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호 기자수첩] 제주를 찾은 70여 명의 기독청년들과 순례의 길을 걷다
“구럼비 발파 이후, 제주 강정에서의 평화 활동들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어느 평화활동가의 설명을 듣고 난 후였다. 그래, 강정은 진 게임이다. 몇몇 활동가들도 ‘잘 지는 방법’을 고민하자고 하지 않았나. 이미 진 축구경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시비를 거는 것처럼 ‘추태’를 보여서는 남은 체면도 깡그리 깎일 것만 같았다. 최대한 비참하지 않게, 잘 지는 방법은 패배를 쿨하게 인정하고 ‘무관심’해지는 거였다. 그래서 순례단이 강정의 해군기지 건설 현장을 방문한다고 했을 때, 마치 우리 편이 뻔히 진 게임을 관전하러 가는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따가운 햇볕은 그날따라 더 얄미웠다.
순례 행렬을 맨 뒤에서 쫓던 내 앞으로 한 아저씨가 끼어들었다. 신발을 구겨 신어 밖으로 도드라진 발꿈치가 눈에 띄었다. ‘거칠다….’ 때가 탄 큰 가방, 검게 탄 피부, 겸손한(?) 옷차림 등 우리 패잔병들의 행렬에 꽤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사 현장이 훤히 보이는 곳에 이르러서야, 그가 ‘멧부리박’이라는 평화활동가였음을 알았다. 그는 여기 멧부리라 불리는 곳(제주 해군기지 건설 현장의 시작점이자 강정마을의 해안 끝)에 천막을 치고 살면서 하루에도 수차례 공사 현장을 꼼꼼하게 살피고 기록한다. 대형 크레인들이 연신 쇳소리를 내며 승전가를 부르는 그곳에서 그가 입을 뗐다.

“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진 게 아닙니다.”
그가 건설 현장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불법과 무모한 행태들을 설명했으나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째서 그는 이 참혹한 현장을 보고도 ‘진 것’이 아니라고 했을까? 그는 (또는 이 순례단은) 왜 이미 진 경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쿨하지 않게- ‘패배의 기록’을 늘려가는 것일까? 5일간 순례단과 함께하며 풀어야 할 의문이었다.
# 강정마을, 그 새삼스러운 패배의 기록을 다시 들추다
새삼스럽게 그 패배의 기록을 다시 들추었다. (강정마을 코사마트 사거리에 위치한 평화센터에 사진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었다) 간추리면 이렇다.
2007년 마을주민의 10퍼센트도 참여하지 않은 마을총회(?)에서 일방적 찬성으로 해군기지 건설이 통과된다. 이후 국방부는 정부로부터 해군기지 건설을 승인받았다. 이에 강정마을회는 2009년 4월 이에 대한 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하고, 같은 해 8월 주민소환투표를 통해 김태환 제주도지사를 심판대에 올렸으나 11퍼센트의 투표율로 무산됐다. 이후 기지 건설에 필요한 사전작업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2012년 3월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구럼비 바위를 발파했다. 이후 해군기지의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구럼비 바위의 발파는 승부를 가른 상징적 사건이자, 기지 건설을 가속화시킨 현실적 사건이었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은 이 순례단의 시작도 그해 여름이었다. 상징적으로나 실제로나 패색이 짙은 그해 여름 시작된 순례단이다. IVF사회부, 기독청년아카데미, 기윤실청년TNA, 개척자들, 교회개혁실천연대, 성서한국, 새벽이슬, 평화누리, 청어람M 등에 소속된 기독인들이 이곳 강정의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고 평화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시작한 순례다. 그러니까 패배와 동시에 시작된 순례인 셈이다.
# 이번 순례의 주요활동은 ‘평화의 집짓기’
- 집짓기 현장에서 잉여인간이 되다
7월 21일~25일까지(4박 5일)의 이번 순례에서 70여 명의 참가자들은 농사 지원 활동, 해상 감시 활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평화활동을 지원한다. 가장 중점을 둔 활동은 ‘평화의 집짓기’다. 평화활동가들의 장기적인 활동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해주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서 참가 단체들은 건축비를 마련하고자 사전에 후원콘서트를 여는 등 힘을 모았었다. ‘평화의 집짓기’ 실무를 담당한 조윤하 기독청년아카데미 사무국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처음 계획은 컨테이너 주택 한 채에 600만 원 예산을 잡았었어요. 하지만 현장에서 활동가들이 필요로 하는 집의 수요가 많다는 말을 송강호 박사님으로부터 전해 듣고, 1층 컨테이너주택 위에 올릴 경량목구조주택을 한 채 더 짓기로 한 거죠. 정확한 결산은 내봐야 알겠지만, 자재를 아끼고 아껴 총 두 채에 약 750만 원이 들었습니다.”

계획 예산을 150만 원 넘겼지만, 단층집이 이층집이 된다는 것은 아무리 계산해봐도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한 채 가격을 조금 넘는 금액으로 (돈도 돈이지만) 5일 만에 이층집을 만든다? 사칙연산에는 포함되지 않는 변수는, 땀 값으로 채워졌다. 집짓기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대부분 강원도 홍천의 생태건축 ‘흙손’에서 집을 지어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여기에 전문적으로 건축·인테리어분야에 종사하는 김학순 장로(예인교회, 52)의 진두지휘가 든든했다.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한 팀이고, 5일 안에 집을 지어야 한다.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단층집 위에, 2층으로 올릴 경량목구조주택을 짓는 일이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이 싸움의 끝을 보겠다는 상징적 의미도 있겠다. 이곳에 장기적으로, 안정적으로 머물면서 평화를 일구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겠다. 이미 몇 동의 컨테이너로 만든 집들이 주변에 들어서 있었다. 우리가 지어야 할 집도 며칠 후면 이 집들과 연대를 이룰 것이다. 나도 이 집짓기 팀에 합류했다. 아니, 숟가락을 얹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구름 한 점 없는 날,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렀다. 집짓기를 시작한 지 1시간도 안 되어 옷이 흠뻑 젖었다. 집짓기 경험이 없는 나는 철저하게 잉여인간이 되었다. 눈치를 보며 끼어들 틈을 노렸으나, 녹록지 않았다. 종종 읽곤 하던 시(詩)가 그날따라 나를 조롱했다.
… 집 안에 누워 소리만 들어도 알겠다 / 딱딱딱 소리는 못질 소리 / 철그렁 소리는 형틀 바라시 소리 / 2인치 대못머리는 두 번에 박아야 하고 / 3인치 대못머리는 네 번엔 박아야 / 답이 나오는 생활 //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 손으로 일하지 않는 너가 / 머릿속에 쌓고 있는 세상은 / 얼마나 허술한 것이냐고 / 한 뜸 한 뜸 손으로 쌓아가지 않은 / 어떤 높은 물질이 있느냐고 // 딱딱해진 내 머리를 / 땅땅땅 치는 소리 / 굳은 본질만 세워두고 / 거푸집 다시 허무는 소리 / 비가 오나 눈이 오나 / 제 몸 덜고 헐어 세상을 울리는 / 저 빈틈없는 노동의 소리
- 송경동, <목수일 하면서는 즐거웠다> 중 일부

땅! 땅! 땅! 소리가 ‘손으로 일하지 않는 너가 머릿속에 쌓고 있는 세상은 얼마나 허술한 것이었느냐’며 나를 조롱하는 듯했다. 이들의 ‘빈틈없는 노동의 소리’에 누를 끼칠까 나의 역할을 찾았다. 나사못을 쥐여주기, 판자 옮기기, 사다리 잡아주기 등 허드렛일로 일손을 보탰다. 평화를 뿌리내리게 하는 자리에, 허드레꾼이라도 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다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척척 진행했다. 자르고, 조이고, 세우고, 끼우고, 다양한 행동들이 겹치자 집의 골격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땡볕에서 하루 8시간 넘게 일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좋은 뜻만으로 견뎌내기엔 분명 고된 노동이었다. ‘포기할까?’ ‘괜히 왔다’ ‘난 누구, 여긴 어디?’ 하는 생각이 마음을 파고든다. 그런데 참 묘하다. 몸이 한계에 이르러 헤맬 때가, 이곳 강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김승권(30) 씨는 “평화고 뭐고 마음이 어려워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고생스러움이 강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해주는 듯하다. 8년간 이어온 평화운동, 때로는 땡볕에서, 때로는 빗속에서, 예배하고 투쟁하던 그 현장의 땀들과 서글픔, 고통과 눈물들의 의미가 전해졌다”고 말했다.

# 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진 게 아니다
셋째 날 오후, 집짓기팀에서 잠시 이탈해 첫날 만난 멧부리박 아저씨(박인천, 42)를 찾았다. 2012년 8월 강정생명평화대행진 이후 2년째 멧부리 천막에 살며 매일매일 공사 현장을 살피는 그다. 그의 삶을 통해 승리와 패배의 의미를 다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진 게 아니”라고 했던 그에게도 ‘평화고 뭐고 마음이 어려워지는’ 순간이 엄습할 것 아닌가. 강정천에 발을 담그고 아저씨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틀 전 “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진 게 아니다”라는 말에 꽂혀서 아저씨를 다시 찾아왔다. 인생 전반과 강정의 상황이 융합되어 나온 이야기라는 느낌이 왔다.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강정의 공사 현장을 누군가는 지켜봐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지켜봐야 한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으면 저들은 더 멋대로 공사를 진행할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보고 있으면 이 싸움은 끝난 게 아니다. 재작년에 한 번은 강정천 근처에서 텐트 하나 치고 혼자 지내고 있는데, 경찰이 오전 4시 30분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플래카드와 깃발을 다 제거하려고 출동했다.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다. 내가 그때 경찰들 소리를 듣고 우비를 입고 불쑥 나갔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경찰이 나와 마주치고는 깜짝 놀라더라. 그렇게 오전 8시 30분까지 약 4시간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대치했던 적이 있다. 나 한 사람이었는데…. 나처럼 보잘것없고 힘없는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이 싸움은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한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 싸움을 지속하기 위해,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건설 현장이 가장 잘 보이는 건물 옥상에 가서 사진 촬영을 한다. 유심히 봐야 할 곳은 쌍안경으로 본다. 공사 현장을 여러 각도로 보기 위해 들리는 거점들이 있다. 소나무 위에도 매일 오르내려 송진이 옷에 자주 묻는다. 하루 두세 번씩, 공사장을 감시하는 게 일이다. 자료를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종종 먼지가 많이 날리거나 소음이 심하다는 민원을 넣어 귀찮게 하기도 하고. 저들이 제일 번거로워하는 게 민원에 따른 관공서 직원들의 방문이다.
- 공사 현장은 어떻게 보나, 많은 문제점들이 정말 노출되고 있나?
공사과정은 아마 내가 저쪽 노동자들보다 잘 파악하고 있을 거다. 나는 큰 그림을 항상 보고 있으니까 공사 현장은 훤히 꿰고 있다. 가만 보면 설계도대로도 공사하지 않는다. 아니 못하고 있다. 애초에 여기는 해군 기지가 지어질 수 있는 지반이 아니었다. 육지 위 공사는 어떻게든 진행이 되겠지만, 해상 공사는 완성되기 어렵다고 본다. 전문가들도 말한다. 완성되어도 군함이 정박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군함을 둘 수 없는 해상 기지가 되는 거다.
- 이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되리라고 보나.
공사는 중단될 가능성이 크다. 언젠가 태풍이 오면, 케이슨이 또 파손될 것이다.(케이슨은 상자형태로 제작된 콘크리트 구조물로 토사나 사석으로 내부를 채워 교량의 기초, 방파제, 안벽 등의 본체용 구조물로 쓰인다.-편집자) 파도 때문이 아니라 밑에 기초 사석이 부실해서 그렇다. 사석은 계속 유실이 될 거고, 태풍이 오면 또 케이슨이 파손되고 원점이다. 태풍 너구리가 잠깐 빗겨갔을 때도 케이슨이 견디질 못했다. 태풍이 제대로 통과되면 여기는 주저앉는다. 약한 거 하나, 센 거 하나가 순서대로 오면 공사가 중단될 수 있다. 천재지변에 따른 피해는 계약상 공사비를 다시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두 번 반복되면 예산을 못 받는다. 안타까운 점은 공사를 맡은 대기업은 책임을 안 진다는 거다. 하청의 하청업체들이 책임도 진다. 사실 하청업체만 힘들다. 계속 반복되면 하청업체만 부도날 것이다. 공사는 중단되어도 삼성, 대림, 포스코가 부도나진 않겠지. 해상 공사는 완공이 죽어도 안 될 거라 예상한다. 저런 식으로 아무리 해봐야 자연을 이길 수 없다. 버틸 수 없다.
- 어떻게 강정까지 오게 되었나? 개인적인 이야기가 듣고 싶다.
나는 원래 용접공이었다. 2009년 12월 12일 토요일은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사다리에 올라 용접을 하다가 떨어져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산재 보험도 안 되는 상황이었고, 나를 고용했던 사람도 너무 무책임했다.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지금도 오래 못 걷는다. 병원비라도 받으려고 눈 쌓인 추운 겨울에 한발 한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으며 참 비참했다. 이후로 일도 못 얻고 밑바닥까지 추락해 살았다. 자세히는 말할 수 없고, 폐지 줍는 할머니들이 부러웠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았다. 노동부나 어디든 가봤는데 나를 보호해주거나 도와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때에서야 나의 억울함과 사회의 부조리가 만나 종합적인 이해가 되더라. 사람들이 왜 투쟁을 하는지 알겠더라. 나라 잘못이었다. 그러다 2012년 7월 평화대행진에 참여했고, 6개월간 공사장 정문에서 싸웠다. 그리고 2013년 2월 1일부터 천막치고 머물고 있다. 활동가 중에서는 거의 막내다.
- 온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더 객관적으로 볼 수도 있겠다. 요즘 강정의 분위기 어떤가?
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라서 잘 모른다. 지금 공사 현장이 다 펜스로 가려져 있지 않나. 물론 보려고 하면 볼 수 있지만 주민들이 잘 보지 않는다. 지금은 애써 무시하지만, 나중에 펜스가 걷어지면 큰 충격에 빠지지 않을까 싶다. 구럼비가 파괴된 후 여기는 아픔의 장소, 상처의 상징이 되었다. 주민들도 둘로 나뉘고, 이번에 6·4 지방선거 때는 유명 정치인의 강정 방문 여부를 놓고 활동가와 주민 사이의 마찰도 좀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 여럿이 여기 강정천에서 물놀이하고 그러는 것 보면 또 결국엔 하나가 될 거라는 희망을 본다.

-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우지만, 힘들어하는 젊은 청년들에게 한마디 해준다면?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말도 좋고.
적이 강해서 내가 지는 게 아니고 내가 약해서 진다.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했다면 그런 죽음은 뭐, 후회가 남지 않을 거라고 본다. 맥없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억울하게 혼자 죽지도 않았으면 한다. 사람들이 새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책임지는 게 싫어서다. 책임지기 싫어 행동을 안 하면 당연히 결과도 없다.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는, 내 인생 안에 이미 해답이 있다. 없는 사람을 위해서 같이 싸워주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것. 어려서부터 배운 것 아닌가. 나중에 후회가 남거나 부끄럽지 않게, 저 폭력적 자본가들에게 펀치 한 방만 먹이고 생을 마감해도 의미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쉬운 길을 가지 말고 어려운 길, 아무도 안 가는 길을 가라고 하고 싶다.
- 평화고 뭐고 다 내려놓고 싶은 때는 없나?
물론 있다. 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를 때가 있다. 다 내려놓고 마음 편하게 지낼 수도 있는데,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나와의 싸움이다. 긴장을 풀지 않기 위해 그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매일 승리를 경험하며 산다. 아직은, 그렇다.
아저씨는 자신과 노숙인의 차이를 구분 짓는 아슬아슬한 경계로 ‘평화를 위한 행동’을 꼽았다. 그 행동력은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서 얻어진다. 인터뷰 후 그는 공사 현장이 잘 보이는 지점으로 나를 인도했다. 강정천의 아름다운 자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리조트 건물의 옥상이었다. 이 리조트가 지어질 때도 강정 주민들에게 정기적으로 할인권을 준다며 찬성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지금은 주인이 이랜드 계열로 바뀌면서, 약속을 지켜야 할 주체가 사라졌다. 공사 현장을 한눈에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군사 시설을 지으며 평화를 약속했던 주체도 결국 전쟁이 나면 숨어 버릴 것이다. 그때, 저 멀리 펜스 위로 우리가 짓던 집의 지붕이 올라왔다. 크레인을 이용해 그동안 만들었던 집을 2층으로 올린 모양이다. 거대한 기지 건설을 막기엔 너무나도 작은 나무 지붕이었으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 쿨해지거나 게을러지기엔 아직 이르다
넷째 날, 집이 거의 완성됐다. 지붕 내부를 보온재로 채우고, 창문을 달았다(물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높은 곳이 무서운 나는 사다리를 흔들리지 않게 잡고 있었다. 물, 가위, 못 등을 지붕으로 전달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사람들 표정에서 서서히 성취감이 번지고 있었다. 3년째 평화순례에 참여한 박승(25) 씨는 “이 집이 하나님의 평화가 시작되는 곳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집짓기에 동참했다”고 밝혔다. “2층 창문에서 해군기지 방향을 바라보다가 펜스 위 감시카메라와 딱 눈이 마주쳤어요. 지붕 위에서 보니 펜스를 사이에 두고 편이 갈리는 상황이 마음 아팠고요. 평화는 이 시대의 악한 구조에 균열을 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 집이 악한 영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균열을 내는 시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강원도 홍천에서 생태건축으로 마을공동체의 집들을 손수 지었던 김동언 전 <복음과상황> 기자 등은 “재정과 시간의 부족으로 흙, 돌 등 자연친화적인 자재를 포기해야 했던 점”을 가장 크게 아쉬워했다. 초과한 비용도 추가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지난 1월 강정평화활동가대회 때 활동가들은 강정의 삼거리식당 주변(중덕삼거리)에 평화의 집을 짓기로 의견을 모으고 주택조합을 결성, ‘마가지협동조합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들이 임대와 관리 역할도 맡는다. 7월 초에 시작된 ‘평화의 집짓기’는 8월 중으로 마무리된다. 현재 일곱 채의 주택이 들어섰으며, 그중 이번 제주평화순례단이 만든 이층집이 단연 돋보인다. 완공 기념식에 참여한 평화정책자 신주민 씨는 “활동가들도 외롭다. 강정은 생명 평화 러브랜드이다. 여기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다. 지어준 집이 활동가들의 공간이 될 텐데 예쁘게 지어주어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편견인지는 몰라도 건축 일 하는 분들 말투가 거칠고 성격이 급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비숙련자인 우리(특히 나)를 지휘하면서 한 번도 짜증 내시지 않던데요?”
“내가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요. 기자님, 자매님이 못 하나 집어주더라도, 그렇게 집이 만들어지는 거죠. 공동체가 이뤄지는 것도 똑같지 않나요? 고집 센 전문가 열 사람보다 작은 손길들의 연합이 훨씬 낫습니다. 제 철칙이 ‘일 못하는 사람은 용서해도, 게으른 사람은 용서 안 한다’입니다. 우리 중 게으른 사람 한 명도 없었잖아요. 당연히 화낼 일도 없었죠.”
강정 해군기지 건설. 이미 진 게임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이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쿨해지거나 게을러지기엔 아직 이르다. 포기하지 않은 강정지킴이들, 평화활동가들, 그리고 70여 명의 순례단이 계속 경기를 이어간다. 행여 ‘패배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 5일 동안 내가 본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것을 기꺼이 감내해서라도 ‘평화’(샬롬)를 살아낼 사람들이었다. 평화를 위해 작은 못 하나 주울 의지가 있다면, 그이는 결코 잉여인간도 패배자도 아니다.
나도 멧부리박 아저씨처럼, 태풍을 기다린다.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