력을 제어하기 힘든 상황에서 기업은 이미 국가의 범위를 벗어난 조직이 되었다. 생산과 판매의 경제 활동이 이미 전 지구적인 지평에서 수행되고 있기 때문에 세계화를 거스를 수 없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저자는 세계화의 흐름을 인간성의 본질에 뿌리박은 운동으로 본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기업을 포함하여 어떤 공동체든 참된 만남은 ‘자발적이고 평등한 만남’이 확장되는 만남이다. 세계화의 흐름 가운데서 기업이 참된 만남의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을 돈으로 사는 상품화 행위와 인간을 이윤의 도구로 착취하는 억압적 구조가 지양되는 존재 방식을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분석은 저자가 시장을 바라볼 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시장은 자유를 주기는커녕 자본에 의한 권력의 조종과 지배에 의한 노골적인 착취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시장 자체의 모순과 유통의 헤게모니 그리고 자본의 분배 문제 등에 대한 분석이 없이는 시장을 나이브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시장을 인류 공동체가 서로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시장의 수동성 때문이다. 시장은 ‘감수성의 수동성’이 약동하고 ‘욕망’이 충족되는 곳이라는 측면에서 항상 결핍된 장소이다. 참여하는 자들이 스스로 충족시킬 수 없다는 측면에서 시장은 ‘타인의 결핍’을 채워주는 대가로 나의 결핍을 채울 수 있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교환은 수동성의 교환이고, 수동성은 가장 근원적인 자유의 장소를 보장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시장은 이런 수동성에 의한 선물의 교환 경제가 이루어지기보다는 힘을 가진 자가 먼저 먹어 치우는 억압과 착취의 전투장이 되었다. 이 점을 모를 리 없는 저자가 이렇게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재벌 권력을 해체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재적으로 확립하기 위해서다. 기업들이 활동하는 시장의 장소성 자체를 부정하고는 재벌 활동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고 구체적으로 투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정부 권력에만 맞서 싸워 노동자의 권리가 확보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노동자의 현실 분석에 실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진보 정치에도 실패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이유 때문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과 구체적으로 싸우려면 논리를 뒤집어 내재적으로 기업과 시장의 이념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오히려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직접적인 투쟁 방식일 수 있을 테니까.

주식회사를 작은 공화국으로

저자는 원래의 기획을 따라 주식회사에 대한 새로운 투쟁 방식을 설정하기 위해 주식회사를 재정의한다. 그에게 주식회사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가장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지평이자 존재의 진리가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장소”이다. 이 정의는 적어도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자본주의를 옹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노동자’이기 때문에 그 현실을 보자는 것이다. 노동자는 대부분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대다수의 회사가 주식회사인 것이 현실이기에, 우리의 삶의 자리를 제대로 묻기 위해서도 주식회사의 존재 진리를 제대로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식회사의 존재 진리를 물은 다음 할 일은 주식회사의 참된 주체성을 되찾는 것이다. 김상봉은 그 주체에 노동자의 경영권을 연결한다. 노동자의 경영권 확립이란 결국 ‘주식회사를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주식회사의 주체성을 돌려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주주의 몫을 배제하거나 해체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상법에 다음과 같은 법률 조항을 만들기 위한 입법 투쟁은 필연적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주식회사의 감사는 주주 총회에서 선임한다.’ 앞의 조항이 노동자 경영권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뒤의 조항은 주주의 합당한 몫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주의 몫을 배제하지 않는 주식회사를 존속시키되 현재의 경영 구조를 노동자 중심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노동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외부적 공동체(협동조합)를 조직하는 데서 대안을 찾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그것은 이 책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책에서는 주식회사 문제에 집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외부적 대안을 들어 기업을 밖에서 비판하기는 쉬우나 현실이 되어 있는 기업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기업 자체의 해체가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기업의 지배 구조를 민주적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더 현실적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김상봉이 그리는 기업은 공화국이다. 그는 국가가 기업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기업이 작은 공화국을 추구한다면 노동 해방의 현실적인 길과 재벌 해체의 과정이 모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자유로운 시민들의 생산 공동체로서 하나의 공화국 또는 폴리스에서야말로 주체들이 함께 참된 만남을 이루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경영권을 가질 때 무책임하게 회사를 경영하고 결국 망하게 할 것이라는 염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노동자는 시장의 기본인 자본의 존재를 인정할 때 기업 공화국이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 제대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다.

노동자의 자유는 소유권이 아니라 경영권이다

저자가 기업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들자는 제안은 자유가 소유권이 아니라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 보통 자유를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여 돈을 선택하거나 일정한 법적 권리 또는 소유의 권리를 확보하면 자유가 주어진다고 본다. 하지만 자유는 대상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형성하는 문제다. 그렇기에 노동자들이 자유롭기 위해 기업을 소유할 필요가 없다. 노동자들이 자기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로운 것이다. 즉 기업에서 노동자들이 생산 활동을 자기들의 결정에 의해 실행할 수 있다면 그것을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주식회사를 사적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사물적 대상만이 교환이 가능하고 그에 대한 권리를 소유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소유할 수 없으며 지배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업에 대해 자유인이 되기 위해 노동자가 경영권을 주장할 때에도 기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생산 활동에 대한 결의권 내지 수행권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저자가 보기에 경영권도 동등한 사람들(자유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권력이다. 하지만 이 권력도 타인의 인격 전체를 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특정한 부분을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다. 말하자면 정신적·육체적 노동력을 도구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갖는 것이지 인격에 대한 권리가 아니다. 따라서 어떤 경영권도 이윤 추구를 위해 노동자를 일방적인 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노동자들의 삶 전체가 자본과 경영 지배 권력에 저당 잡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아가 부도덕한 기업 권력이 노동자들을 사적으로 소유할 정도다. 저자가 사물의 소유권과 경영권이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자의 진정한 해방은 기업의 소유권과 지배권(경영권)의 분리에서 출발한다. 소유권이 경영권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경영권이 노동권과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식회사는 법인이기 때문에 법적 인격을 가지므로 자유로운 인격체이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주식회사의 실체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다. 이것이 주식회사의 내적 모순이다. 인격성을 가진 법인이 어떻게 주식 양도 자유를 가질 수 있겠는가. 여기에 주식회사를 이루는 구성원이 누구이며 무엇이냐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저자는 주주를 법인의 사원이 아니라 외부의 채권자로 간주한다. 주주들이 이룬 단체가 주식회사라고 하지만 사실 주주는 자본 확충의 권리를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 주식회사는 자본의 결합체임에도 자본 뒤에서 영향을 주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회사 경영의 전문성 때문에 주주는 이사를 세우고 이사는 전문 경영인을 위촉한다. 곧 자본 결합체인 주식회사에 인적 결합체가 어떤 형태로든 권력을 행세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주식회사의 내적 모순이다.

이 내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경영권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주주는 경영에 참여하지 않으며 경영인을 위탁하기 때문이다. 주주가 아니라도 전문 경영인이 위촉되고 활동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노동자들만 도구화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대부분의 주주들은 회사 경영과는 무관하다. 그렇게 되면 생산 활동에 대부분 참여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 활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억압되고, 주주는 법인체에 물적 토대만 제공함으로써 인격적으로는 배제된다. 그러므로 주식회사는 처음부터 주인이 없지만 경영권의 배후에 있는 보이지 않는 인격체가 그림자처럼 움직이는데 이 그림자는 독재 권력이 되어 폭력적으로 행세한다. 본래 주인이 없는 곳에서 지배력을 발휘해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다.

애초에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는 말은 노동자들이 경영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허락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는 노동자가 지배 권력자로 군림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주식회사는 소유권을 가질 수 없으므로 경영권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자가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주식회사에서 경영권을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 어떤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회사에 대해 소유권을 참칭하는 자들은 추방해야 한다. 주주들이 회사의 경영에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주식회사의 본질 자체는 매우 불합리하다. 하지만 주인이 없어도 경제적인 목적을 가진 단체이므로 경영을 책임지는 사람은 있어야 하는데 그 적임자는 노동자들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경영권은 주식회사의 정신에 합당하다.

저자는 노동자 경영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노동자가 자유롭고 보편적인 주체로 인정받는 것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을 논한다. 보편적 주체들 간의 평등한 만남이 있는 기업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인격이 존재하는 구성원들 간의 서로주체성을 고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처럼 노동자가 개별자이면서 공동체의 전체를 드러내는 보편적인 주체여야 함을 뜻한다. 경영자는 보편적으로 확장되고 결속한 노동자들 자신이 타자로 대면하는 위치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보편적 의지와 활동의 표현들이 실현되도록 하는 경영권이야말로 저자가 추구하는 주식회사의 경영이다. 이 점에서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이 경영권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기업의 이념과 지배 구조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기업이 지속 가능한 조직이 되려면 자본의 운동에서 그치지 않고 서로주체성에 의해 더욱 고양된 공동체를 지향하고 인간이 존중받고 사람이 희망이 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이처럼 기업이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되기 위해 주식회사의 경영인을 종업원이 선출하는 책임 있는 주체들의 생산 활동은 필연적이라고 하겠다. 이것이 주식회사의 이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그 안에서 전복적 실천 전략을 찾아내는 김상봉의 결론이다.

분석과 상상력 사이

본서의 가장 중요한 논점은 저자가 정면으로 논쟁을 던지는 핵심 주제 자체다. 주식회사의 이념에 대한 내재적 분석을 통해 노동자 경영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의 시도가 얼마나 현실적이냐는 측면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김상봉이 주식회사의 자본과 시장에 대해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몽상적으로 접근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할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 소유 법칙은 부르주아 계급의 생산수단의 독점과 재생산에 그대로 영향을 준다. 이 점에 대해 저자가 잘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쉽다. 이는 시장에 대해 논할 때도 마찬가지다. 시장이 진공 상태에서는 자유의 영역이 될지 모르지만, 욕망의 권력적 배치에 의해 오염된 시장은 이미 자유성을 확보하기에 낭만적이지 않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에는 자본 권력의 복잡한 배치의 선분들이 존재한다. 저자는 주식회사를 통한 자본주의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지만 결국 주식회사 개조 이상을 논하기 힘든 논리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입법이 안 되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철학자가 삶의 보편적 지평에서 주식회사의 ‘정치적 존재’ 문제를 논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본서에서도 저자가 계속 말하지만, 우리 사회는 주식회사의 이념에 대해서는 기존의 주장들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노동자들의 보편 현실인 주식회사의 혁명적 되살림을 논할 가능성을 아예 시작부터 차단한다. 그래서 김상봉 같은 실천적 철학자의 몽상과 실천 전략이 의외로 노동자 문제에 대해 신선한 상상력과 토론 거리를 제공해 준다고 하겠다. 적어도 누가 주식회사의 새로운 이념과 노동자 경영권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섬세한 논리로 상상력을 발휘하며 사유하겠는가? 노동자들의 이상적 삶에 대한 강렬한 열정 없이 말이다.

김성민 님은 고신대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미국 New Saint Andrews College 대학원 과정에서 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SFC출판부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새로운 기독교 구성을 위한 청년담론운동에 관심을 갖고 소통, 변혁, 그리고 평화의 인문학적 주제로 공부하고 고민하는 평생 학생이자 운동가로 사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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