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호 무브먼트 투게더] 복음의 공적 열매를 잃어버린 한국교회
1995년 어느 날, 인도의 비하르 주(州) 곳곳을 돌아다니던 나는 보드가야(Bodh Gayā)라는 마을에 이르게 되었다. 석가모니가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보리수와 이를 기념하는 마하보디 사원이 있는 곳. 북적이는 힌두사원이 있는 여느 도시들과 달리 보드가야는 한적하고 목가적인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길고 외로운 여행에 지쳐버린 내 심신은 그곳에서 쉼을 얻었다.

근 20년 동안 잊고 지내던 보드가야에 대한 기억을 최근 한 사건이 되살려냈다. 세 사람의 기독 청년들이 마하보디 사원 내에서 ‘땅밟기 선교’를 한 모양이다. 보다 못해 수개월째 묵언수행 중이던 승려 한 분이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느라 묵언수행을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이 일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지난 2010년 봉은사 사건 때처럼 개신교의 ‘공격적 선교’가 또다시 도마에 오른 형국이다.
SNS에서는 이들의 무례하고 경솔한 행동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다. 그와 같은 공격적 정복주의적 선교방식은 현지인들과 타종교를 자극함으로써 현지 선교사들은 물론, 그 행위 당사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자해적’ 행동이라는 비판도 따랐다.
반면, 이들의 행동은 타종교인들의 구원을 바라는 사랑의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무조건 무례하고 독선적인 행동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과하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혹자는 방법이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사람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면 누가 그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반문하기도 한다. 심지어 ‘복음의 진보’를 위해 수고하다가 핍박과 저항을 경험한 바울 같은 이를 언급하며 그들의 행위를 믿음의 행위로 칭찬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내겐 너무 익숙한 땅밟기
땅밟기를 감행한 청년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SNS 댓글들을 접하는 나로서는 모종의 양가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행동과 생각이 불편하고 당혹스럽지만, 동시에 매우 익숙하다. 심지어 친밀감까지 느껴질 지경이다. 20년 전 보드가야를 돌아다녔던 내가 지금의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생각에 젖어 있었기 때문일까.
고백하건대, 나는 소위 ‘영적 도해’(Spiritual Mapping)와 ‘영적 전쟁’(Spiritual Warfare)이라는 개념을 복음전도를 위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수용한 우리나라 땅밟기 원조라 할 수 있는 Y선교단체 출신이다. 당시에는 타종교의 사찰과 신전 등은 ‘영적으로 제압’해야 할 마귀의 견고한 진(strong hold)이며 기도와 찬양이 이를 무력화한다고 믿었다. 이를 통해 복음의 진보를 막는 영적 결박이 풀어지고 사람들의 영혼이 복음을 수용하고 구원받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의 신학과 신앙에는 매우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특히 성서학 공부를 통해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고 행동하기보다 성서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과 열망을 배우는 방식으로 내 성서 읽기가 바뀌었다. 그 선교단체가 심어준 땅밟기류의 영적 전쟁에 대한 생각들이 불편해졌고 대부분을 폐기하거나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청년들의 행동이 타종교에 대한 증오심에서 추동되기보다 복음을 수용하지 못한 타종교인들에 대한 그들 나름의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이 아주 억지는 아니다. 땅밟기 신봉자들이 2010년 봉은사, 2011년 조계사에서 소란을 피운 벽창호 같은 이들일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경험으로 볼 때 사람을 사랑하는 선한 영혼을 지닌 신자들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땅밟기는 심각한 문제점과 위험성이 내포된 신학에서 기인하며 매우 파괴적인 결과를 양산하기에, 온정적 태도로 덮거나 옹호할 사안이 아니다.
‘땅밟기 신학’이 비기독교적 신앙에 기초한 세계관이며 성서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지적은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김철홍 장신대 교수(신약학)는 ‘땅밟기는 정령숭배적 세계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러한 세계관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편만한 다양한 형태의 악의 지배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기껏해야 악의 활동을 이차원적, 평면적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1) 김요한 목사(새물결플러스 대표)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영적 전쟁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언급을 하는 에베소서 6:10~18에서도 땅밟기류의 생각은 나타나지 않으며, 성경적인 영적 전투의 개념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더욱 분명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서서 믿음과 기도의 삶을 사는 것이지, 타종교의 사원에 침입하거나 재산을 파괴하는 식의 타자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2)
복음의 공공성 이해가 절실하다
땅밟기의 문제점과 위험성으로서 비기독교적 특성과 성서적 근거의 부재를 지적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하겠다. 필자는 여기에 덧붙여 더 근원적인 문제점으로서 ‘땅밟기 신학’의 기초가 되는 ‘축소주의적(혹은 환원주의적) 복음 이해’를 지적하고 싶다. 땅밟기류의 선교 방식은 복음을 주로 개인이 죄 사함 받고 죽어 천국에 이를 수 있는 보장으로 이해하는 신앙관에서 추동된 개념이라는 점에 유의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 이해에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오로지 인간 영혼의 구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인류에 대한 사랑의 봉사는 ‘구령의 열정’으로 이어지면서 ‘세상사’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소위 ‘세상 등지고’ 십자가만 보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 이해와 신앙관에서는 ‘세상을 구성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정치)나 세상에서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문제(윤리)는 이차적이거나 논외가 된다. 심지어 그에 대한 관심이 ‘복음전파’와 ‘구령(救靈)사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세상의 구원을 개인적 불신앙의 종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복음의 진보에 장애가 되는 타종교는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복음 이해는 ‘교회의 자기이해’에 결정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이라 생각하며 자아를 형성하는 ‘거울기’의 아기처럼, 교회의 자기이해는 쪼그라들고 뒤틀린 복음에 비친 자기 모습에 의존할 뿐, 타종교와 같은 세상의 타자들과 ‘대화’를 통해 형성될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세상 및 타종교에 향한 교회의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는 그들을 대화와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여길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자기인식에 타자가 들어설 자리란 애시당초 없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복음은 이러한 이해방식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복음서에서 ‘좋은 소식’(euaggelion)이란 하나님의 자애롭고 공의로운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지금’(here and now) 그분의 성품과 열망을 따라 살아가는 그의 백성들(예수의 제자들)을 통해 실현하기 시작하셨다는 선언이다. 이는 권력과 부의 구조가 배제하고 억압하고 타자시하던 모든 존재들에 대한 영접과 해방의 선언이다. 바울서신에서 ‘복음’이란 이 세상의 끝에 완성될 이스라엘의 회복과, 그로 인한 이방인들의 구원과 창조세계의 구속을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 안에서 ‘이미’ 이루어가고 계시다는 선언이다. 성서가 말하는 복음은 인간의 영혼과 내세가 아닌 철저히 ‘지금, 이곳’에 대한 관심이 많으며, 결코 ‘내면화’(internalization)되거나 ‘개인화’(privatization)되기 어려운 창조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롭고 공의로운 성품과 열망과 관련한 것이다. 결국 성서적인 복음 이해란 복음의 현세적이며 공공적인 특성에 유의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성서적인 ‘복음전하기’(euaggelizesthai) 또한 결코 구령을 위한 복음의 구두 선언으로 환원될 수 없다. 오히려 복음전도란 복음을 아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화해와 축복하기 원하시는 세상의 모든 공적 영역들에서, 문자적으로 갈 수 없고 문자적으로 전할 수 없는 영역들에서 ‘스스로 복음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영혼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창조의 모든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과 이 세상에서 타자들과 살아가는 모든 방식에서 하나님의 자애와 정의가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복음전도가 이해되고 실천되어야 할 원래의 자리라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복음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이 땅의 교회들은 한결같이 복음전도를 문자적인 복음의 전령사(heralds)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이 전령사들은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지만 그 땅의 무너진 것들을 수복하기보다는 그곳의 영혼 추수에 종사하고자 한다. 내세와 영혼 문제로 환원된 복음의 진보에 걸림돌이 되면 그것이 종교이든, 제도이든, 문화이든 그 어떤 것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전을 치를 전투태세를 갖춘 채 말이다. 결국 이러한 교회의 토양에서는 땅밟기와 같은 불행한 소산물이 계속 자라날 수밖에 없다. 이 땅의 교회들이 내세와 영혼 문제로 환원된 복음 이해에 천착하는 토양을 갈아엎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모든 공적 영역에 종사하도록 하는 통전적 복음 이해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땅밟기류의 소산물을 거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땅밟기 선교, 변할 수 있을까
물론 문자적인 의미에서 복음의 내용을 전하는 전령사들은 여전히 필요하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교회의 오래된 고백은 지금도 세상 곳곳에 전파되고 설명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이러한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전형적인 인물이다(갈 1:11-17; 고전 1:17; 롬 1:1-6). 그는 자신을 시기하던 전도자들의 전도가 잘못된 태도와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에도 “어찌하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시니 기뻐하고 또 기뻐할 것”(빌 1:18)이라고 할 만큼 복음의 진보는 절박한 문제였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 개신교의 일각에서는 이러한 절박성에 근거하여 땅밟기류의 공격적인 선교방식을 옹호하고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를 도리어 칭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절박성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복음전도의 방법과 동기와 태도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비록 바울이 복음의 절박성에 대해 언급했지만, 바로 뒤 빌립보서 2장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됨으로 자신의 기쁨을 완성하라고 권면하고 있다(2:1-11). 이는 단순히 복음의 내용이 ‘전달’되는 것이 바울이 바라는 전부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자나 받은 자가 복음의 내용, 즉 그리스도가 체현한 하나님의 자애와 정의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바로 ‘복음전하기’(gospelling)의 진수임을 의미한다. 결국 타종교인을 고통스럽게 하고 분노케 하는 땅밟기식 선교는 결코 ‘복음적’일 수 없다. 복음적이지 않은 방식과 태도는 본질적으로 복음을 위해 종사할 수 없다. 성서적인 복음전하기란 애초부터 ‘복음 되기’를 바탕 삼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드가야 땅밟기’ 사건 후 SNS상에서는 땅밟기 행위에 대한 옹호론이 그리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축소된 복음 이해에 갇힌 신앙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 개신교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조심스럽지만 훨씬 큰 규모의 옹호론이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다. 사회 일반과 이웃 종교들의 분노와 고통의 소리에 수그러들어 있다가도 어떤 계기가 생기면 상상 이상으로 땅밟기류의 마인드에 감염된 민낯이 드러날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 문창극 총리 후보의 역사인식과 관련하여 한국 교계의 감춰진 실상이 드러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람 일은 두고 볼 일이다. 땅밟기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구원하는 방편인 줄로만 알던 사람이 20년이 지난 후 전혀 달리 생각하게 되는 것이 어디 나만의 경험이겠는가. 사회를 힘겹게 하고 불쾌하게 만들던 그리스도인들이 훗날 복음의 공적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바뀌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사회적 신망을 잃어버린 교회가 소망의 보루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강보영
장신대 신대원과 영국 브리스톨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했다.(신약학, Ph.D). 현재 삼각교회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목회자 인문학 운동 ‘독자생존’의 멤버로 번역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