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호 레드레터 크리스천] 기지촌 할머니들을 위한 ‘운동가’, 햇살사회복지회 우순덕 대표

 

▲ ⓒ복음과상황 오지은

우순덕 ㈔햇살사회복지회 대표(62)는 2002년부터 평택에서 기지촌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다. 과부, 고아, 나그네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무작정 시작했다. 대학생 때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주시면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을 위해 살겠다’고 기도했고, 약속대로 기지촌 할머니들을 도우며 살고 있다. 12년 전에는 단순히 사회복지사로서 심부름꾼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요즘은 적극적인 사회운동가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할머니들 한분 한분의 개인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할머니들을 나라가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며 국가를 상대로 싸움을 시작했다. 기지촌 할머니들을 돕는 것과 관련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한다.
이 인터뷰도 ‘그런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해 성사되었다. 인터뷰는 경기도 평택시 안정리에 위치한 햇살사회복지회에서 8월 7일 오후 2시부터 진행되었다.

- (사)햇살사회복지회는 기지촌 할머니들을 돕는 곳이다. 올해로 12년째를 맞이했다. 사실상 우 대표님께서 시작하고 여기까지 이끌어왔는데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았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감리교신학대학교 입학금조차 내기가 힘들었다. ‘입학금만 내주면 과외수업으로 돈을 벌어 등록금은 알아서 내겠다’고 부모님께 간청해서 겨우 입학했다. 2학년 1학기 때까지는 어떻게든 마련해 다닐 수 있었는데, 이후에는 등록금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정원 200명이었다. 한 학년에 50명이었는데, 동기 중 여학생이 나를 포함해서 딱 두 명이었다. 교수님들 몇 분께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학교를 그만둬야겠다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했다. “하나님, 공부만 계속 할 수 있게 해주시면 평생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을 위해 살겠습니다.” 당시 소녀일 때는 김활란 박사가 여성들을 위해 많은 좋은 일을 했다고 들어서,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자 꿈꿨다. 기도원에 갔다가 새벽에 집에 왔는데, 교회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고 했다. 그때 우리 집에는 전화도 없었다. 학교에서 나를 찾는 전화를 교회로 한 것이다. 학교에서 등록금을 마련해놨다는 소식이었다. 남은 학기들 등록금도 이렇게 그때그때 ‘기도’와 ‘응답’으로 생겼다. 여러 사람들이 도와줬다. 그래서 기도한 것처럼, 여성들 돕는 일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 여성을 돕는 일은 다양하다. 그럼에도 ‘기지촌 할머니’를 돕기로 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98년 여름부터로 기억한다. 처음엔 도움이 필요한 가정폭력 피해여성들을 돕기 위해 서울여성의전화에 가서 1년 6개월 정도 상담 도움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40대 후반에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들어갔다. 99년에 대학원 1학기를 시작했는데, 학기 중 성매매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서 가정폭력문제보다는 성매매 여성들에게 더 관심이 갔다. 그러다가 여름에 어느 선배를 만났는데 나한테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결혼여성모임수련회에 오라고 하더라. 선배가 국내에서 기지촌 할머니들을 돕는 단체에 들러 자료집을 얻어서 가져오라고 했다. 그렇게 기지촌에 남아있는 할머니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 위스콘신 지역에서 열흘 동안 머물면서 기지촌 여성으로 지내다가 외국에서 살고 있는 분들을 만났다. 밝게 사시는 분들이 많더라. 한국에서는 그렇게 밝고 즐겁게 사는 분들이 거의 없다. 한국에 들어와서 기지촌 할머니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나팔을 불며 다녔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 사회복지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쉽지 않은 분야라고 생각된다.
왜 하필 기지촌 할머니냐고 주위에서 묻는다. 나는 기도하면서 이분들을 섬겨야 한다고 확신이 들어서 무작정 시작했다. 기업이나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기가 쉽지 않은 분야라 걱정하는 분들도 있다. 후원 잘 받을 수 있는 복지대상을 좇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다. 집이 일산에 있어서 이곳 평택까지 오려면 두 시간 넘게 걸린다. 그래도 전혀 먼 거리인지 모르고 다녔다. 미국에서는 가까운 거리도 두 시간 이상 걸리지 않나? 남편 유학생활 때 그런 게 익숙해져서 괜찮다. 일을 시작하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문제들이 하나둘 씩 해결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확신했다.
 
- 경제적인 상황은 어떤가? 기업이나 정부로부터 후원을 받기 쉽지 않으면 센터 운영이 어렵지 않나.
후원받고 대출받으면서 여기까지 왔다. 후원이 근근이 들어와 연명하고 있다. 요 근처 교회 후배 전도사님들이 여기서 간사를 맡아주고 그랬다. 그분이 떠나면 또 다른 분이 오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생각한다. 감신대 선후배가 있는 교회들이 돕고 있다. 문제는 교회가 지속적으로 돕지는 못하고 2~3년 주기로 바뀌니까 연말이면 긴장이 된다. 새로운 교회에 후원 요청해야 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 내 또래나 선후배들이 차츰 은퇴를 앞둔 시점이라서 고민이 깊어진다. 좌우지간 은혜로 지내고 있다.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된다. 간사들도 봉사자들도 열심히 해준 덕이다. 

매달 이메일로 ‘햇살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내며 후원 요청도 하고 알린다. 더 어떻게 홍보를 해야 하나 고민이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은 이런 이슈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잘 알려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요즘 워낙 큰 이슈가 많아서 알리기 더 힘든 것도 있다. (후원 : 농협 118-17-001207, ㈔햇살사회복지회)

- 후원을 받기 어려워서 더 도와야 할 분들이라 여기신 것 같다. 12년째 기지촌 할머니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일본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서는 알아도 기지촌 할머니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1945년 9월부터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지 않았나. 10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기지촌에서 미군들에게 성을 제공했다. 이 여성들은 한미 정부 간 합의와 알력에 따라 기지촌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다. 이분들이 벌어들인 달러가 한국 경제 발전의 핵심 ‘사업’ 중 하나였다. 당시 국민총생산의 25퍼센트를 차지하며 지역경제 60퍼센트 이상을 부양했던 게 기지촌 여성들이다. 이곳 평택에 계신 분들이 70명 정도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어렵고 가난하게 사신다. 쪽방 얻을 돈도 없는 분들이다. 이제 평택에 주한미군이 이전해 들어오고, 평택지원특별법의 예산 총 18조 8천억 원 중 기지촌 할머니들을 위한 예산이 단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이 화가 나고 마음이 아프다.

- 지난 6월 25일에 122명의 기지촌 할머니들의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 기자회견이 있었다. 7월 7일에는 김광진 국회의원이 기지촌 여성 인권침해 진상조사와 명예회복, 생활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특별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7월 23일에 경기도의회는 정대운 의원이 제출한 ‘경기도 기지촌 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을 입법예고한 상태다. 뭔가 활발하게 일이 진행되는 것 같다. 옆에서 지켜본 할머니들의 모습은 어떤가? 큰 변화라고 생각되는데….
맞다. 할머니들이 용기를 내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낼 때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할머니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피해자이면서도 웅크리고 살았다. 그랬던 분들이 이제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뉴스에 얼굴을 내보이면서 “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가 겪은 일을 다 알았으면 좋겠다. 다시는 나와 같은 아픔을 겪는 여성이 생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모든 분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역사를 배우고,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기지촌 할머니들이 변하고 있다. 특별히 사람들 앞에서 연극을 하면서 많이 변하셨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숙자 이야기> 연극을 하면서 마음을 열고 당신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내부에서만 역할극으로 진행되던 거였다. 그런데 연출을 맡은 행복공장 노지향 대표가 연극으로 올릴 수도 있다고 하더라. 물론 할머니들이 원했을 때 말이다. 직접 의견을 여쭸고 처음엔 손사래를 치던 할머니들이 결국엔 연습 후에 용기를 얻어 결단하시더라.

작년 MBC 8시 뉴스 현장 르포에 5명의 할머니가 다 얼굴 내놓고 2분 50초 인터뷰했다. 김순배 할머니는 손자들이 인터뷰 때 얼굴 가리라고 하는데도 “내 인생이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대꾸하셨단다. 조명자 할머니는 편찮으셔서 요즘엔 잘 못 오시는데 똑똑하신 할머니다. 따지기도 잘하고. 얼마 전에는 로이터 통신이랑 인터뷰도 하고, 일간지에도 나오셨더라. 할머니들 마음의 어두움이 많이 밝아졌다. 평생 기지촌에서 고단하게 지낸 우리 할머니들이 용기 내어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생존자에서 활동가로 거듭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 힘입어 법적 소송이나 조례 만드는 것에 신경 쓰고 있다. 관련해서 정대운 의원과 통화를 했는데 여성가족평생교육원 간사의원이더라. 9월은 넘어가도 10월 안에는 상정해서, 내년 7월 안에는 기지촌 할머니들을 위한 예산을 세울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하더라. 내가 부탁한 건 아니다. 이분 스스로 그렇게 자신감 있게 이야기를 하더라. 소송도 변호인단이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잘 될 거라 본다. 국회 쪽은 잘 모르겠다.

- 이곳 자원봉사자 이양구 극단 해인 대표는 “그녀는 ‘바깥세상’에서 왔지만 그녀들을 거의 완전히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대표님을 언급하더라. 그런 마음이 할머니들에게도 전달된 것 아닌가.
나 말고도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으로 진행된 미술치료 등의 정서프로그램, 방문상담, 여행 등 꾸준히 해왔던 사업들이 할머니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할머니들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다가 연극을 하면서 봇물 터지듯 터졌다. 사람들이 나보고 수고한다 하는데, 나는 일감 있어서 오히려 감사하다. 구멍가게 하는 분들도 새벽부터 늦게까지 일하면서 자기 일을 꾸리지 않나. 나도 내가 시작한 일이기에 그렇게 할 뿐이다.

 

   
▲ 15명의 할머니들이 직접 무대에 오른 연극 <숙자이야기>(노지향 연출) 변방연극제 공연사진. (사진: 햇살복지회 홈페이지)


내가 혼혈아 모임 때문에 자리를 비웠을 때 할머니 한 분이 쓰러졌다. 천만 원 수술비가 필요했다. 꼭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병원비를 구하는 연락을 여기저기 했다. 어렵게 100만 원, 200만 원 모아서 수술했는데 안타깝게도 깨어나진 못하셨다. 속이 많이 상하고 마음도 아팠는데, 다른 할머니들은 감명받으셨는지 ‘우순덕이 우리 할머니들 살리려고 애쓰는구나’ 하시더라.

- 국가 폭력에 의해서 피해를 입고, 평생을 사신 분들이다. 일본 욕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일본 언론들이 최근 한국 기지촌 할머니들의 국가 배상 문제에 관심이 높다고 한다. 당시 한국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한국군 위안부가 만들어지고 운영되었는데, 그 피해자들에게 아직까지 어떤 보상과 위로도 없다는 현실은 일본으로부터 ‘너희 나라부터 자국민에게 배상하라’는 빌미를 잡힐 만하다.  
거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성매매를 알선하고 강요했던 정부와 지자체는 이제라도 근본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한때 외화를 벌어들인다며 ‘애국자’로 명명되었던 이들이다. 기지촌 할머니들이 지금 여기서 소외된 채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간다. 미군기지가 들어오면서 땅값이 올라 할머니들이 쪽방 한 칸 유지하기도 힘들게 되었다. ‘경기도 기지촌 여성의 지원 등을 위한 조례(안)’ 제정을 제안하고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등과 함께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에 뛰어든 맥락도 그래서이다.

어떤 할머니들은 스스로 (기지촌에) 왔다고 하면서 나보고 고생하지 말라고 했었다. 자기 삶의 테두리 안에서만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을 밖에서 객관적으로 돌아볼 기회가 없어서 그렇다. 역사적인 배경과 국가의 태도를 잘 엮어서 설명을 해드리면, 서서히 깨어나신다.

-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도 국가폭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표님께서도 12년 동안 이 일을 하면서 많이 변하셨을 것 같다. 어려운 여성을 도울 생각으로 뛰어들었는데 이렇게 국가폭력으로부터 할머니들을 지켜주는 투사가 될 줄 알았나?
몰랐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단지 심부름꾼이나 하려고 했다. 나는 운동가는 아닌데…. 그냥 소박하게 하나님의 일이니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요즘처럼 체력이 안 따라줄 때는 쉬기도 한다. 투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할머니들 한분 한분의 개인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할머니들을 나라가 책임져야 할 명분은 확실하다. 그게 정의이다. 2003년 이후 평택에 미군기지가 들어온다고 결정된 이후 여러 포럼들이 열렸다. 사회자도 남자, 연구 발제자도 남자, 담당자가 거의 남자들이다. 그런 포럼을 바탕으로 예산이 편성되니까 우리 할머니들에게는 1원 한 푼도 돌아가지 않은 거다. 포럼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에 내가 요목조목 문제를 제기하면, 기지촌 할머니도 아닌데 왜 이렇게 열을 내느냐는 식의 반응이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 기사를 찾아보니 운동가보다 더 열을 내는 사진이 있더라. 염동식 경기도의회 여성가족평생교육위원장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었다. 기지촌 할머니들의 주거와 생계 문제가 생각보다 시급하고 심각하다. 지난 4월에 기지촌 여성 지원방안을 담은 조례안을 도의회 상임위에 상정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충분히 그럴 위치와 자격이 되는 사람인데 “위원장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회피해서 화가 났다. 단순히 거절을 당해서가 아니었다. 염 위원장은 미군 근처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어릴 때 예쁜 포장지에 싸인 아기가 남의 집 문 앞에 버려져 있는 것도 봤다고 한다. 미군과 기지촌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기가 버려졌던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공감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수 있으면서도, 새누리당 집행부의 눈치를 보느라 양심을 버리고 상정을 안 시켜주는 게 화가 났다.

 

- 12년째 매주 1회씩 할머니들과 모임을 갖고 있다. 처음엔 찬양모임으로 시작된 것이 예배로 자리 잡았다고 들었다. 다른 지역 기지촌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하더라.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2002년 4월에 평택 근처 돌아다니면서 1,200만 원짜리 반지하를 얻어서 계약하고 복지회를 만들었다. 선배 언니가 100만 원 후원해주시고, 여기저기서 주신 돈 다 모아 200만 원 정도가 되었다. 여기에 은행 마이너스 대출해서 5월초에 입주했다. 6월 초에 개원 예배를 드렸다. 그러면서 할머니들한테 전화를 돌려서 인사를 드렸다. 7월 초에 할머니들 몇 분이 왔다. 그때 음식도 해드리고, 선물도 나누고 했다. 8월에 이미용 봉사 중에 김순배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다가 상처받은 일이 있었다며 속상해서 안 나가게 되었다는 말을 하더라. 찬송가가 너무 부르고 싶은데 잘 못 부르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바로 다음 주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찬송가 부르는 모임이 되었다. 찬송을 부르다 보니 기도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러다 보니 말씀도 전해야 할 것 같았다. 2005년부터는 화요일 예배가 되었다. 내가 목사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냥 부담 없이 쉬운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방문자들이 점점 늘었고, 방문하는 분들 중 목회자들이 설교해줄 때도 있다. 1년에 3회 쉬고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요즘이 쉬는 기간이다. 너무 더워서 할머니들에게 무리가 될 수 있다. 어제도 전화를 드렸는데 할머니들이 언제쯤 또 만나느냐면서 오고 싶어 하더라. 여기를 당신들의 학교로 생각하시나 싶었다. 예배가 있는 화요일이나 다른 행사가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분들도 있다. 외부 사람들도 많이 오는데 화요일 만남을 통해서 할머니들 마음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할머니들 종교도 다양하다. 어떤 분들은 예배를 드릴 때 뒤돌아 앉아계신다. 기독교 복지회이지만, 이곳에 오는 모든 할머니들이 편하게 계신 것이 중요하다. 강요하거나 눈치를 주지 않는다. 여기 오시는 분들이 한 30명 된다. 쌀 드린다고 하면 50명 올 때도 있다. 70명 정도 여기 평택에 사신다. 내가 오고 나서 지금까지 20여 명 돌아가셨다.

- 장례식 분위기는 어떤가?
평생 외롭게 사셨는데 가는 길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릴 때가 많다. 할머니 한 분이 지난주 토요일에 돌아가셨다. 가족이 있다는데 연락을 안 한다고 장례식장에서 연락이 왔다. 가족들 찾아서 연락을 드렸다. 가족들 내려왔기에 만나고 발인을 했다. 이번에 돌아가신 분은 그래도 장례식장에 성당 교인들과 친척들이 왔다. 그나마 다행인 경우다. 종종 장의차 운전기사와 나 둘뿐일 때도 있다. 기지촌 할머니들의 장례식에는 사람들이 정말 너무 없다. 종교가 없으신 분은 정말 아무도 없다. 빈소 차린 사람이 돈을 내야 하니 어떨 땐 빈소마저 없이 안치실에 계시기도 한다. 안치실 비용이 없는 분들도 있다. 함께 여기서 어울리던 할머니들도 장례식에는 잘 안 가려고 한다. 내가 같이 가자고 해도, 한두 분 올까 말까 한다. 저 죽음이 나의 죽음인 것 같아서 발이 안 떨어지는 거다. 자신의 죽음을 보는 모양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자신’의 죽음(장례식)을 보는 일은 얼마나 무서운가. 우순덕 대표는 “다행히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2주 전에 사진을 찍어놨었다. 참 예쁘게 잘 나왔다”며 취재진에게 사진을 보여줬다. 할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에서야, 우 대표가 지금까지 떠나보냈을 20여 명의 할머니들이 저마다 고유한 인생을 지닌 분들이었음을 실감했다. 그들의 죽음을 12년 동안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우 대표의 아픔도 어렴풋이 전해졌다. 인터뷰에 동석한 박정경수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사무국장은 그동안 우 대표의 활동을 옆에서 쭉 지켜봐 왔다. 그는 “내색하지 않으시지만 한 분씩 장례를 치르시면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프실 거다.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그분들의 명예와 삶을 되돌려주고 싶어 애간장도 타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사랑이 우 대표를 점점 급진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진행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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