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호 무브먼트 투게더]

70년은 마법의 숫자?
2015년은 분단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여기저기서 ‘분단 70년’을 언급합니다. 혹시 강력한 적과 맞서서 70년을 버티고 있는 우리가 북쪽보다 잘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면 교회 밖에는 그런 자랑이 있을지 모르나, 복음 안에서는 없을 것입니다. 오직 순종만이 능력이고 평화 만들기 외에 주의 명령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끔찍한 전쟁 이전, 38선에 의한 분단 직후부터 통일운동이 시작되었으므로 ‘분단 70년’은 ‘통일 노력 70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왜 통일 노력은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가?”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분단에 관해서는 우리의 익숙한 감정, 지식, 해법에 결함이 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두 갈래·세 분야의 지식
현재 우리에게는 북한, 남북 관계, 해결방안에 관한 세 분야의 지식이 절실합니다. 지식의 두 갈래는 몰랐던 것을 알아내는 것이 하나요, 해결을 위한 절차를 고안하고 구성해 내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문제의 당사자인 우리가 이러한 지식에 취약한 이유는 ‘적대관계’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분단의 한 축인 북한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적개심이 바탕에 있고, 반민주적인 정권들의 지나친 기밀주의는 학술적 연구조차 제한했습니다. 북한에 관한 과학적 접근은 1987년 즈음의 민주화 이후에야 시작됐고 학자들 사이에서는 진전이 있었지만, 대중들에게는 아직도 구름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분단 상태에서 이득을 취하는 세력들, 평화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어 온 북측 당국자들도 지성의 진전을 더디게 했습니다.

지성의 여정을 출발조차 못 하게 하는 방해물이 있다면 뿌리 깊은 패배주의와 회의적 태도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회의론을 목사님들을 포함한 신자들에게서 듣습니다. 대체 어디서 왔을까 궁금해하던 중 언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 한반도 전문가의 논조를 자세히 살핀 적이 있습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북한은 어제도 안 변했고, 오늘도 안 변하고 있으므로 미래에도 안 변할 것이다’입니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이는 소련, 중국을 포함한 사회주의권의 변화와 최근 공산국가 쿠바와 관계를 개선하는 미국의 변화도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허약한 주장입니다. 

그는 ‘설명’을 넘어 ‘예측’을 하고 있는데, 정치·사회 분야에서 ‘예측’이란 정책들을 세우는 ‘전제’로 쓰입니다. ‘변화하지 않는 북한’을 전제하면 ‘압박’이나 ‘봉쇄’라는 정책을 이끌어오게 되고, 그것들은 최초의 예측대로 북한의 변화를 어렵게 합니다. 결국 그의 ‘예측’은 주관적 ‘바람’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람’을 넘어 어디에서 어떤 논리가 등장하든지 그것이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입장인가를 따지고, 우리의 바람을 다음 목표로 정하는 기획자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문제는 ‘정치’다
땅의 시민권자들이 지적 자기주도성을 확보하면 평화를 위한 정책을 감별할 수 있고, 그것은 곧 정치인에 대한 감별을 의미합니다. 남북문제는 비정치적인 영역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해서는 현실 정치를 벗어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제 소견에는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가 진정 사심 없이 문제 해결만을 목표로 달려든다면 대북정책에 관해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봅니다. 

지긋지긋한 ‘색깔론’이 선거와 정파적 위기 국면에서만 활성화되는 것은 철저히 계산된 조직행동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그 세력은 통상적으로 꼭 필요한 남북 간의 접촉조차 죄악시하기에 열을 올리는데,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파의 행동은 눈감아줍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나오는 말이 “그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가 남북 관계 진전의 적기다”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상대인 북한과의 관계에서 열매를 보는 추진력과 인내심은 정파 이기주의에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봉쇄, 교류 축소나 단절, 현상유지 등의 정책을 선택하는 근거 중 하나는 ‘북한 붕괴론’입니다. 20년 전부터 발견되는 붕괴론은, 최근에도 '통일준비위원회'가 붕괴 이후를 준비하는 연구를 하고있음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붕괴하면 우리 땅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1948년 유엔은 총회 결의문 <195 (III)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면서 그 관할권을 ‘자유선거가 치러진 지역’ 즉 38선 이남으로 확인하였고, 이는 1950년과 1960년 초에 재확인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중국군 참전 직전에 연합군에 의한 한반도 전체 점령이 예견되는 시점에 이승만 정부는 점령 지역을 통치할 행정관을 보내려 하였으나 유엔은 앞의 결의문에 의거,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남북한 모두를 대표하여 일본으로부터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 하였으나 역시 같은 근거에 의해 북한 몫은 별도로 남겨졌습니다. 

이후, 1991년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까지, 국제적 현실은 ‘Two Koreas(두 개의 한국)’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북한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여도 영토 주권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북한의 운명은 어떤 경우에도 북한 주민 다수의 의사에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도 북한의 붕괴는 하나의 해법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이것은 망상입니다. 이 망상이 해로운 이유는 한반도 평화 진전의 발목을 잡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북한이 무너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공허한 것이며, 현재의 북한 당국자와 관계를 맺어나가며 평화를 증진시켜야 합니다.

탈북민은 ‘우리 사회’를 보게 하는 거울
벗어나야 할 착시가 하나 더 있다면 교회 안팎에서 ‘탈북민’ 문제가 마치 통일 문제인 양 다뤄지고, 그들을 돕는 것이 통일을 위한 노력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탈북민들을 지원하고 있지만, 제대로 하려고 덤빌수록 우리 사회의 문제가 더 부각됩니다. 

우리 사회에 정착 중인 2만 3천여 탈북민들은 남한 사회의 ‘소득 하위 계층’입니다. 무직이 아니면 대부분 비정규직입니다. 이들에게는 임대주택, 직업교육, 대학 등록금 면제, 의료보장(거의 무상) 등 특별한 복지 혜택과 교회와 민간재단들의 지원이 제공됩니다. 이는 기존의 취약계층들 입장에서는 불공정한, 선진국 수준의 복지혜택입니다. 한 사회의 통합은 공정성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공정성을 위해 탈북민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박탈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유사한 계층 모두에게 같은 혜택을 주는 길만이 해법인데, 이는 다름 아닌 우리 사회의 복지 문제입니다.

한편, 이런 혜택 속에서도 탈북민들은 여전히 취약계층입니다. 이들이 북측에 남은 가족들에게 전하는 자신들의 근황은 다름 아닌 남한 사회 소득 하위계층들의 일상입니다. “학벌, 부, 가난은 대물림되고, 자살률은 최고 수준이다”라고 전해질 수도, “지금은 가난하지만 희망이 있다”라고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느 편이 매력적으로 느껴질까요? 진정한 남북의 통합은 속하고 싶은 ‘하나의 공동체’가 될 때만 가능하므로,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이란 결국 통일에도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이렇게, 탈북민 정착 문제는 소득 불평등, 학벌, 복지 등 기존 사회문제에 도착하게 됩니다. 물론, 북한 주민 전체를 받을 형편이 안 된다는 면에서도, 탈북 현상에서 해법을 구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무한 반복’하는 분단 체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분단이 길어진 이유는 ‘헛다리’를 짚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결이 아닌 분풀이에 집착한 세월들, 수령만 죽으면 되리라는 착각, 냉전이 끝난 뒤에도 수동적이기만 했던 외교,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우리 땅이 될 것이라는 망상, 탈북 현상이 주는 막연한 기대 등입니다.

이제 대중은 정확한 지식을 소유하고, 정부에 자기 주도적 정책 생산과 집행을 요구하며, 정치인들이 분단에서 이(利)를 취하려는 생각을 버리도록 표를 행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우리 안에 있는 분단의 씨앗들, 패배주의의 악령들과 매일 싸워야 합니다. 잘못된 태도, 잘못된 지식을 날마다 하나씩 제거해 나가지 않으면 생명을 제물로 요구하는 분단과 반(反)평화의 현실을 뒤집을 수 없습니다.

분단 70주년을 맞아 개신교 단체들이 모여 6월 27일(토)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한반도 화해와 평화를 위한 통일 기도회’를 진행합니다. 그 시간이 또 하나의 반복이라면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전후로 이런 족쇄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행보를 계획합니다. 먼저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충분히 논쟁하고, 합의할 방향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북한 지도자 김정은과 같이 198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을 적극적으로 세울 것입니다. 통합된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나가는 것이 이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마음을 모아 기도에 나설 것입니다.

거절당할 수도 있고, 사람이 적게 모일 수도 있겠습니다. 끝까지 정성껏 설득할 것입니다. 먼저 지도자들에게 기회를 드릴 것입니다. 목회자와 리더들이 먼저 지성의 장에 들어오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후 모든 새 세대에게로 나아갑니다. 그들이 만만치 않은 순종과 능력의 세기를 열어젖힐 수 있도록 상상력을 불어넣고, 끊임없이 갱신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윤환철
대학생 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설립발기인이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인 이후 <복음과상황> 기자, (사)남북나눔운동 교육국장, 한반도평화연구원(KPI) 사무국장을 지냈다. 지금은 미래나눔재단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블로그 virtu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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