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호 동교동 삼거리에서]

“몸뚱이만 실속 없이 너무 비대해진 120여 세의 한국교회.”
김세윤 풀러신학교 신약학 교수의 글에서 읽은 이 짧은 구절이 지금도 머릿속을 맴돕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실재화하는 일꾼(agent)이어야 마땅한 교회는 샬롬의 훼방꾼으로 추락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기독교를 과시적으로 표방하는 정치인들, 관료들, 기업가들이 더 늘었으나 그들로 인하여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확대되고 사회가 맑아지고 따뜻해지기는커녕, 도리어 민주화가 심각히 후퇴하고, 부정부패가 더 악화되었으며, 불평등 구조가 고착되었고, 갈등이 증폭되어 기독교가 세상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김세윤,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 23쪽)
왜 이렇게 된 걸까요? 김 교수는 그 원인이 “신학적 빈곤”, 곧 “근본적으로 복음의 부분적 이해, 오해, 왜곡”에서 말미암는다고 지적합니다.
“현재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실현하는 데 보이는 전반적인 무능함과 일부의 심각한 부패를 보면서, 이 부패와 무능의 한 근본 원인인 신학적 빈곤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빈곤은 근본적으로 복음의 부분적 이해, 오해, 왜곡에서 나타난다.”(같은 책, 18쪽)
하여 이번호에서는 한국교회가 ‘샬롬의 일꾼’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원인을 ‘복음의 공공성’을 통해 톺아보았습니다.

복음이 사적 영역에만 머물고 그 영향력은 여전히 ‘찻잔 속 태풍’ 수준인 듯합니다. ‘편들고 싶은 사람’에서 이진오 목사는 “관계의 딜레마와 침묵의 카르텔”이 주요한 한 원인이라고 봤습니다. 한기총 패밀리를 욕하지만, 좀 더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면 우리도 똑같다는 것이죠. 만만한 상대에게는 강하나, 강자나 친분 관계의 지인에게는 ‘좋은 게 좋은 거다’ 어물쩍 넘어가는 현실을 꼬집었습니다. 그도 “나이가 드니까” 관계의 선을 넘고, 카르텔에 맞서는 게 더 힘들어진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청년시절 그랬듯, 자신보다 더 젊은 세대들이 선을 넘어줬으면 하는 바람도 슬쩍 내비칩니다. 하나님 나라가 쭉쭉 뻗어나가지 못한 책임이 나에게도 없지 않음을 느끼며, 선 앞으로 한 발 용기 내어 봅니다. _이범진

친구 따라 이웃 교회에 처음 놀러갔던 작년 가을, 박성두 씨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데나 끼는 게 취미이자 은사(?)인 저는 이후로도 뻔질나게 드나들며 사교모임에도 독서모임에도 끼게 되어 그와도 친분이 생겼습니다. 이번 “청년주의” 인터뷰는 우리 주변의 평범하고 범상한 청년의 ‘스테레오타입’ 같은 고민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아무데나 끼면서 생긴 친분을 이용하여 박성두 씨와 인터뷰를 잡으려던 중, 갑작스런 암수술 소식에 놀랐습니다. 퇴원 후 미뤄둔 인터뷰를 통해 그의 담담한 개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우리 주변에 많은, ‘스테레오타입’의 청년이었는데 그래서 조금 더 친해진 느낌입니다. 제게도 그 스테레오타입이 있으니까요. _오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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