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호 사람과 상황] 1991년생 청춘들의 자전적 이야기

▲ ⓒ복음과상황 이범진

복음과상황 창간 25주년을 맞은 올해의 첫 인터뷰 주인공들은 ‘91년생들’이다. 100세 시대의 1분기이자 인생의 사계로는 봄의 끝자락에 다다른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 시대를, 또한 그들만의 계절을 지나고 있을지 궁금했다. 눈이 장대비로 변한 한겨울의 늦은 저녁, 박예은·서동규· 윤민구(비를 쫄딱 맞고 등장했다)씨를 복상 사무실에서 만났다.

‘청년실신’(청년실업자이면서 신용불량자) ‘장미족’(장기미취업족) ‘삼일절’(31세까지 취업 못하면 길이 끊김) ‘페이스펙’(얼굴도 스펙) 등 언론에서 떠드는 청년 관련 신조어들을 이들은 정작 처음 듣는다고 했다. 80년대 학번이 민주화로 대동단결하던 것처럼 원대한 공동 목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혼자 살고 보겠다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입장도 아니었다. 삶 자체가 위협받는 부모님의 생존 조건 속에서, 선택할 자유를 자주 빼앗기고 생각할 시간을 줄곧 도둑질 당하며 살아온 듯 보였으나, 자신의 상황 속에서 다음 단계의 삶을 고민하면서 좋은 어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같았다. 말하기 전 꽤나 뜸을 들이는 진지함(?)도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너덜너덜한 한국교회의 환경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고군분투해온 복상의 연수와 처지를 닮은, 20대 복상 독자들의 ‘평범한’ 삶 이야기다. 2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그들의 고백적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풀었다. 20대가 자주 쓰는 20대스러운 표현은 그대로 두었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말을 배우듯 삶을 배우는 중”
- 박예은, 사회복지사 1년 계약직

저는 현재 수원의 지역아동센터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어요. 육아 휴직중인 분 대타로, 1년 계약직이에요. 일한 지 3개월짼데 이제 적응하면서 다니고 있죠. 사실 취직이 되었는데도 고민은 변함이 없네요. 안정된 생활을 기대했는데 계약기간 만료되면 또 다시 취업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연장될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 벌써 걱정이에요.

‘난 왜 잘하는 게 없을까’… 스스로 초라해지던 시간들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신학 전공했고, 휴학없이 스트레이트로 졸업했어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는 게 재밌었고 예배드리는 것도 좋아서 자연스럽게 신학대학까지 가겠다고 생각해왔거든요. 부모님이나 교회에서도 다들 그렇게 생각했고요. 그런데 고3 때는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생겼었어요. 엄마가 교회 카페 봉사를 맡고 계실 때 저도 배워서 토요일마다 바리스타 일을 한 게 재밌어서 직업으로 하고 싶어졌거든요.

그런데 진로 고민을 별로 깊게 못했던 데다, 입시 때가 되니까 주변에서도 제가 신학교 가는 걸 당연시하는 분위기여서 신학교로 지원했죠. 막상 합격 소식을 받은 후에는 행복하기보다는 허무하더라고요. 너무 허무해서 울었던 기억도 나요. 입학 후에는 더욱 막막했고요. 사실 대학 입학이 목표였지, 그 이후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대학 들어간 걸로 영화처럼 끝나는 게 아닌데, 목표에 도달하고 나니 벙쪘어요(멍하고 황당했어요). 이전까지는 주어진 시간표대로,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부모님 말씀대로 잘 따라하면 됐는데 대학생이 되고 나니까 시간표 하나 짜는 것도 다 내가 정해야 했죠. 무엇이 정답인지도 모르겠는데 선택할 것 투성이라서 두렵고 불안했어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걸 선택하면 되는 건데, 이전엔 그런 걸 고민해보지 않았고 그럴 시간도 없었거든요. 결국 ‘나는 왜 좋아하는 것도 없고 잘 하는 것도 없을까’ 하는 자책으로 이어지고, 내 자신이 초라하고 쓸모없어 보였어요. 남들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에서 고민하는 것 같은…, 그런데도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무기력하고요. 그러니 학교 다니는 것도 재미없어서 쉬지 않고 빨리 졸업하고 싶었죠.

스무 살 이후로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방황이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도 학부시절 내내 선교단체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삶 이야기도 들으면서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했고요. 저를 존재 자체로 받아주는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조금씩 알고 스스로를 사랑할 수도 있게 되었어요. 오랫동안 무시했던 내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니까 내가 무엇을 잘 하고 좋아하는지 조금씩 알아졌고요.

진로 수정, 알바의 시간들, 문자로 당한 해고
재작년에 교회 사역을 그만두고 사회복지 쪽으로 진로를 틀었어요. 쉽지 않았죠. 신학과를 가고 목회하는 걸 부모님, 특히 아빠가 좋아하셨는데 많이 실망하셨죠. 지금도 박봉이지만, 교회 급여는 지금보다 더 적었어도 별 말씀 없으셨거든요. 그리고 사역 그만두는 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제 안에서 확신이 더 필요했던 것 같아요.

어린이 사역 하면서 내 언어로 하나님 말씀을 풀어 전달하는 게 재미있었지만, 주일예배 참석하는 애들 중에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주1회 만남으로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더라고요. 대학 때 제가 속한 선교단체의 모토가 ‘세상 속의 하나님나라운동’이었는데, 그 고민을 하다가 주일 하루만이 아니라 아이들을 매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사회복지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죠. 기도도 하고, 책도 찾아서 보고, 신뢰할 만한 분들을 만나 상담도 하면서, 그때마다 진로에 관해 드는 생각들은 개인적으로 기록해놓았어요.

결정 후에는 경제적으로 힘들었어요. 대학 1학년 때부터 교회에서 간사로 일하면서부터 부모님께 용돈을 타지 않았고, 졸업 후에도 일을 했는데 그만 둔 작년(2013)부터는 급여가 없었으니까요. 그때 한 아르바이트들이 와플이나 타코야키 판매점, 대형마트에서 한우세트나 꿀 파는 거, 축구장에서 막대풍선 불어서 나눠주고 회수하는 일, 그리고 카페 알바 등. 카페 알바를 가장 많이 했는데, 나쁜 사장님들 만나서 여러 번 잘렸죠. 정말 힘들었어요.

어떤 사장님은 교회 집사라면서 교회 다니는 친구 만나서 반갑다고 하시더니, 가게 매출 떨어지니까 알바생 탓을 하면서 화풀이를 하고는 한 달 만에 잘랐어요. 문자로 통보해왔죠. 급여도 다 못 받았어요. 근로계약서를 안 써서 받아내기 어렵다더라고요. 다른 알바생한테는 같이 술 마시자, 영화 보러가자 하거나, 오늘 왜 이렇게 섹시하냐는 말까지 했대요. 50대 아저씨가요. 또 다른 사장님은 하루 매출이 꽤 높은 편인데도 손님이 없으면 알바생들을 퇴근시켜버렸어요. 학교 안에 있는 카페였는데 방학하고 손님이 없으니 역시 문자로 그만 나오라고 통보했고요.

말을 배우듯 삶을 배우는 중
지금 사회복지사 일을 하면서는요, 어떻게 이런 상황들이 있는지 매일 놀라면서 살아요. 갖가지 어려운 형편에 있는 아이들 집을 찾아가 보면 마음이 아프고 답답해요. 아이들 구해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부모님들도 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슬퍼요. 특히나 하루종일 바쁘게 살아도 가난에서 못벗어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답답해요. 청년 문제를 포함해서 사회문제들에 대한 책들 보면, 어떤 면에서는 저자들이 다들 주류니까 그런 책을 쓸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공감해준다고는 하지만…, 글쎄요, 그들만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사실 오늘 인터뷰하러 오면서 제가 무슨 업적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걱정했어요. 막상 와서 처음 보는 분들과 사는 얘기도 하고 생각도 나눌 수 있어서 좋네요. 제가 산 24년의 삶도 보이고요. 그동안 말하는 걸 배우듯 사는 걸 배워온 것 같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요. 여러 시기들을 넘어오면서 내가 해온 것에 대한 회의도 있고,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도 보냈지만, 나름 잘 해오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시간들을 통해서 지금의 내가 있잖아요.

저는 앞으로 솔직한 어른이 되고 싶어요. 체면 차리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잘 웃고 잘 우는 사람이고 싶고, 제 시간과 물질을 나눔에 있어서도 인색하지 않고 싶고, 나이 많다고 어른인 척, 다 이해하는 척하지 않는, 공감의 바탕 위에서 지지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어요.

▲ ⓒ복음과상황 이범진

“누구나 견디며 사는 거 아닌가”
- 윤민구, 대학 1학년 재학중

당구장 PC방에서 살았어도, 대학은 ‘가보고’ 싶었다
저는 고등학교 때는 공부와는 담 쌓고 지냈어요. 당구장이랑 PC방에서 하루를 보내는 게 일이었죠. 군대 제대하고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뒤늦게 대학에 입학해서 즐겁게 다니고 있어요. 시험 보는 것도 재밌고요. 아, 지금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해요.

제대 후 갑자기 대학 가려고 재수학원 다니겠다고 말씀드리니까, 엄마 반대가 심했어요. 돈을 벌지 갑자기 웬 공부를 시작하냐고요. 저는 대학이란 곳을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아예 시도조차 해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죠.

우리집이 삼남매인데 아버지가 암에 걸려 요양원으로 가신 지 8년 정도 되고, 엄마는 식당 일용직으로 고2 동생 뒷바라지 하시거든요. 누나는 독립해서 따로 살고 있고요. 저는, 제 앞길은 제가 해결해야 하는 형편이죠 뭐.

사정이 이런데도 마음먹은 걸 포기하고 나면 나중에도 못할 가능성이 크고, 또 후회할 것 같아서 엄마를 설득했어요. 그 일로 지금도 욕먹긴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니까 더 열심히 하라고 엄마도 그러셔요. 정 필요할 때는 돈도 꿔주시고, 지지해주셔요. 속은 잘 모르겠지만 따뜻하신 분이에요.

학교 등록금은 국가장학금을 타서 학기에 30~40만 원 정도 내는데, 이번엔 아예 안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생활비는 방학 때 알바 해서 벌어놓은 돈으로 써요. 이번엔 어려워서 생활비 대출을 한 번 받았고요. 택배, 막노동, 청소 등 이것저것 많이 했죠.

사람 자체를 보는, 신학대학의 비기독교인 친구들
신학대학이어도 일반 학과라서 과에 비기독교인 친구들이 많아요. 저랑 친한 친구들도 교회 안 다니는 아이들이고요. 입학 땐 ‘내가 이 친구들을 잘 보살펴서 하나님을 알려야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개뿔! 그 친구들 하나님만 모를 뿐이지 정말 멋있는 녀석들이에요. 계산적일 거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사람에 대해서 더 예의바르고, 어떤 면에서는 더 진지해요. 오히려 너무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봤던 저를 뉘우치고 많이 배워요. 저는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먼저 봤는데, 이 친구들은 그냥 ‘사람’에 집중하거든요. 저도 기독교인이냐를 떠나서 사람 자체를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걸 반성했어요.

담배도 교칙 때문에 학교에서 안 피고 밖에서 피면서도 죄인마냥 몰래 피는데, 어떤 학생들은 그런 거 보면 손가락질 하고 뭐라 그래요. 그럴 땐 마음이 정말 아프죠. 오히려 신학대학 다니다가 기독교인들에게 실망할 때가 많아요. 대학원생들이랑 같이 축구한 적이 있는데, 전도사인지 목사인지 모르겠지만 나이 포함해서 서열(?)이 낮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깔보고 함부로 하는 것 같은, 군대문화 같은 그런 행실을 하더라고요.

기독교인 아닌 사람과의 차이를 느끼는 지점은 일종의 문화 차이라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인데, 예를 들면 자유로운 성관계 같은 거죠. 그런데 오히려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교회 친구한테서 경찰이 되면 무조건 뇌물을 받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정말 충격적이고 씁쓸했어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사회 돌아가는 것과 무관하게 나만 잘살면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땐 뭔가….

힘든 삶의 현실, 그래도 꿈이 있다
우리 살아가는 현실이 힘들잖아요. 원래 힘든 거니까 그냥 견뎌라는 얘기도 있고, 그래도 힘들면 힘들다고 표현하라는 쪽도 있죠. 어차피 이 시대는 우리가 견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알고 있어요. 아마 제가 졸업하고 사회복지사가 된다 해도 삶이 어려울 거예요.

제가 원래 청소년들에 관심이 많아서 이 과를 택했는데, 공부를 할수록 매력을 느껴요. 어찌되었든 무언가를 바꿀 수 없더라도 사람들을 만나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점이 복된 것 같고요. 이 일이 무슨 전문성이 있느냐는 질문들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더 전문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한편으로는 정말 필요한 직종인가 하는 의문도 들고요.

꿈같은 이야기지만 나중엔 복지국가라 불리는 스웨덴이나, 독일로 유학 가서 사회민주주의를 공부하고 싶어요. 그런 뒤에는 약자들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을 하고 싶고요.

지금까지의 제 삶을 돌아보면 많은 날을 ‘착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살아온 것 같아요. 어릴 때 제가 사고를 많이 치고, 누나도 사춘기를 워낙 화끈하게 보낸 편이라 부모님이 때마다 사죄하는 모습을 많이 봤거든요. 그래서 중고등학생 때는 부모님 힘들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찰 없이 살려고 노력했어요. 무슨 상황에서도 제가 참는 편이 더 편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오히려 이게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주고, 특히나 가까운 사이에서 솔직하지 못한 게 오히려 나와 상대에게 상처가 된다는 걸 안 후로는 솔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결정적으로는, 제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고백한 것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계기여서 더 솔직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저는 좋은 어른들을 많이 만났어요. 오래 다닌 교회에서 훌륭하신 분들, 그러니까 자기 것 아까워하지 않고 조건 없이 나누신다던지 하는 어른들을 많이 만나서 그런지 그런 분들을 닮고 싶죠. 무엇보다도 청년 교사들과 늘 소통하려고 노력하시고 귀 기울여 들어주시는 모습도 인상 깊게 남아 있어요. 저도 제 가치관에 굳어져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고 열린 소통을 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 ⓒ복음과상황 이범진

“이끌려온 삶, 끌려가진 않겠다”

- 서동규, 대학 4학년 재학중

부모님께 설득당해 선택한 전공
지금 저는 고려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군대 제대해서 올해(2013) 복학했고요. 내일이면 학기말 시험이 끝나는데 방학하면 영어공부 하고, 토목기사 자격증을 준비할까 생각해요. 그리고 아는 목사님이 하시는 개척 교회 준비를 도와드리려 해요. 초등학교 때부터 다니던 교회에서 나온 지 3개월 정도 됐는데, 선교단체 안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아는 목사님이 10명 정도 모이는 개척교회 준비모임을 하고 있어서 저도 도우려고요.

그러다보면 방학이 훌쩍 갈 것 같은데, 틈틈이 놀기도 해야죠. 여름방학 때 기차여행을 계획했다가 태풍 때문에 접었는데, 꼭 다녀오고 싶네요. 저는 늘 노는 듯 안 노는 듯, 공부하는 듯 안 하는 듯 지내왔어요.

대학 갈 때 공대로 진학한 건 부모님 영향이 컸어요. 원래는 고3 들어서면서 신학교에 가려는 생각이 있었는데 부모님이 일반대학 졸업 후에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설득하시더라고요. 알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평소 지구과학을 좋아해서 기상학과에 가야지 했는데 부모님이 또 설득하시더라고요. 제가 확신이 없었던 이유도 있겠죠. 어쨌든 아버지가 ‘남자는 스케일 큰 거 해야 한다’면서, 사실 스케일은 신학이 훨씬 큰데 말이에요, 큭.

학비는 대체로 한두 학기 빼고는 성적 장학금을 받아왔어요. 알바로 예전에 과외를 했는데 지금은 안 해요. 현재 부모님이랑 떨어져서 대학 선교단체 사람들과 공동 자취를 하고 있는데, 집 나와서 사는 게 대학 가고 가장 좋았던 점이에요. 연애는 몰래 했고, 학원이든 학교든 진로든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많이 의식해야 했고, 또 개입을 많이 하신 편이었죠. 그런데 집 나와서 사니까 훨씬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요.

소통 안 되는 교회, 걱정 된다
요즘 아무래도 교회를 떠나 있는 상황이어서 새로운 교회에 대한 고민이 있어요. 다닌 지 10년 넘게 다니던 교회였는데, 제가 읽은 책을 통해 품게 된 고민을 풀어낼 수 없었고, 속으로 쭉 앓고 있었어요. 대학교 선교단체에서 배운 것들을 교회 안에서 소통할 수도 없었고,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졌죠.

특히나 지난 여름 문창극 사태가 났을 때는 가관이었어요. 문창극 후보자가 잘못된 것이 없다는 설교가 나오더니, 요즘 청년들이 공산당 어쩌구저쩌구… 까지 하시는데 정말 괴롭더라고요. 그런데도 청년부 교역자들도 전혀 아무런 피드백이 없고. 그 다음주엔 한 술 더 떠서 각종 비리로 문제가 많은 길자연 목사님이 초대되어 말씀을 전하시더라고요.

너무 힘들어서 주일예배를 안 나가고 청년 셀모임만 나가다 그것도 그만 나가게 됐는데, 내가 없으니 “동규 오빠는 도대체 교회에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라고들 했대요. 청년부 안에서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가 없다는 게 가장 슬펐죠. 제가 중고등부 시절부터 계속 담당교역자였던 목사님도 지난 9월부터 교회에 안 나오는 제게 연락 한 번 없으셨죠. 내가 없어서 오히려 속이 편하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교회 문제는 사실 군대 있을 때도 심하게 느꼈어요. 한 번은 신병훈련소 교회에서 세례식이 있었는데, 그때 세례를 받은 동기들에게 물어보니 세례를 ‘당한’ 거더라고요. 집사님들이 와서 꼭 받으라 강요를 하더래요. 개인 면담 비슷한 시간이 있었는데, ‘일단 받으라’는 식이었다고 하고요. 자대 배치 후에 나간 교회도 마찬가지였어요. 예배 후엔 두 테이블로 나누어 간식을 먹는데, 한 쪽엔 목사님과 계급 높은 병사들이 앉아서 웃고 떠들고, 다른 쪽에는 계급이 낮은 병사들이 조용히 간식만 먹었죠. 자연스러운 풍경이더라고요 그게. 약자에겐 그런 ‘자연스러운’ 풍경도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로에는 답이 없는데, 아프니까 청춘이다?
청년 문제에 접근하는 어른들의 방식을 봐도 그래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요? 원래 그러니까 닥치고 그냥 있으라고요? 그런 식의 말들에서 정말 환멸을 느껴요. 대학교 2학년 때 지도교수님이 저자도 아니면서 책에 당신 사인을 해서 선물로 주셨는데 기분 나빠서 안 읽었어요. 어떤 친구는 “자기들도 힘들었다고 말하지만, 산업 발전 시기에 단물 쪽쪽 빨아 먹고 뭐가 힘들었다고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더라고요. 누구는 짱돌을 던지라고 하고, 누구는 원래 그런 거니까 잘 노력하라고 하고…. 결국은 왜 우리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어요. 실제로 우리 안에 그 논리가 작동하고 있고, 극복해야 할 문제인 것도 맞아요. 그런데, 우리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요즘 문제가 심각하잖아요. 상대적으로 이공계는 덜하지만 문과 비(非)상경계는 답이 없다고들 하더라고요. 경영·경제·통계 쪽 빼고는 문과 진로에 답이 없다는 의미에요. ‘인구론’이라고 불리기도 하고요. ‘인문계 90%는 논다’고…. 우리 과도 제가 1학년 1학기 때 평점 평균이 2점대였는데 지금은 3점대인 걸로 보면 확실히 달라진 걸 느껴요.

지난 24년 제 삶을 평가해보면 끌려 왔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내 생각은 없었으니까…. 지금도 살다 보면 ‘학점 잘 따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학점에 목을 매진 않지만, 그렇다고 의연하지도 못한 것 같고. 앞으로 어떻게 살진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복음이 앞으론 몸에 밴 사람이 되어 있고 싶어요. <복음과상황>을 보면 여전히 불편해하되, 결코 불쾌해하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고요.

▲ ⓒ복음과상황 이범진

인터뷰를 마무리 지을 무렵, 부끄러워하면서도 사진 촬영에 열심히 응해주는 그들에게 물었다. 교회든 사회든 자신들에 대한 언어를 계속 만들어 내는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그랬더니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민구 씨가 발랄하게 말한다. 예은 씨는 그래도 계속 이야기를 해달란다.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라도 때가 돼서 깨달아지는 말들이 있더라”면서. “동등한 관계로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던 동규 씨는 “아무튼 단절되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을 보내며 손 흔들어 인사하는데, 뜬금 없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25년 뒤 복상 창간 50주년이 될 때, 쉰 살이 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떨까.

진행 _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