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호 사람과상황] 줌머인에서 난민, 난민에서 한국인이 된 로넬 챠크마의 인생 유전
난민(難民, refugee). 생명을 부지하기 삶을 내던진 사람들. 유엔난민기구(UNHCR, unhcr.or.kr)에 따르면,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으로 인해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합리적 근거가 있는 공포를 가진 자로 자신의 출신국 밖에 있으며, 박해의 공포로 인하여 출신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받기를 원하지 않거나, 또는 출신국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을 말한다. 따지고 보면 이집트의 종살이를 벗어나 엑소더스를 감행한 이스라엘 민족도, 일제하 모진 박해와 약탈을 피해 만주와 북간도 등지로 도피한 우리 선조들도 난민 아니던가. 심지어 헤롯의 살해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도피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 체류했던 예수님 일가도.
유엔난민기구가 ‘세계 난민의 날(6.20)’에 즈음하여 발표한 <연간 글로벌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전쟁, 분쟁 그리고 박해로 인한 전 세계 난민의 수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였으며 여전히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014년 한 해 동안 난민, 실향민 등 강제이주민의 수는 5,950만 명으로(2013년 5,120만여 명), 1년새 이렇게 큰폭으로 증가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가운데 시리아 내전으로 발생한 국내실향민은 760만 명, 해외로 피신한 난민은 388만 명에 이르는데, 인구의 절반이 국내외를 떠도는 셈이다. 아시아의 경우, 전 세계 난민 가운데 작년 한 해 900만 명의 난민과 국내실향민이 발생했다. 아시아의 최대 난민 보호국은 이란과 파키스탄이다.
우리나라는 1992년 유엔 난민협약에 가입했고, 2013년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 시행했다. 난민인권센터(NANCEN, nancen.org)의 행정정보공개청구에 따라 공개된 법무부 난민과 자료를 보면, 1994년부터 2015년 5월까지 한국 내 난민 신청자 수는 1만 1,172명이고 이 가운데 난민 인정은 492명(0.4%), 인도적 체류가 821명이다. (‘난민 인정’의 경우, 기초생활보장제도와 자녀 의무교육을 보장받고 외국에서 이수한 학력도 인정받으며, 외국에 있는 가족의 입국을 허가받는 ‘가족결합’도 인정된다. ‘인도적 체류’는 강제 출국 당하지는 않지만, 의료·교육 등의 혜택은 받지 못하고 국내에 머무르고 일할 수 있는 권리만 제공받는다. 비용이나 정치적 이해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인도적 체류 결정이 편하다.〔경향신문 2015년 9월 11일자 참고〕)

1994년부터 2015년 5월까지 전체 난민 출신국가별 난민 인정자 수는 미얀마가 154명으로 가장 많고, 방글라데시가 84명으로 두 번째다. 여기서 방글라데시 난민 인정자는 대다수 ‘줌머인’(Jumma people)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그 84명 중 한 사람, 줌머인의 자치권을 위해 한때 게릴라로 활동하기도 했던 로넬 챠크마(48) 씨를 만난 곳은 김포시외국인지원센터였다. 그는 고등학생 때 방글라데시 치타공 산악지대의 소수민족 줌머인들을 박해하는 방글라데시 정부군에 맞서 게릴라 활동을 하다 체포당해 고문을 당했으며, 감옥살이에서 풀려나자 국외로 도피하여 제3국을 떠돌다 지난 2002년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하여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인터뷰를 위해 평소 로넬 씨를 알고 지내던 본지 독자인 김영준 민들레교회 담임목사가 동행했다. 한국어가 상당히 능통한 로넬 씨와의 인터뷰는 최대한 그의 우리말을 그대로 담았다.
― 자기 소개를 해달라.
내 이름은 로넬 챠크마다. 로넬은 게릴라 단체 지도자가 붙여준 이름이다. 내가 고1이었을 때,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재선되었는데, 그 로널드를 따서 로넬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성은 챠크마(Chakma)인데, 내가 속한 부족 이름이기도 하다.
― 방글라데시의 줌머족 출신이라고 들었다.
사실 줌머족이라는 민족은 없다. 줌머라는 이름은 방글라데시의 주류 민족인 벵골족이 11개 소수부족을 합쳐서 놀리는 말이어서, 우리는 다들 화를 내곤 했었다. 줌머의 ‘줌’(Jum)이 원래 화전 농업을 뜻하는 말로, 줌머(Jumma)는 줌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화전 농업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방글라데시 동북부 치타공 산악지대에 흩어져 사는 11개 부족민은 민족 이름도 각기 다르고 언어와 문화, 종교도 다르다. 내가 속한 챠크마(Chakma)족을 비롯, 마르마(Marma)족, 트리푸리(Tripuri)족, 구르카(Gurkha)족 등 모두 이름을 갖고 있다. 종교도 불교와 힌두교, 기독교 등 서로 다르다. 방글라데시는 이슬람교 국가로 1971년에 독립국가가 되었는데, 당시 방글라데시 내의 치타공 산악지대에는 원래부터 거주해온 11개 부족이 있었다. 이들이 방글라데시로부터 자치 독립을 위해 11개 소수부족을 통합하려는 목적으로 ‘줌머족’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줌머 민족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간 언론에 줌머족 관련 기사가 나오긴 했는데, 기자분들의 이해에 따라 정의가 달라지더라.
― 기분 나쁜 말인데 왜 사용하게 되었나?
보통 소수자들은 주류에 포함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민족 속담에 ‘조금만 배우면 벵골 사람 된다’는 말이 있다. 재미있는 게, 벵골족 사이에는 조금만 배우면 영국 사람 된다는 말이 있다는 거다. 방글라데시는 원래 인도에 속해 있었을 때 영국 식민지 경험이 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에 있어서 벵골화를 거부하는 사회 운동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줌머인’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게 된 거다. 놀리는 말이 이제 자랑스러운 말로 바뀐 것이다.

― 고향은 치타공 산악지대의 어디인가.
내가 태어난 곳은 카그라챠리(Khagrachhari) 구의 판챠리(Panchhari) 마을로, 화전 농업으로 시작된 마을이다. 판챠리도 긴 역사가 있는데, 우리 아버지 시대인 60년대 랑가마티(Rangamati) 구에 당시 파키스탄 정부가 댐과 수력발전소를 만들었다. 그 결과, 그곳에서 농사 짓던 땅이 다 수몰되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 10만 명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 그중에 우리 가족이 있었다.
― 판챠리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자랐나?
태어난 뒤로도 여러 번 강제이주를 당했다. 그때는 내가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게릴라 운동가였다. 방글라데시 정부군을 상대로 1973년에 게릴라 단체가 만들어지고, 77년부터 게릴라 전이 시작되었다. 줌머인의 자치권을 위한 싸움이었는데, 1997년까지 20년 정도 계속되었다. 우리 아버지도 당시 게릴라 단체의 첫 구성원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집을 떠나 바깥에 있었고, 정부군과 경찰쪽과 게릴라군 사이에 크고 작은 싸움이 있었다. 1979년에 강제이주를 당했고, 80년대에 또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당했다. 내가 서류상으로는 1972년생인데, 실제로는 1968년생이다. 10대 시절을 너무 불쌍하게 살았다. 정치적,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초등학교 막 졸업한 뒤 집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외삼촌이 살고 계시는 곳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다. 그런 식으로 살다 보니, 가족들과 함께 산 기간이 길지 않다. (치타공 산악지대 분쟁〔Chittagong Hill Tracts Conflict〕은 방글라데시 정부군과 치타공 산악지대 연합인민당의 무장단체인 ‘샨티 바히니’〔Shanti Bahini, 평화군〕 사이에 벌어진 무력 분쟁을 말한다. 치타공 산악지대 11개 소수민족의 권리와 자치권을 위해 싸운 샨티 바히니는 1977년 정부군에 맞서 무장 투쟁을 벌였는데, 그 충돌은 1997년 정부군과 게릴라 사이에 치타공 산악지대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20년간 지속되었다. ―편집자, <위키피디아> 참조)
― 아버지와 함께 지낸 기간은 더 짧을 것 같다.
10년도 안 될 것 같다. 어머니랑은 15년 정도. 어머니가 2005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나는 한국에 있었다. 어머니는 계속 고향 마을에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도 장례식에 갈 수가 없었다. 2004년에 이미 난민 인정을 받았는데도 장례식에 갈 수 없었다. 줌머 불교에서는 화장을 하기 때문에 묘가 없다. 그래서 장례식이 가장 중요하다. 장례 이후 세 번의 예식이 있는데, 거기에도 못 갔다.
― 난민 지위 인정을 받았는데도 다녀오지 못한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가 첫째였다. 그리고 난민 비자가 따로 있는데 법적으로 제한이 있다. 한국 정부로부터 난민 인정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내가 방글라데시 정부로부터 정치적 위협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기에 방글라데시로 돌아간다는 건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2011년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했는데, 그래도 가지 못했다.
― 한국 국민으로서 여권이 있는데도?
여전히 방글라데시 내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위험했다. 나는 한국 국민으로 세금도 내고 당연히 한국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방글라데시 법에 따라서 외국인으로 재판에 넘겨질 수 있다. 내가 과거에 했던 정치 활동들 때문에 붙잡힐 수 있다.
― 방글라데시 정부를 상대로 정치 투쟁을 했다는 얘긴가?
과거 나는 방글라데시에서 반정부 활동가였다. 방글라데시의 인권 상황은 지금도 너무 열악하다. 줌머인에 대한 억압도 계속되고 있다. 줌머인 전체가 억압당하는 건 아닐 수 있지만, 줌머인 인권 활동가들은 정부 기관의 적(適)이다. 내 경우는 1985년부터 직접적인 투쟁을 했다. 줌머인들의 자치권을 위한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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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과상황 이범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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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타공 산악지대의 줌머인 ⓒ복음과상황 이범진 | ||
― 무장 투쟁에 참여했다는 건가?
당시에는 (비무장) 민주화(평화) 운동이란 없었다. 일반 주민이나 학생 모두 활동가였다. 일반 주민들은 게릴라들에게 식량을 지원하거나, 학생들은 공부 마치고 게릴라 단체에 참여하는 식이었다. 그밖에도 교통편이나 정보 전달(우편) 등으로 다양한 지원이 이뤄졌다. 나는 공부하는 중에 게릴라로 활동한 것이다.
― 1985년에 게릴라에 참여했다면, 고등학교 1학년 나이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1986년까지 하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재판을 세 번 받고 3년 정도 감옥살이를 했다.
― 어쩌다 체포되었나?
당시에는 교통편까지 군대와 경찰이 통제하고 있었다. 교통편 시간이 다 정해져 있었고, 여러 대의 버스나 택시가 한 번에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이동할 때 군인들이 에스코트하는데 1킬로미터마다 검문소가 있어서 서로 신호해주면서 이동한다. 오후 4시 이후에는 아예 교통편으로 이동할 수 없다. 1986년에 판챠리 마을에 학살이 있어서 대부분 인도로 피란 갔을 때 우리 가족은 랑가마티로 갔다. 나는 나중에 랑가마티에 있는 집으로 가던 버스 안에서 체포되었다. 나이가 어렸는데도 군인들이 군부대로 끌고 갔고 고문도 당했다. 그 뒤 경찰에 넘겨졌다. 군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당해 일반 감옥으로 갔다.
그때 군인이 제안한 내용 중에 게릴라 활동을 포기하면 나를 풀어주고 교육비도 내주고 결혼도 시켜주겠다고 하더라. 나를 100% 풀어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는데, 누굴 믿어? 못 믿지. 3년만 감옥에 있으라고 하더라. 경찰에 넘겨져 방글라데시의 중앙 교도소로 옮겨졌다. 거기서 산악지대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전용 법원(특수 법원)에 재판받으러 왔다갔다 했다. 그 재판정에 자신이 목격자라는 군인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때는 법원까지 군인들이 통치하던 시기였다. 감옥생활 3년이 되어가는데 목격자가 또 나타났다고 했지만 법원에 출석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감옥생활 딱 3년 되는 날 석방되었다. 체포되었을 때 군 간부가 3년만 감옥 있으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1986년 10월 23일 감옥 가서 1989년 10월 22일 풀려났다.
― 석방된 뒤에는 어찌 지냈나.
상황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큰 대학들의 경우 진보 학생단체들의 도움으로 학생운동이 가능했다. 적극적인 역할은 없었지만 (줌머인 자치권) 운동에도 참여했다. 공부도 다시 하게 되었는데, 전문대 인문학과로 들어가서 1993년도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 대학을 다니면서부터는 방글라데시 사회에 정착하게 된 건가.
그렇게 못했다. 오히려 아주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도 나는 감시 대상이어서 항상 감시 속에 있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신고를 해야 하고. 마을마다 군인들과 경찰들이 같이 있었는데, 우리 집으로 나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체포되어 끌려간 일이 있었다. 나중에 이유를 알고 보니, 나와 함께 전에 게릴라 활동을 했던 사람으로 의심을 한 거였다. 너무 힘들어서 대학 졸업한 그 해에 인도로 떠났다. 그리고 인도에서 태국으로 갔고, 태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왔다. 가족들과는 계속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 고국에 비해 인도나 태국에서 지내는 생활은 어땠나.
감시가 없어서 안전함을 느꼈다. 인도와 태국 합쳐서 1년 정도 머물렀다. 그런데 그 기간이 한국에서의 10년 시간과 비슷했다. 비자가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비자 연장이 되지 않아 태국에서 라오스로 갔다가 다시 태국으로 재입국해야 연장이 되었다.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오히려 한국으로 와서는 (불법체류자로 지냈는데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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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과상황 이범진 | ||
― 왜 한국을 택했나?
태국에서 머물던 시기가 줌머 사람들의 망명 시기였다. 박해를 피해서 방글라데시를 떠나 인도로 간 줌머 사람들이 6만 5천 명이었는데, 인도 정부가 난민으로 인정해줬다. 줌머 사람들은 본래 외국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인도 외에 다른 국가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불교국가인 태국으로도 가기 시작했다. 당시에 태국은 스님 생활하면 비자도 쉽게 나오고, 불교대학에 입학하면 무료로 공부할 수도 있었다. 태국을 거쳐 유럽쪽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일본으로 가는 사람도 많았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줌머인의 최대 부족인 챠크마족의 경우 오늘날 인도 북동부와 중국 남서부, 버마(미얀마) 서부 등을 비롯하여 미국과 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일본, 한국 등에 디아스포라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편집자)
한국에는 1994년초까지는 한 명도 없었다. 그때 줌머족 게릴라 단체 대변인이 태국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고 대표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한테 제안했다. 한국에는 줌머 사람이 없으니까 거기로 가라고 했다. 그때부터 한국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이 많았는데, 잡지도 보니까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더라.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 발전 등 기본 정보를 알게 되었고, 특별히 우리가 인종 차별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일제하에서 차별 받은) 한국 민족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역사적으로도 통일의 과정이 있었고, 불교의 역사도 깊고, 또 피부색 등 공통된 것이 많아서 한국에 관심이 더 높아졌다. 그래서 한국을 택하게 되었다.
― 그럼 언제 한국에 들어왔나.
1994년 4월인가 6월에 관광비자로 들어왔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난민 제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태국에는 유엔난민기구가 있었는데, 그때 미얀마 난민들을 받아줬다. 줌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유는 (우리에게는) 난민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다. 우리는 그냥 어디로든 도피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1998년 4월에 방글라데시로 다시 귀국했다. 이유는 1997년 12월에 방글라데시 정부와 게릴라 단체 사이에 평화협정이 있었다. 그 후 게릴라들이 1998년 2월에 완전히 비무력화되었다. 총을 정부에 반납하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래서 갔는데 가자마자 귀국 하루 뒷날 또 연행되었다. 연행 이유가 한국 사람 두 명이 나를 따라왔는데, 치타공 산악지대에 정부 허가 없이 외국인을 데려왔다는 거였다. 그 한국인들은 방글라데시 현지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 직원으로 여성 1명, 남성 1명이었는데, 나까지 포함해서 3명이 새벽 2~3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내가 유명한 사람도 아니지만, 정부군들이 나를 알고 있었다. 결국 경찰들이 우선 밤이니까 있어도 된다고 허용하면서, 해 뜨기 전에 한국인 2명은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그분들은 떠났는데, 다시 나를 붙잡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평화협정까지 했는데, 이런 식으로 조사를 받게 되면 평화협정이 무슨 의미가 있나. 2년 정도 고향에서 계속 감시 속에 지내다가, 2000년대 초에 다시 한국으로 왔다. 그때 난민 제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난민 신청을 하게 되었다.
― 방글라데시 정부에서 알았을 텐데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었나?
큰 어려움은 없었다. 여권을 바꾸면 되는 거였다. 지금은 안 되지만, 그때만 해도 주민등록제도가 없었다. 그래서 행정기관에 돈만 주면 (다른 이름으로 된) 새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 다시 한국으로 온 뒤로는 어떻게 지냈나.
공장에서 계속 일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2002년도에 난민에 대해서 알았다. 그 해에 한국의 미얀마 난민 인정이 처음 있었고, 그 전에 에티오피아인 한 명도 난민 인정을 받았는데, 그 보도를 보고 그때서야 난민 제도에 관해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C-3 비자’(90일간 허용되는 단기 체류 비자-편집자)로 와서 1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비자 기간이 지난 것을 ‘자진 신고’ 하면 체류 기간을 1년 연장해주었는데, 그 기간이 끝나자마자 난민 신청을 했다.
― 난민 신청 과정에서 한국 단체의 지원을 받았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물질적인 지원은 아니지만, 국제민주연대(khis.or.kr) 활동가들이 많이 도와줬다. 언론에도 많이 연결을 해주고, 직접 통역도 해주고, 글도 작성해주고, 그런 일들을 많이 했다. 당시에 줌머인에 대해서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 등에 몇 번 보도가 되었다. 신청할 때도 집단으로 했고, 난민 인정도 집단으로 받았다. 굉장히 예외적인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당시 함께 신청한 줌머인 11명이 난민 인정을 받았는데, ‘재한줌머인연대’가 그 무렵 구성되었다. 멤버는 7명이었다.
― 올해 5월까지 미얀마(152명) 다음으로 방글라데시(84명)가 난민 인정자 수가 많다. 그대다수는 줌머인인가.
2~3명 제외하고는 그렇다. 물론 절반 이상은 ‘가족결합’ 명분으로 난민 인정을 받았다. 우리 가족도 2003년에 한국에 들어와서 난민 인정을 받았다. 아내와 아들인데, 결혼은 98년에 방글라데시로 귀국했을 때 했다. 아들이 2000년생인데 지금 고등학교 1학년으로 김포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 2003년이면, 아들이 세 살 때 한국에 들어왔다. 거의 한국에서 성장했는데, 자녀 교육에는 고민이 없나?
아들은 말은 물론이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한국인이다. 아들의 미래도 한국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제까지 내 인생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자녀 교육이 가장 큰 어려움이다. 난민 인정 받는 것보다 더 어렵다. 중학교 때까지는 큰 고민은 없었다. 고등학교 가면서 더 어려워졌다. 우리가 한국 교육 시스템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교육을 잘 받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성적표만 보고 평가할 수만은 없다. 한국 아이들, 한국 엄마들 하고 비교하면 불안하다. 한국 엄마들 목숨 걸고 하지 않나. 우리도 학원 보내기는 하는데, 비교해보면 걱정된다.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안 하는 게 아닌데, 부모로서 우리가 가이드를 잘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서. 얼마 전 시험 봤는데 영어 성적이 많이 안 나왔더라. 학원도 (과목별로) 따로 따로 보내야 하는데…. 2년 반 정도 지나가면 대학교 들어가야 하는데, 대학 들어가서 제대로 직업도 구해야 하는데… 한국의 교육 경쟁, 일자리 잡는 경쟁, 그게 늘 고민이다. 고민이 많이 된다.
― 학교생활은 어려워하지 않나?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게 고맙다. 아들이 아주 어렸을 때 난민 인정받지 못한 상황 때문에 힘들어서 잘 챙겨주지 못했는데도 말을 잘 들었다. 한 번도 유치원 안 간다 하는 말 없이 잘 다녔다. 짜증내거나 그런 적도 없었고. 아들이 공부 잘하는 것보다 열심히 다니고 있다는 데 고마운 생각이 든다. 아프지 않는 한 지금까지 결석 한 번 없었다. 한 번도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학교나 학원을 빠지지 않았다. 학교생활의 특별한 어려움 없었다.
― 외모 때문에 차별을 당하거나 어려움은 없었나?
잘 모르겠다. 최소한 우리에게 말한 적은 없다. 내 생각에는, 오히려 엄마 아빠 때문에 약간 불편해할 수는 있다. 자기는 마음과 몸, 생각이 다 한국인인데, 엄마 아빠만 외국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좋은 생각은 아니지만, 정체성 관련 문제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외모로는 차별은 없는 것 같다. 한국 사람보다 더 잘 생겼기 때문이다.(웃음) 외모로는 (한국인과) 구분이 안 된다.
― 아들 이름이 어떻게 되나?
주니, 주니 챠크마다. 학교 출석부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주니는 챠크마 말로, 반딧불이라는 뜻이 있다.
― 대개는 한국 국적을 취득할 때 한국식 이름으로 바꾸는데, 안 바꾼 이유가 있나?
정체성 문제다. 우리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지만, 기본적으로 태생은 챠크마족 출신의 줌머인이다. 그건 기억해야 한다. 이름에서 외국 태생이라는 걸 선생님도, 친구들도 다 아는데, 그래도 차별은 없는 것 같다.
― 명함에 ‘다문화인권강사’라고 되어 있는데, 한신대나 성공회대에서 강의도 한다고 들었다.
그게 좀 안타까운 게, 보통은 강의 요청해올 때 난민 이야기에만 포커스를 둔다. 그런데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줌머족의 인권을 포함한 소수민족의 인권 문제다. 인권은 나의 문제나 너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류) 공통의 문제 아닌가.
― 그간 하고 싶었던 소수민족 인권 문제를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줄 수 있나.
‘소수민족’이라는 말 자체부터 차별적이라고 생각한다. ‘부족’이라는 말도 그렇고.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불러왔으니까 쓰게 된 거겠지만. ‘원주민’(aborigines)이라는 말도 차별적이라고 하여 지금은 ‘선주민’(indigenous peoples, 先住民)이라고 부른다. (선주민이란 특정한 문화와 전통을 보유한 채 원래부터 그 지역에 거주해온 민족으로, 뉴질랜드 마오리족, 미국 인디언, 일본 아이누족, 방글라데시 줌머족이 대표적이다.-편집자) 2007년 유엔에서 ‘선주민 인권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일반 인권선언(1948년 12월 10일 제3회 유엔 총회에서 채택한 세계인권선언-편집자)도 있는데도 따로 선주민 인권선언이 발표된 이유가 있다. (<UN 선주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조에는 “선주민은, 집단으로 혹은 개인으로서, 유엔헌장, 세계인권선언 그리고 국제인권법에서 인정하는 모든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완전히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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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넬 챠크마 씨는 김포시외국인지원센터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
이 선주민 문제는 인권뿐 아니라 문화, 인류, 환경 등이 다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선주민 거주 지역) 개발 문제 때문에 환경 문제가 생기고, 또 그로 인해 경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가정도 깨지고, 사회도 깨지고, 사람들은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한다. 이 모든 게 연결되어 있는 문제다. 현재 이 지구를 지키는 사람들은 소수민족이고 선주민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은 자연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다. 호주의 선주민이나 남아시아의 선주민들은 지구의 자연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류를 위해 자연을 지키며 살고 있는데도 그들의 삶은 보호받지 못하고 각국 정부의 개발 정책 속에 위협을 받고 있다.
줌머인이 원래부터 살던 땅인 치타공 산악지대를 예로 들어보겠다. 치타공 산악지대를 거쳐 벵골만으로 흘러가는 카르나풀리강이 있는데, 그곳에 방글라데시 유일의 수력발전소 카르나풀리 발전소를 만들어서 방글라데서 전력의 50%를 공급한다. 또 산악지대니까 나무가 많기 때문에 종이공장이 세워졌다. 한때는 아시아의 가장 큰 종이공장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나라의 경제에 어느 정도 역할(기여)을 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전기 공급을 위해 수력발전소를 지은 그 소수민족 거주 지역에는 정작 전기가 없다. 전기 안 들어가는 지역이 너무 많다. 또 대나무를 잘라내니까 자연이 파괴된다. 소수민족, 선주민 거주 지역을 개발해도 그들은 혜택 받지 못하고 강제이주 당한다. 그 땅은 그들의 조상 때부터 오랫동안 살아온 것이기 때문에 땅의 소유권을 증명할 서류가 없다. 서류 없는 땅은 정부가 소유하게 되고, 소유권이 없기 때문에 선주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받지 못한다. 그러면서 정부는 자연보호법, 산림보호법 같은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서 소수민족들이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 20년 간 무력 투쟁이 벌어진 이유가 거기에 있다.
줌머인들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선주민들이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 세계 전쟁 중 종족 관련 분쟁이 약 70%이다. 소수민족 문제는 복잡하다. 보호할 수 있는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물론 그 전에 우리는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하고, (소수민족) 인권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 소수민족인 줌머인으로 태어나 남의 나라에서 난민이 되어 살아왔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지만, 어쩌면 평생 마이너리티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게 내 정체성이다. 현재 한국사회를 바라볼 때, 여러 가지 약자가 있지 않나. 경제 약자, 사회 약자, 성적 약자… 다양한 약자가 있는데, 지금까지 살아보니 약자들이 한국사회 안에서 차별의 대상이 되더라. 물론 지원의 대상, 도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이 조금 더 바뀔 필요가 있다. 서로 서로 인권을 존중하면 마이너리티나 머조리티(majority) 자체가 없어진다.
― 끝으로, 그간 인터뷰를 몇 차례 해오면서 꼭 하고 싶었는데 못한 말은 없나?
얘기가 있어도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닌 것 같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바뀔 것은 바뀔 것이다. 내가 한국에 20년 가까이 살아보니까, 단계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앞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을 거라 기대된다. 물론 좋은 변화, 나쁜 변화가 있지만, 좋은 변화가 더 많을 거라 믿는다.
진행_옥명호 편집장 lewisist@gosco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