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호 오두막 묵상]

▲ ⓒ정영란
어떤 이들은 분열이 순기능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분열을 통해 다양성이 발현되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열은 결코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다양성은 유기적 일치의 틀 안에서만 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것이 다 다양성은 아닙니다. 그것이 생명력 있는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되었을 때, 비로소 ‘다름’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래알은 아무리 많이 모아 놓아도 모래알일 뿐입니다. 시멘트를 통해서 하나가 될 때 강한 콘크리트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몸을 보아도 입, 귀, 눈, 코, 손, 발이 따로 있으면 아무 기능도 할 수 없습니다. 한 몸의 지체로 통합되었을 때만 그 고유한 기능들을 발휘하여 하나의 몸을 온전케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분열을 선택의 기회로 여기기도 합니다. 어차피 자유로운 세상이니, 분열을 통해 자기가 선호하는 쪽에 속하여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뜻을 맞추어 나가면 좋지 않으냐는 논리입니다. 이 경우 선택이란 분열을 고착화하고 집단이기주의를 만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분열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할 때, 나름의 평가나 결단에 앞서 유기적 통합의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때 반대파의 굴복이나 설복을 고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반대파와 함께 공존하고 함께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내가 확신하는 바를 관철하기보다는 나를 반대하는 그들과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하느냐를 끝까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을 불구로 만들게 될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죄를 지은 사람과도 용서를 통해 하나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상대가 회개할 때만 용서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됩니다. 때때로 용서와 하나 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때도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꼭 결정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문제가 아닌 견해의 차이로 분열하려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탐욕과 이기적 의도가 숨겨져 있기 마련입니다. 분리하는 자, 당 짓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처럼 우리의 십자가도 화해와 일치를 위한 통합의 십자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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