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호 사람과 상황] 빚 탕감 운동 펴는 제윤경 희망살림 이사·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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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범 | ||
“귀하의 부채가 탕감되었습니다. 이날 이후 어떠한 채권자나 신용정보사로부터도 위 채권에 대한 추심은 전면 금지될 것입니다.”
등록금 대출 상환에 쫓기는 대학생이, 대부업체의 불법적인 추심에 고통당하다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어느 가장이 이런 안내장을 받는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성경의 희년 정신을 바탕으로, 생계형 장기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시민운동을 함께 펼치는 이들이 있다. ‘빚 탕감 프로젝트’를 벌이는 제윤경 (사)희망살림 이사(43)와 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 소장(44).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은 다윗 앞의 골리앗보다 더 거대하고 어마무시하다.
한국은행이 지난 8월 26일 발표한 우리나라 올 2분기 가계부채는 1,040조 원으로 1년 3개월째 사상 최대치 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민간연구소에서 한국은행 통계치의 2배에 가까운 우리나라 ‘진짜 가계빚’을 발표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김완중 연구위원에 따르면, 전세보증금 450조원 및 자영업자의 부채 206조 원(이상 2013년 6월) 등을 합산한 ‘실질 가계부채’는 1,881조 원이다.(<이투데이> 2014년 9월 16일)
니체에 따르면, 도덕 개념 중 하나인 ‘죄’(Schuld)는 ‘부채’(Schulden)라는 물질적 개념에서 나왔다. 그러니 무려 2,000조 가까운 빚을 진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는 너나없이 ‘빚 진 죄인’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사회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는 《부채인간》에서 ‘신자유주의는 부채를 통해 개인의 도덕과 양심, 일상을 통제하며 부채가 개인의 자발적 선택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아울러 금융 권력들은 사람들을 ‘빚을 진 죄인’으로 세뇌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고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최근 ‘빚 탕감 운동’을 함께 벌여나가는 제윤경 이사와 남기업 소장을 연이어 만나, 우리나라의 부채 현실과 문제점, 빚 탕감 운동의 의의와 현황 등을 들었다.
사회적기업 ‘에듀머니’의 대표로 서민경제전문가, 가계재무전문가로 불리는 제윤경 이사는 베스트셀러 《아버지의 가계부》(2007)를 통해 재테크 광풍의 문제점을 제기한 바 있다. 추석연휴 뒤인 9월 11일, 그를 서울 연희동의 에듀머니 사무실에서 만났다.
― ‘가계부채 1000조 원 시대’라는데, 액수가 너무 커서 실감이 안 난다. 어느 정도로 심각한가?
우리나라 GDP(국내총생산)가 약 1,200조다. 그런데 가계빚이 1,000조니까, 1년 동안 전 국민이 벌어들이는 돈만큼이 고스란히 빚이라는 얘기다. 세금 등을 제하고 개인이 쓸 수 있는 ‘가처분소득’을 100이라고 할 때, 빚이 160%가 넘는게 우리 실상이다. 예를 들어, 연소득이 5천만 원이면 가처분소득이 3천 5백만 원 정도 된다. 이때 부채가 160%면, 빚이 5천만 원 넘게 있다는 거다. 평균으로 잡은게 이 정도다. 저소득층은 규모는 작지만 금리가 너무 높은 대출을 이용하기 때문에 한 달에 100만 원을 번다고 했을 때, 이자로만 50만 원이 나가는 상황이다. 원금을 갚을 길이 요원하다.
― 사태가 심상치 않게 들린다.
채무자들이 망가지고 있는 정도가 2003년 카드대란 때보다 훨씬 심각하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하다. 이건 마취상태다. 카드대란 때는 그래도 떠들썩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다들 점점 무감각해진다. 그때는 이 많은 신용불량자들이 생겨난 원인이 뭔지 이야기도 하고 규제도 마련하고 했는데, 그런 분위기가 2008년부터는 슬금슬금 없어지기 시작했다. 카드회사 입장에서는 금리는 낮은데 카드이자는 높게 책정할 수 있으니까 엄청 남는 장사를 할 수 있게 된 거다. 참여정부 때 마련해놓은 카드발급 기준과 규제가 2008~2009년부터 해이해지면서, 다시 길거리 모집이 시작되었다. 2010년이었나, 길을 가는데 붙들면서 카드 만들라고 하시더라. 이 정도까지 왔다. 정말 깜짝 놀랐다. 나라가 또 미쳤구나 싶었다.
― 최근 정부는 주택시장 활력 회복과 서민주거안정 강화라는 명목으로 ‘9.1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까?
우리나라에 주택을 두 채 이상 보유한 사람이 전체 국민의 7~8%밖에 안 된다. 이 사람들 돈 벌게 해주려고 부동산 가격을 떠받치려는 거다. 주택 한 채 가진 사람은 집값에 민감할 필요가 없다. 사실 떨어지는 게 차라리 유리하다. 그래야 이사 가고 싶을 때 팔고 갈 수도 있으니까. 93%에 해당하는 대다수 국민에게는 집값이 떨어지는 게 유리한데도, 7~8%의 다주택 보유자를 유리하게 해주는 대책이 ‘9.1 부동산 대책’이다. MB정부 때부터 계속 7~8%를 위해 집값 올리는 정책을 이어왔다. 물론 집값이 떨어지면 주택 한 채 가진 이들의 금융 리스크 때문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집값 대비 빚이 절반을 넘지 않게 하는 것이 참여정부 때 주택정책이었다. 이후로 이런 규제들이 다 풀렸다. 이런 규제가 계속 강력하게 작동했더라면 빚이 더 늘지는 않았을 거고, 집값이 떨어져도 금융대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런 리스크를 MB정부와 현 정부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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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듀머니와 (사)희망살림을 통해 저소득층을 위한 경제교육, 재무상담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2007년에 에듀머니를 법인으로 등록해 재무상담과 경제교육을 하기 시작했는데, 2008년에 고용노동부 인증 사회적기업이 되었다. 저소득층의 재무관리 상담과 교육을 진행하다보니까 제도적 환경에 막혀서 구제를 받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운동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사단법인 희망살림을 꾸렸다. 희망살림을 통해서 제도를 개선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 원래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았었나?
아니, 별 관심이 없었다. ‘세상이 이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우리 회사 운영하기도 녹록치 않고 가뜩이나 바쁜데…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문제의식은 갖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면, 고민하고 알아보는 편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알아가다보니 이 사회가 비상식적인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일들이 적지 않더라.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현실을 보게 되면서, 그들을 돕기 위해선 사회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서게 되었다.
― ‘빚 탕감 프로젝트’도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건가?
금융기관의 거래 현실을 알게 된 게 시작이었다. 우리는 보통 금융기관에 돈을 빌린 채무자가 되면, 은행이나 카드사에 돈을 갚는다고 알고 있지 않나. 그런데 채무자가 돈을 갚지 못하면 은행이 그 채권을 제2시장(저축은행·신용정보회사·대부업체)에 팔아넘긴다. 이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대부업체에 제값으로 팔지 않는 거였다. 3개월 연체된 1천만 원 채권이 대략 8% 선에서 거래된다. 대부업체가 은행으로부터 1천만 원 짜리 채권을 80만 원에 사들인 뒤, 정작 채무자에게는 1천만 원 이상의 돈을 뜯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거래 이후 대부업체 등은 추심(推尋, 돈을 받아내는 일)만 한다. 이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채무자를 괴롭히는 일이 발생한다. ‘빚 탕감 프로젝트’는 시민 모금을 통해 대부업체로 넘어간 채권을 우리가 사서 소각해주는 운동이다.
미국에서는 파산자의 채무 책임이 면제되는 파산 면책이 쉽다. 굳이 그런 프로젝트를 안 해도 되는데, 의료와 교육 채권이 면책이 안 되기 때문에 이것을 알리기 위해 시작된 게 롤링 쥬빌리 운동이다. 교육비와 병원비 때문에 빚을 지면 여러 채권단에게 쫓겨 다니게 되는데, 이런 제도를 바꾸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모든 채권이 면책이 안 된다. 빚을 지면 말 그대로 노예 신분이 되는 것이다. ‘빚 탕감 프로젝트’는 무엇보다 채무자를 구제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을 열어가는 공감대를 만들려고 시작한 일이다.
1차, 2차 프로젝트로 200명이 넘는 채무자들의 14억 6천여만 원의 채권을 매입해 파기했다. 3차 프로젝트에서는 채무자 50명의 빚 1억 9천여만 원을 탕감했다. 내일(9월 12일) 성남시와 함께 4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10년 이상 연체한 장기 채무자 171명의 채권 26억 원이 소각될 예정이다.
― ‘채무자의 어려운 처지를 공감한 대부 업체가 부실채권을 무료로 양도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가능했나?
일단 계기는 박원순 서울시장에게서 비롯되었다. 대부업체 관리와 단속 권한이 지자체에 있는데, 박 시장 당선 전까지는 아무도 이런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 어느 구청 담당자를 만났더니, 돈 빌린 채무자들은 다 도둑놈들이라며 채무자를 단속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도였다. 이 담당자는 결국 대부업체 간부로 이직했다. 대부업체가 구청에 등록신청을 하면 점검도 나가고 단속도 해야 하는데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박 시장이 당선된 이후 관리감독을 강력하게 추진한 것이다. 이를 위한 거버넌스를 구성해 2년 동안 굉장히 많은 회의와 교육, 회유를 했다. 그래도 끝내 점검에 참여하지 않아서 나중에는 압박을 가하기도 했는데, 지자체 담당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일이 많은 상태에서 또 일이 생기는 것이라 적극적일 수 없다고 하더라. 계속 교류하고 접촉하면서 작년에는 그분들과 제주도 워크숍도 같이 갔다. 그때는 굉장히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더라. 이분들이 서울시, 구청, 민간과 함께 다니며 현장점검도 하고, 채무자 구제 현황도 교육받으니까 의식도 바뀌고 자부심도 생기신 것 같았다.
처음엔 대부업체 담당 공무원이 20대 여성들이 많았다. 대부업체 중에는 주택에서 간판만 달고 영업하는 경우도 있고, 실제 조폭 같은 분이 직원인 경우도 있는데, 20대 여성이 어떻게 대부업체 감독을 하나. 그럼에도 공무원들이 성과를 내기 위해 움직이고 노력한 결과, 틀이 겨우 잡혀서 이제는 대부업체가 서울시나 구청의 관리 감독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공무원들과 같이 대부업체 점검을 다니면서 업체 관계자에게 ‘당신들도 못 받아낼 채무는 우리에게 기부하라’고 했다. 장기 연체자라면 어차피 지불 불가능한 채무자일 것이고 추심비만 더 들어가니까 우리에게 넘기라고 한 거다. 이런 식으로 10년 이상 장기 채무자의 채권을 무작위로 매입했다. 처음엔 황당해하던 사람들이 이야기를 자세히 듣더니 그냥 주겠다고 하더라.
― 빚 탕감 운동을 확산해나가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공감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캠페인을 하고 있다. 사회의식이 ‘갚을 능력도 안 되면서 왜 빌렸냐’가 아닌 ‘형편껏 갚아라’로 가야 한다. 아울러 채무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복지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채권-채무 관계에 있어 선진국에서는 채무자를 보호하고 채권자에게 책임을 묻는다. ‘신중하게 빌려줘라. 그렇지 않으면 돈 떼인다’는 게 그들의 기본 인식이다. 선진국에서 파산 면책이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는 법정 최고 이자율이 34.9%로, 선진국 이자율의 두 배에 달한다. 그럼에도 무책임한 대출을 남발한다. 쥐어짜서 추심할 수 있으니 카드 발급을 남발하고, 주택담보 대출을 남발한다. 미국은 채무자의 상환 능력을 벗어나는 대출을 ‘약탈적 대출’이라 하여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우리나라도 채권자의 책임의식을 더 강조하는 선진화된 의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 ‘약탈적 대출’이라는 용어가 참 적확(的確)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갚을 능력 이상의 돈을 대출해주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총칼을 주면서 장난감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돈이 급한 사람한테 돈 빌려주는 게 무엇이 잘못이냐고 대부업자들이 반론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빌리는 돈은 ‘급전’이 아니라 ‘생활비’다. 생활비를 대출받으면 갚을 수가 없다. 부족했던 생활비가 더 부족해진다. 생활비는 복지로 풀어야 한다. 금융회사, 언론, 사회가 생활비 문제를 금융으로 풀게 하니까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가 된 것이다. 금융의 문턱을 낮춰라? 아니다! 더 높여야 한다. 금융은 복지도 아니고 수혜도 아니다.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 일이다. 서민들한테 명품백을 파는 거랑 같다. 금융은 굉장히 비싼 사적 시장이다. 그러니 문턱을 더 높여야 한다.
― 빚 탕감에 대해 채무자들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우려하는 의견도 있다.
도덕적 해이는 오히려 금융사가 더 심각하다. 안 갚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돈이 많은 이들이다. 돈 없는 사람들은 도망갈 수도 없다. 갚을 수 없는데 막 쥐어주고, 그러고 나서 받아내려고 더 쥐어짜고. 이게 바로 도덕적 해이 아닌가.
― 정부에서 추진하는 ‘국민행복기금’도 채권을 싸게 사서 채무자의 빚을 삭감해주는 정책이다. 어떻게 평가하나?
국민행복기금의 목적이 채무자 중심의 회복과 새출발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채권 회수 프로그램’이 되고 있다. 채권단이 주주로 참여한 주식회사 형태로 시작된 게 큰 문제다. 신용회복프로그램 방식이 아니라 회수해서 돈이 남으면 주주로 참여한 금융기관들에게 나눠준다. 예를 들어 협약 체결자 평균 소득이 월 40만 원에 빚이 1천만 원(평균)일 경우, 50% 탕감한다고 쳐도 5만 원씩 10년에 걸쳐 갚아야 한다. 이것을 ‘국민행복기금’이라고 할 수 있나? 실제로 부실채권 인수를 담당하는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에서 1천만 원 채권을 저가에 매입한다(채권가의 약 3.4%에 매입하는데, 1천만 원 채권의 경우 34만 원에 매입한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해서 채무자에게 탕감해준 나머지 50%를 받으면 500만 원을 회수하는데, 결과적으로 매입가를 빼면 460여만 원이 남는 사업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남는 돈은 주주인 금융기관들에 나눠주는데, 어느 국회의원의 조사에 따르면 2018년 말까지 9천억 원의 수익이 그들에게 가게 된다고 한다. 현 정부가 저질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다. 민간기업의 이익을 위해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기업이 사업을 대신 해주고 민간기업은 나중에 배당만 받으면 된다. 이런게 저질이 아닌가.
― ‘가계부채가 중산층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희망살림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담보대출을 받은 10명 중 8명이 추가 대출을 받고 있다. 그중 38%가 생활비 목적으로 대출을 받았다. 다중채무자(금융 채무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중산층이 많았다. 즉, 소득 450만 원 이상 가구가 58%, 정규직이 60%였다. 가계부채가 점점 악성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소득이 많은 사람들도 60%인데, 저소득층은 고금리 대출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출이용자 10명 중 4명이 추심을 경험했다.
― 많은 청년들이 대학 때부터 학자금 대출을 받는다. 직장 다니면서 대출을 갚더라도 결혼하려면 또 대출을 받아야 한다. 결혼 뒤에는 이사철마다 오르는 전세를 감당하느라 또 대출을 받는다. 그야말로 대출 사회, 부채 인생이다.
계속 강조하지만, 돈을 빌려주는 게 문제다. 일자리를 주고 복지를 확대해야 하는데, 아편같이 마약같이 돈을 빌려준다. 우리나라는 사회적 재분배 기능이 마비된 사회다. 대기업들이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어들이면서 정작 고용도 안 하고 세금도 안 낸다. 그렇게 돈이 한 쪽으로 집중되고 있는데도 정부는 개입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 심지어 계속 대기업 손을 들어주고 있다. 여기서 국민들의 문제의식을 흐리는 게 금융이다. 금융은 국민들에게 ‘내가 못나고 돈이 없어서 돈을 빌려야 한다, 빚도 능력이다’라는 의식을 은연중에 심는다. 그 결과, 아무리 소득이 있어도 금융에 다 갖다 바친다. 국민을 모두 채무자로 만들어놓으니 사람들이 공포심 때문에 점점 체제 순응적으로 변한다.
― 심각한 상황이다. 돌파할 수 있을까?
심각하게 느껴야 하는데 만성이 되어서 큰 문제다. 제일 두려운 건 일본처럼 되는 거다. 한 번에 확 꺼지면 일거에 저항하면 되는데, 조금씩 말라죽는 상황이 되는 거다. 그러면서 나는 저 대열에 안 끼면 된다는 의식과 함께, 연체자와 상환자로 대열이 나뉜다. ‘성실 상환자’라는 단어도 금융회사가 만들어낸 프레임이다. 성실 상환자라는 단어는 연체자를 정죄하는 무서운 프레임이다. ‘불성실 상환자’도 있나? 갚고 싶지 않아서 안 갚는 불성실한 사람이 어디 있나? 못 갚는 거다. 사회공헌은 많이 안 하는 금융기업들이 홍보비는 엄청 쓴다.
금융기업에 대한 빚은 형편껏 갚는 것이다. 빚은 잘 갚아야 하는 게 아니고, 잘 빌려주고 잘 갚도록 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낸 이자만 해도 얼마인가? 기업이 빚질 때는 국민 세금으로 다 갚아주지 않았나. ‘빚은 무조건 갚아야 한다’는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능력이 안 되면 안 갚아도 된다는 거다. 우리 운동이 그런 취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채무자를 보호하고 채권자의 책임을 강화하도록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이다. 이대로 가다간 지난 번 ‘세모녀 사건’ 같은 일들이 더 벌어지게 된다. 게다가 그런 비극이 중산층으로 확대된다. 이런 문제를 방치해선 안 된다. 이제라도 금융 분야의 사회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고금리 장사를 하지 않도록 규제하는 제도도 필요하다. 서민들에게는 금융이 아닌, 복지와 일자리가 필요하다.
국내 최초로 헨리 조지 사상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성균관대)를 받은 남기업 소장은 ≪지공주의: 새로운 대안경제체제≫ ≪공정국가: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가모델≫ 등 다수의 책을 쓴 시민운동가이자 학자다. 토지정의를 기반으로 한 대안체제 연구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그를 9월 12일, 서울 창천동의 희년함께 사무실에서 만났다.
― (사)희망살림과 함께 빚 탕감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어떻게 공동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나?
지난 4월에 제윤경 대표 관련 기사를 봤다. 부채 탕감 관련한 기사였는데, ‘이건 완전히 희년 정신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서의 희년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제 대표에게 우리도 배워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연락을 했고, 공동으로 프로젝트까지 하게 되었다.
― 희년함께와 잘 어울리는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토지정의 문제를 중심으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현실적으로 먼 이야기인 경우가 많았다. 입법부터 해야 하니까 힘도 들었고. 토지정의의 실현은 아무래도 법 제도와 연결되어 있다보니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당장 희년을 실현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에 제윤경 대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제 대표를 만나고 나서야 채무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영화 <화차>나 <피에타>에서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저런 일이 어쩌다 한 번 있나보다 막연하게 생각했다.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들의 빚이 400~500만 원이라는 얘길 듣고 처음 들었던 생각이 ‘그걸 왜 안 갚아?’였다. 안 갚는 게 아니라 못 갚는 것이었는데, 내가 그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에 무지했던 거다. 그들은 매달 돈을 갚아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사회문제를 나름 고민하며 살아왔는데 실제 밑바닥에 있는 분들을 모르고 살아왔구나, 반성하는 기회였다.
―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느끼게 된 점이 있나?
금융 분야가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복잡하다. 용어도 생소하고 어렵다. 근본적으로 채무자에겐 지나치게 가혹한 제도들이 많아서 제도 개선으로 가야 한다. 빚 탕감 운동을 해나갈수록 금융경제학 공부한 사람들은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 숱한 성경적 재정관 강의에서는 왜 이런 금융 문제는 다루지 않았던 것일까? 왜 부채 문제를 안 건드렸을까? 의아했다.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기독인들의 시야도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지지 않겠나.
― 오늘(9월12일) 성남에서 4차 빚 탕감 프로젝트가 있다. 교계의 반응은 어떤가?
광교산울교회(이문식 목사)와 일산은혜교회(강경민 목사) 두 곳에서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담임목회자 두 분이 이 운동의 필요성에 굉장히 크게 공감하셨다. 광교산울교회에서는 부실채권 매입하려고 100만 원을 후원했다. 1천만 원의 채권을 5만 원에 사서 자유를 선물할 수 있는 거니까 얼마나 좋은가. 그외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는데, 여러 곳에 가서 강의도 하고 알리려 한다.
물론 모금을 통해 부실채권을 사서 빚을 탕감해주는 일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제도 개혁으로까지 나아가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를 위해 교회에서 희년 정신을 실천한 다양한 사례를 계속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5년 이상 된 성도간의 채권-채무 관계는 탕감해 준다든가 하는 방법이 있다. 성도 중에 전기세나 의료보험비 못내는 교인들이 있을 텐데, 이들을 구제해주는 사례들도 많이 생겨야 한다.
― 희년 정신의 실현을 위한 기독교 내부의 동력이 어느 정도라고 보나.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이 희년이라고 생각한다. 그 희년의 내용을 이 땅에 구현하려면, 다양한 실천과 연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하기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체 형성이 안 되어 있는 것 같다. 주체가 형성되어야 실천과 연합도 할 텐데… 고민이다. 내가 만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굉장히 비주체적이고, 심하게 말하면 노예근성에 젖어 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을 정해진 틀을 따라가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런 신앙생활에 익숙하다. 주체성이 너무 허약하니까, 교회도 비주체적이다. 스스로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더욱 폐쇄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빚 탕감 프로젝트와 같은 희년의 사례들을 더 많이 보여줘야 한다.

- 빚 탕감은 결국 구조의 피해자를 구제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 같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보라. 그 여인도 구조의 피해자다. 예수님은 30세까지 변두리 마을에 살면서 땅 없이 사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아왔다. 딸을 팔아야 하는 상황들도 비일비재하게 보았을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야 마땅하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당신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더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신용불량자의 책임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더 큰 책임이 불의한 제도에 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바라보시던 눈빛으로 우리가 채무자들을 바라봐야 한다. 최소한의 자기 존엄도 지킬 수 없게 현장으로 끌려온 간음한 여인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다. 그에게 “이게 다 네 잘못이다” 할 것인가? 예수님은 그를 향해 돌을 던지려던 이들을 모두 물리치셨다.
- 희년함께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나? 지난 사역을 개인적으로 어떻게 정리하고 계신지 궁금하다.
2005년부터 일했으니까, 올해로 딱 10년째다. 시작 당시에도 어려운 문제는 많았지만, 그때는 그래도 부동산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려는 때였다. 유동성이 풍부해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았지만, 보유세 강화를 천명하고 입법화에 성공한 유일한 정부였다. 물론 우리가 말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말이다. 우호적인 여건 속에서 희망을 봤었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우리가 나서면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언론 기고, 방송 토론 등을 통해 빈번하게 우리의 사상을 마음껏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MB정부가 들어선 이후, 부동산이 침체이기도 했으나 우리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먹히지 않았다. 암흑기였다. 쉽지 않구나,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 어쩌다가 여기에 와 있을까. 지루한 일상을 무한 반복해야 하는 생활도 힘에 겨웠다. 많은 기독시민운동 단체가 지난 MB정부와 현 정부에서 비슷한 괴로움을 겪고 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참여정부에서 우리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부가 우리를 초대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스스로 어젠다를 만든 것은 아니었구나,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지나치게 행정적인 접근만 하고, 너무 입법에만 힘을 쏟은 게 아닌가 하는 고민도 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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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년함께 제공 | ||
― 힘든 적은 없었나?
자괴감이 들 때도 있다. 내 역량이 너무 많이 딸리는 것 같고, 담력도 없는 것 같다. 희년이라고 하는 이 귀한 일을 뭉개고 있는 건 아닌가? 부르심이 맞나? 월급이나 돈 걱정 보다는 그런 괴로움이 크다. 나같이 아둔한 사람이 이 자리에 어울리나. 더 똑똑한 사람이 오면 좋을 텐데…, 다재다능한 사람이 오면 좋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들 때 가장 힘들다.
― 그럼에도 계속할 생각인가?
고민을 한들 뭐 어떡하나. 계속하는 수밖에.(웃음) 원래가 하던 일을 계속하는 스타일이다. 이것으로 아주 승부를 걸고 싶다. 그리고 적어도 20년 이상은 해야 기특한 소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년에 깊이 뿌리 내리고 싶다. 누구나 맑은 양심을 가진 사람이면 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고, 사회개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힘들 때가 많이 있었으나, 돌아보면 감사한 일이 많다. 가장 감사한 것은 좋은 동료들과 함께 일한다는 거다. 학문공동체이자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한다. 배울 게 너무 많은 친구들이다.
1984년에 헨리조지협회부터 계산하면 올해가 희년함께 설립 30주년이다. 부채탕감 프로젝트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과거의 사역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까 고민도 한다. 그동안 열심히 하기는 했는데, 잔존하는 세력으로 자족하면서 지내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지난 2월부터 활발하게 토론하고 있다.
― “세월호 유가족들이 바라는 특별법이 제정되어, 참사의 진실이 밝혀져야 합니다!”라는 문구와, 특별법의 핵심 내용을 쓴 걸개를 걸고 출퇴근하는 걸로 알고 있다.
인터넷이나 SNS를 잘 하지 않는 분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방법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다가 시작했다. 그렇게 안 하면 내가 너무 괴롭더라. 꾸짖는 사람은 많이 없다. 연배가 좀 있는 분들은 사실이냐고 따지기도 하는데 ‘관련 법안’ 전문 다 읽어봤느냐고 여쭤 보니 아무 말도 못하시더라. 그런 분들이 (설득되지는 않더라도) 약간의 충격만 받아도 성과라고 본다.
― 우리나라가 점점 ‘반(反)희년적 사회’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불의한 정부 때문에 국민들이 갈기갈기 찢기고 있구나, 마음이 너무 무겁고 화가 난다. 이렇게 불의한 정부가 있을 수 있나. 정권 자체의 정당성 문제도 있고, 더 나아가서 사회경제적인 기준으로 들여다봐도 참 심각하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가다가는 세월호처럼 가라앉을 것 같아 불안하다. 경제적인 상황 안 좋아지고, 자살하는 사람 늘어나고, 국민들은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다. 심리적인 내전 상태 같다. 이번 추석 때 고향에 가서 삼촌들하고도 크게 싸웠다. 거의 내전이었다. 피하고 싶었으나, 유가족들을 모욕하는 발언은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만 아니라 많은 집들이 그랬을 거다. 어떻게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더라.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만 나왔다.
― 지금 대한민국 현실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내 주변 분들 중에는 허위 사실을 담은 카톡 문자에 휘둘려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해 핏대를 세우더라. 우리 사회 현실을 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희년이 이빨도 안 들어갈 사회라는 판단이 서자 절망적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희망을 만들어야겠다, 더 나아가 나 자신이 희망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좀 극복이 되었다. 그래서 걸개도 걸고 다니게 되었고, 희년함께 활동도 더 부지런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누가 해주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할 수 있을 때 나부터 부지런히 뭔가 해야 할 것 같다.
진행_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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