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호 동교동 삼거리에서]

지금껏 거쳐 온 직장 가운데 유달리 사표를 자주 ‘쓴’ 기간이 있습니다. 해마다 두 차례 이상 사표를 썼고, 그 중 세 번을 ‘제출’했지요. 나머지는 가방에 고이 넣어 출퇴근길을 오가며 ‘이걸 내야 할까? 그게 지금인가?’ 속질문을 부단히 던지거나, 외투주머니나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꺼내보며 답 없는 자문을 하곤 했지요. 제출하지 않은 사표를 그렇게 품거나 들여다보며 자문하는 동안 마음이 누그러지거나 다시 시작해볼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 그로써 ‘사표 쓰기’가 쓸떼 없진 않았던 걸까요. 연초부터 사직서 얘기라니 좀 뜨악해하실지도 모르겠군요. 사직서 쓰는 시기가 따로 있지 않은데다, 웬만한 직장인이라면 ‘연중무휴’ 고민거리가 사직이니 너무 타박마셨으면.
리젠트 칼리지 학장을 지낸 고든 스미스의 《소명과 용기》에 다음 구절이 나옵니다.
“반드시 사표를 내야 할 때가 있다. 요즘 같은 경제체제 아래서는 직장생활에 충실한 사람들도 최소한 한번쯤은 직장을 바꾸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양심과 소명에 좀더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한 목적에서 사표를 제출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사표 제출은 용기 있는 행동이다.”(279-280쪽)
입사지원서가 조직(직장)생활의 통과의례이듯, 사직서라고 새삼스러울까요. 물론 기대감과 희망을 품게 하는 지원서에 비해, 결별과 떠남에서 오는 적당한 아쉬움과 상당한 후련함, 그 후로 엄습하는 ‘사직 이후’의 막막함으로 인해 사직서의 무게가 훨씬 크게 다가오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가운데 ‘생계 아니면 양심’의 선택 상황으로 강요당하는 사직(“사표로 지켜낸 양심, 나는 행복했습니다”?36쪽?고상만)이나, 시한부 일터의 운명 안에서 제출 시한이 이미 정해져 있는 비정규직의 사표(“나는 ‘용병’이다”?56쪽?정재훈)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옵니다.
커버스토리 주제 선정을 잘못 한 걸까요. 공교롭게도 1월호 준비 과정에서 지난 1년반 여를 ‘함께 떡을 떼며 일해온’ 동역자 최현옥 팀장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사표’ 제출을 아쉬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했거든요. _옥명호

“아직도 복상을 모르세요? 복상 정도는 보셔야 합니다.”
홍보 부스의 북테이블에서 사람들을 향해 정색을 하며 당당히 말하던 때가 다시 그리워질지요. 겨우 1년 하고도 5개월을 함께했을 뿐인데, <복음과상황>과는 왜 이렇게 긴 인연의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잡지로 만난 지는 꽤 되었고, 주변에 복상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그 물에서 자연스레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잠시 머물다 이런 흔적을 남깁니다. 독자님들과 좀 더 편안하고 따뜻한 만남을 갖고 싶었는데, 닥친 일에 쫒겨 그리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늘 그렇듯 이상은 높고 현실은 까마득하기만 한 시간들이 이렇듯 흘러가네요. 일하는 동안 어떤 보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것들을 배워가는 시간이었어요. 사직서를 내면서도 이게 끝이 아니라는, 또 어딘가에서 복상이 매개가 되어 다시 인연이 시작되리라는 마음이에요. 그동안 모두 모두 감사했습니다.^^ _최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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