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호 편들고 싶은 사람]
모든 싸움에는 씨앗이 숨어 있다. 1700일을 향해 가는 재능교육 투쟁의 시작은 사실 2007년이 아니다. 불행의 씨앗은 1989년에 심겼다. 정규직 노동자였던 재능교육 교사들이 위탁계약자로 신분이 바뀐 해다. 그때부터 속병을 앓아 오던 이들의 억울한 아픔이 1999년 노조가 결성되면서 표출됐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오다가 2007년, 다시 이 질긴 싸움이 재개된 것이다. 그 투쟁은 1000일, 즉 3년이 넘어서야 겨우 언론의 관심을 받았고, 어느새 5년을 채우고 있다.
뿌리가 썩으면 잎이나 줄기를 잘라 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재능교육 교사들 마음에 맺힌 당장의 억울함이나 아픔도 물론 치유받아야겠지만, 이 사태의 근본적인 치료법은 따로 있다. 250만 명의 특수 고용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다. 특수 고용 노동자들이 어떻게 이 싸움의 세월을 견뎌 오고 있는지, 왜 새로운 씨앗을 심어야만 하는지 듣고자 전국학습지노동조합 재능교육 지부장 유명자 선생님을 만났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7월 6일,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에서 금요집회에 함께한 후 근처 카페에서 이야기 나눴다. 
1999년 처음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나섰을 때, 우리도 우리가 어떤 신분인지 몰랐다. 우리가 직접 쓴 계약서가 우리가 어떻게 노동자가 아니라고 갈라놓는지 전혀 몰랐던 거다. ‘특수 고용 노동자’는 위탁사업계약서를 쓴다. ‘위탁’은 회사가 어떤 부분을 나에게 맡기는 거고, 그걸 ‘계약’하니까 ‘위탁사업계약서’를 쓰게 된다. 즉 회사가 만든 교재를 가지고 회사가 정해 준 교실(학습지 교사들이 수업을 하는 구역)에 가서 수업을 하는데, 근로계약이 아닌 위탁계약을 맺으니 회사는 교사에 대한 모든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은 교사에 대한 고용 비용이 전혀 들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니 사측은 4대 보험은 기본이고, 휴가비, 육아휴직, 생리휴가 등의 복지 비용을 전혀 부담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학습지 교사가 ‘노동자’가 아닌 ‘개인 사업자’라는 것인데, 우리는 그 앞에 ‘위장된’을 붙인다. ‘위장된 개인 사업자.’ 이는 고용 비용을 줄이고, 노동조합 결성을 막아 노사분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회사의 위장술이다.
회사가 직원 복리 후생 비용을 아끼려고, 직원들의 신분을 교묘히 세탁했다는 인상을 준다. 원래는 정규직 노동자였을 텐데 언제부터 학습지 선생님들이 개인 사업자가 된 것인가.
나는 1998년에 입사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입사하기 9년 전인 1989년에 위탁계약제가 도입됐다. 그때 위탁사업계약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교사들은 몰랐다고 한다. 나중에 선배들로부터 들은 얘기인데, 90년대 중반까지는 학습지를 안 하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하루에도 10장씩 회원 가입서를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회사가 “(지금은) 10명을 가입시키든 100명을 가입시키든 월급이 똑같지 않느냐, 실적을 쌓으면 성과 수당을 받으니 더 좋은 거다”라고 하니, 위탁계약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실적대로 수당을 받으면 더 좋겠다고 해서 받아들인 거다.
1999년 노조를 결성하고 투쟁을 시작한 배경은 무엇인가.
재능교육에는 정규직과 특수 고용직이 나뉘어져 있다. 1999년 10월에 먼저 정규직 노조가 현장 교사들에 앞서 파업을 시작했다. 혜화동 본사 앞에서 한 달 내내 투쟁했는데, 현장 교사들은 연대를 위해 참여하는 형태였다. 그러면서 움직임이 생겼다. ‘이들은 우리의 십분의 일밖에 안 되는데 우리도 못할 게 없겠다’는 생각을 현장 교사들 스스로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11월 말에, 우리도 한 달만 해 보자며 파업을 시작했다. 처음에 현장 교사들에게 힘 좀 실어 달라고 연대를 요청했던 정규직 노조는 갑자기 수천 명이 파업을 하니까 당황했다. 판이 커지니까 정규직 노조 파업도 해결하기 어려워지는 게 아닌가 싶어서 도리어 우리를 회유했다. 지도부에서 정규직 노조와 현장 교사 노조의 통합 논의가 없지 않았지만, 12월 중순에 정규직 노조는 자기들끼리 파업을 마무리하고 복귀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이런 말들을 던졌다. “너희, 노조 안 된다. 회사가 인정해 줄 것 같으냐.” 지도부에서는 통합 논의도 했다고는 하나, 우리가 볼 때 그들은 이미 배신자였다.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배신감을 크게 느꼈을 것 같다. 그 이후의 싸움은 어떻게 전개됐나.
현장 교사들의 노조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해 6월에 현장 교사들은 노조를 결성해 설립 신고서를 냈다. 그리고 정부를 상대로 ‘노조 설립 필증 교부’를, 회사를 상대로는 ‘노조를 인정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사실 노조 설립 필증이 쉽게 나오겠나 싶긴 했다. 어쨌든 노조 결성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니까 해보자 했고, 현장 자료를 모두 모아서 냈다. 아침이면 업무 조회를 하고, 지국장 지시를 받아 일을 나가고, 업무가 끝나면 업무 일지를 써서 내고, 회사가 주는 교재로 가르치고, 회사가 지정한 교실에서 가르치고, 돈은 모두 회사에 입금시키고… 우리가 어디를 봐서 개인 사업자인가. 결국 파업 보름 만인 12월 17일에 노조 설립 필증이 나왔고, 밀레니엄시대가 도래하기 직전인 12월 30일에 노사 합의를 했으며 이듬해 7월에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입사 이듬해에 파업을 한 건데, 신입 교사로서 당황스러웠을 듯하다.
11월에 입사하고 한 달 일해 보니, 뭐 이런 회사가 다 있나 싶더라. 당장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공교육 교사는 아니더라도 내가 맡은 아이들을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000년에 단체협약 체결하고 몇 달 안 돼서 회사가 일방적으로 회비를 인상한다고 할 때도 교사들이 나서서 ‘회비 인상 저지 투쟁’을 했다. 교사들 입장에서는 회비가 오르면 자동적으로 임금 인상 효과를 볼 수 있었지만, IMF 이후 가정 경제가 회복도 안 됐는데 회비를 인상한다고 해서 투쟁한 거다. 소비자를 위한 투쟁이었다. 1999년에도 그랬고, 2000년 투쟁 때도 엄마들(학부모)한테 지지를 받았는데, 그 결과 회비 인상을 1년 연기시킬 수 있었다. 그때는 노조에 힘이 있었다.
지금 투쟁의 시작은 2007년이었다. 그때는 노조가 힘이 없었나.
2000년 이후 노조를 깨기 위해 회사가 고민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을 거다. 그러니 나도 하루도 쉼 없이 노조를 지키기 위해 싸워 왔다. 회사가 5~6년간 영업 실적이고 뭐고 뒤로한 채 지국에 지시한 첫 번째 목표는 노조 가입률 떨어트리기였고 이는 곧 인사 고과 1순위로 매겨졌다. 고위급 직원들 회의 자료에서 확인한 사실이다. 2002년부터 3년간 노조 중앙 간부로 일하면서 단체협약 투쟁을 하고 현장에 갔을 때였다. 거기는 내가 전에도 일했던 지국이고 같이 일하던 선생님들도 있었는데, 왕따를 심하게 당했다. 뿔 달린 사람 취급을 했다. 2년 반을 버텼다. 2년쯤 지나서야 동료들이 하는 얘기가, 지국장이 “유명자 오면, 밥도 같이 먹지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시켰다는 거다. 또 단체협약 사항에 보면 신입 교사 집체 교육 시간에 노동조합 교육도 하도록 되어 있는데, 교육하러 가면 교사들 빼 돌리고, 교육 시간도 배정해 주지 않아서 노조 간부들이 늘 신입 교사들을 찾으러 다녀야 했다. 신입 교사들 앞에서 사측이랑 싸우는 모습을 보여야 하니 교사들은 회사도, 노조도 싫다 했다. 결국 조합원 비율이 줄어들고 노조가 위축되면서 2007년 단체협약까지 체결된 것이다. 

2007년 5월, 임금 삭감안이 포함된 단체협약이 체결됐다. 사측이 임금을 줄여야 했던 원인은 사측의 무능한 경영에 있다. 그로 인한 손실이 고스란히 교사 임금 삭감으로 이어졌는데 거기에 노조가 합의함으로써 회사는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제도를 개악할 수 있었다.
사측의 어떤 점이 무능했나, 또 노조는 왜 자신들의 임금이 삭감되는 안에 합의한 건가.
매년 단체협약을 체결해야 하지만, 노사 갈등으로 4년 만인 2004년 9월에 체결했다. 당시 현장 교사들은 정규직이 아니라서 퇴직금이 없었고, 장기근속에 대한 대우도 없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실적과 무관하게 장기근속자에게는 수수료 지급 비율을 높여 달라고 요구했고, 사측도 이에 합의했다. 그런데 1년 정도 지난 2005년부터 임금 지출이 늘어나니까 사측이 안정적인 급여, 안정적인 고용으로 노동자들이 태만해진다는 논리를 들어 실적에 따라 수당을 주겠다고 했다. 그것이 이른바 ‘3W’다. 일주일에 3명씩 10주 연속 신입 회원을 받아오는 교사에게 금 한 냥을 주고 우수 교사 동영상을 만들어 주었다. 30주, 50주를 계속 신입 회원을 받아 오는 교사들을 스타 강사라고 강당에 모아 놓고 드레스를 입혀 주고, 전세기를 빌려서 호주·태국 관광을 시켜 주고 그랬다. 교사들이 난리가 났었다. 신입 회원을 3명 이상 만드는 건 2주 연속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도 상위권에 있는 누군가가 이번 주에 3명을 못 만들 것 같으면, 한 주만 더 하면 1등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부추겼다. 그러니 지국장이 가짜 회원을 만드는 데 공금을 쓰게 됐고, 교사들도 가짜 회원을 만들어 회비를 대납했다. 결국 자기 돈으로 해외여행 다녀온 꼴이 됐고, 가짜 회원을 다 쏟아 내면서 회원이 엄청 줄었다. 그런 회사의 무능 경영이 2007년 싸움의 원인이었다.
노조 집행부가 판단을 잘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체협약안을 정하는 절차에 문제가 있었다. 노조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현장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그러려면 전국을 돌면서 공청회나 설명회를 해야 한다. 그런데 단 한 번의 공청회나 설명회 없이 바로 찬반 투표 일정을 공지해 버렸다. 그래서 5월 단체협약을 체결하기 전에 몇몇 사람들이 부결운동을 했다. 하지만 단 몇 표 차이로 단체협약안이 통과됐다. 체결 조인식을 하기 전날 노조위원장과 새벽 3시가 넘도록 이야기했다. 위원장은 “노조가 힘이 없어서 체결할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래도 교사 조합원들 대상으로 설명회를 해라. 노조가 한다고 하면 조합원들은 대부분 찬성해 주는데, 이번 안건은 찬반이 반반이지 않느냐” 하면서 설득했다. 그래서 위원장이 “아침에 조인식에 가지 않고 다시 생각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끝내 약속을 저버리고 조인식에 참석했다. 결국 12월에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노조 중앙 간부들은 모두 총사퇴했다. 
우리는 해고를 당해도 부당 해고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해고가 아니라 계약이 해지됐다는 거다. 5년간 노조 탄압을 받았는데, 정규직이라면 고용노동부(노동부) 노동위원회에 제소할 수 있지만, 노동부는 너희는 개인 사업자니까 민사소송을 하라는 거다. 금융권에서도 자영업자로 취급받아 대출도 잘 못 받는다. 그런데 이게 처음부터 그런 게 아니다. 1999년에 처음 노조 설립 필증 받았을 때는 노동부에서 근로 감독도 나왔고 우리가 파업하면 노동쟁의 조정도 거쳤다. 그러고 보면 노동 3권은 보장받았던 거다. 그런데 그 사이에 현행법은 바뀌지도 않았는데 노조가 힘이 없어지니까 아무런 권리 행사를 못하게 됐다. 사측에서 “학습지 노조는 법이 정한 조합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2005년 대법원 판례를 들며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 노동부는 자기들이 노조 설립 필증 내 줬으면서 도리어 우리에게 대법원을 상대로 싸우라고 한다.
최근 사측과 10차에 걸친 협상을 진행했다. ‘단체협약 원상회복’, ‘유예기간 없는 전원 복직’ 이 두 가지는 사측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음에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다. 다른 인터뷰에서 새로운 선례를 만드는 투쟁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 새로운 선례인가?
최근 몇 년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대부분 해고자들의 복직 투쟁이었다. 그런데 세부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큰 틀에서 사측과 합의한 내용이 ‘유예기간을 둔 순차적 복직’이다.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3년까지다. 그게 선례가 되는 거다. 재능교육 사측도 순차 복직을 꺼내면서 기륭전자나 동희오토의 순차 복직을 예로 든다. 복직하는 노동자가 겨우 10여 명인데, 그 큰 공장에 일시에 복직시킨다고 해서 문제될 게 뭔가. 사측이 그들을 고립시키려는 거다. 동희오토는 6개월, 1년, 1년 반 동안 3명씩 9명이 복직했다. 1차로 들어간 3명에게 현장 노동자들이 감히 아는 척을 못했다고 한다. 밥도 같이 못 먹었다. 몇 달 만에 만났더니 복직을 했음에도 심적 스트레스가 워낙 심해 피골이 상접해서 나타났더라. 그래서 순차적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유예기간 없이 일시에 전원 복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재능교육 해고자 11명이 같은 지국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순차 복직만 고집하는 건가. 자본의 선례를 만들려는 거다. 나는 노조를 깨기 위해 10년 동안 애쓴 재능이 이번에 협상한다고 해서 착한 자본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재능이 악질 자본이라고 말하면서 왜 돌아가려고 하느냐고 한다. 그런데 모든 노동자가 회사를 사랑하나? 회사를 사랑하지 않으면 생계도 포기해야 하는 건가? 같은 노동자들이 그런 질문을 할 때 참담하다. 지금도 재능에서는 그걸 강요한다. 나는 들어가서 그걸 바꿀 거다. 바꾸려고 한다.
1600일 넘도록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합의를 할 계기가 있을지 회의가 들고 우려된다.
자리를 지키는 사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끝에 남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지금 하는 모든 투쟁이 사측을 향한 압박이라고 생각한다. 고공 농성, 단식, 한강 다리에 매달리는 것…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 회사가 합의안을 내놓는다. 기륭도 그랬고 동희오토도 그랬다. 재능이 먼저 교섭하자고 제안한 것도 버틸 수 없는 선까지 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싸우는 열정으로 재능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찾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앞으로 계속 들어올 교사들을 향해 자본은 계속 저 짓을 할 것이다. 나는 그걸 바꾸고 싶다. 
대학 때 응용미술과 사진을 전공했다. 충무로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다가, 좀 좋은 장비를 사고 싶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나보다 3개월 앞서 재능에 들어가 일하던 후배의 소개로 일을 시작했다. 후배가 2, 3년쯤 다니면 돈 모을 거라고 해서 쉽게 생각하고 들어왔다.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에게 어떤 선생님이었나.
난 아이들을 좋아한다. 선생님으로서 의욕도 많았고, 아이들에게 부끄러움 없이 가르쳤다고 생각한다. 엄마들이 볼 때 학습지는 거기서 거기다. 100%는 아니지만, 교재 때문이 아니라 선생님을 보고 학습지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동네는 재능 선생님이 괜찮아’ 그러면 재능을 선택한다. 자녀를 셋 둔 어떤 엄마는 ‘학습지 오래 시켜 봤는데, 선생님처럼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는 처음’이라고 얘기해 주기도 했다. 나는 그만둔다고 하는 회원도 ‘학습지가 필요하지 않다’ 싶으면 굳이 붙잡지 않는다. 우리 시대 아이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내 돈 몇 푼 더 벌자고 영어만 할 게 아니라 국어도 하고 수학도 하라고 말하기 그렇다. 도리어 아이가 부대끼는 것 같으면 좀 쉬라고 말한다.
사진 장비 사려고 시작한 일인데, 너무 오래 계시는 것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도 든다.
사진이야 뭐…. 처음에 투쟁하고 2년간 자동차 트렁크에 카메라 가방을 항상 넣고 다녔다. 투쟁하다가도 피사체 찾아 한 컷 누르자, 잊지 말자 하면서…. 그런데 심신이 피폐해지고 힘들어지니까,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게 안 되더라. 2년 지나고 나서는 아예 방구석에 던져 버렸다.
카메라는 던지는 게 아니다. (웃음) 투쟁하는 동안 정말 많이 힘들었을 듯하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외로움과 싸우고, 천막 농성을 하면서 추위와 더위와 싸워 오셨다. 생활고는 물론이고, 해고, 재산압류, 용역들의 폭행 등 무수한 고통을 겪었다. 단식, 삭발, 고공 농성 등 고강도 투쟁까지… 어떻게 견뎠나.
1600일 넘게 지금까지 함께해 준 조합원들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 이런저런 방식도 다르고 언성 높여 싸우기도 하지만, 혼자라면 못 싸웠다. 특히 재능지부 조합원 아닌 다른 지부 조합원인데도 몇 년째 함께해 주는 분들을 보면, 내가 저 분 입장이었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학생들도 많이 와 줘서 감사하다. 한기연(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 서울대 사노위(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추진위원회), 성균관대, 이화여대 학생들이 많이 온다. 또 요즘 코오롱처럼 장기 투쟁 사업장이 많은데, 그런 분들 다 모여도 몇 십 명 안 된다. 도리어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동병상련을 느낀다. 끈끈하다.
앞으로의 계획과 복귀한 다음에 어떤 일들을 할 계획인지 들려 달라.
올해 초, 장기 투쟁을 하고 있는 수도권 투쟁 사업장을 다 지나면서 서로 힘을 북돋우는 ‘희망 뚜벅이’ 걷기를 했다. 또 시청광장에 ‘희망 광장’을 차리기도 했다. 그 연장으로 투쟁 사업장이 서로 연대하려고 한다. 투쟁 사업장에 서로 가 주고, 곧 민주노총 총파업도 예정돼 있다. 비정규직법과 정리해고법 철폐를 위한 연대 투쟁도 고민하고 있다. 복귀하면 한 번에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현장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것부터 차근차근 바꾸어 나갈 계획이다. 말했듯이 우리가 힘들게 일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특수고용제도이기 때문에, 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다.
그는 오후 3시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4시에 재판이 있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굵은 빗줄기는 땅을 적시고 있었다. 그를 배웅하고 자리를 정리하려고 다시 카페에 돌아와 앉았는데, 문득 이들의 싸움이 그치지 않는 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그칠 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이들은 거리에서 천막에서 투쟁한다. 그러나 이제 그만 이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이 빗줄기, 그들의 가슴에 그만 들이쳤으면 좋겠다.
진행 및 정리 이종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