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호 레드레터 크리스천] '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그루터기장애인교회 오영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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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과상황 이범진 | ||
햇볕 따가웠던 4월 말 늦봄, 경기도 화성에 있는 그루터기장애인교회를 찾았다. 거의 20년째 장애인 교회 공동체를 꾸려가는 오영숙(61) 목사를 그곳에서 만났다. 인터뷰를 요청할 때 수화기 너머로 들은, “내가 하는 게 밥 먹이는 것밖에 없다”는 말을 그는 점심 준비를 하면서도 연신 했다. 끝내 거절 못하고 인터뷰를 수락한 오 목사는 “그저 맛있는 밥이나 먹고 놀다 가라”고 했지만, 온갖 제철 나물들을 대형 소쿠리에서 무치는 그에게 나는 “밥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되물으며 긴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소소한 씨름을 했다. 우리의 삶은 매일 먹는 활동을 빼놓고는 돌아갈 수가 없으니까. 저마다 갖가지 불편함을 안고 있는 이들과 더불어 살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삼시 세끼를 해 먹이는 고단할 일상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드디어, 점심 밥상을 치우고 티 테이블에 앉아 카메라와 노트북을 내놓고 분위기를 잡았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오 목사의 ‘밥 업무’를 늘 곁에서 돕는 동호 씨가 내주는 차를 앞에 두고서. 하루 일과를 묻는 것부터 시작하여 그루터기 공동체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보통 새벽 4시 반 정도에 일어나서 묵상한다. 유일한 혼자만의 시간이다. 그리고 아침 준비를 한다. 나물 씻고 무치고 찌개하고. 막내아들이 중1인데 학교 보내려면 7시 10분에 밥 먹여야 하니까. 아침상 차리는 게 끝나면 그때부턴 잔소리하면서 집안을 다닌다. 여기 좀 치우고 저기 좀 치우고. 닦았는지 세수는 했는지 확인하고. 그렇게 왔다갔다 하다가 점심상 준비해서 다 먹이고 나면, 이야기하는 지금 이 때가 제일 한가하다. 나는 진짜 밥 지어 먹이는 게 다다. 너무 덥지 않은 때는 밭일을 한다. 고추밭도 가꾸고 새로운 나물들 종류별로 사 와서 키우고. 밭은 봉사자들이 만들어 주기도 하고, 나도 만든다. 고추 심을 건데, 하다가 탄저병 오면 그만둔다. 제초제 안치고 농약 안 주고 키워서 거두는 게 많진 않다. 지난번엔 배추가 벌레를 많이 먹어서 ‘망사배추’를 거뒀는데 심어준 봉사자들에겐 미안하더라. 그래도 무는 이파린 하나 없어도 뿌리는 있더라.(웃음)
― 장애를 갖고 있고, 장애인들과 더불어 살고 계신다.
장애가 있으면서도 한 번도 소위 ‘시설’이라는 곳을 봉사활동도 가보지 않았었다. 뭔지도 몰랐고. 텔레비전에 나오면 후원하고 싶어 하는 정도였었다. 나는 장애인이라서 오히려 집에서 우리 5남매 중 특권을 누리며 자란 편이다. 부모님께서 늘 내 위주로 사셨으니까. 동생 셋과 오빠가 피해자다.(웃음) 부잣집도 아닌데 학교 다닐 때 옷이 허름하다 싶으면 어머니가 밤새 바느질을 해서라도 새 옷으로 입히셨고, 아버지가 자전거로 등하교시켜주시곤 했다. 우리 부모님이 내가 백일해에 걸린 상태에서 소아마비 예방접종을 하는 바람에 내가 소아마비가 왔다. 지금으로 치면 의료사고인데, 부모님은 당신들 잘못으로 딸이 장애를 입었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셨었다.
― 그런데 어떻게 장애인들과 함께 살게 되신 건가.
다른 장애인들도 다들 나처럼 행복하게 사는 줄 알았었는데, 현실을 봤다. 내가 30대 후반에 전도사를 시작했다. 전도하고 싶어도 사람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어떡하나 싶었는데, 나 같은 장애인을 만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찾아다니며 전도하러 다녔다. 그러다 정말 기절하게 놀랐다. 많은 장애인들이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충격이었다. 1990년 초였을 건데, 어느 집에서 예배하고 기도드리던 날 어느 분이 “나 전도사님 집에 한 번 가봐도 될까요?” 묻길래 “그래” 하고는 집에 며칠 데려와서 같이 있었다. 그런데 안 가더라. 안 가는 사람 가랄 수는 없고. 이게 그루터기교회의 시작이었다. 이사야 6장 13절 말씀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속의 그 그루터기다. 1997년부터 시작했고 점점 하나둘씩 집에 맞아들여 같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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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제일 먼저, 어머니가 알고 반대하셨다. “내가 자식 넷을 키우는 정성보다 더 들여서 너를 키웠는데 남의 똥오줌 받아내게 하려고 그렇게 키웠겠느냐” 하시더라. 어머니는 내가 효녀라고 하셨지만 다른 건 몰라도 여기서 질 수 없었다. 하나님 일인데. 그래서 어머니한테 “이거 안 하면 하나님이 나 데려가실 건데?” 했다. 아무 말도 못하시더라. 며칠 뒤 또다시 엄마한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예수 믿겠다고 해놓고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지 않냐면서 설득했다. 어머니가 졌다. 초반엔 우리 집을 안 오셨었다.
― “하나님 일”이라고 하셨는데.
함석헌 선생님 평전에 보면 “하나님 발길에 차여”라는 표현이 나온다. 나도 그런 듯싶다. 주님을 영접하면서 인생이 이렇게 그려졌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군가를 선별할 수 없다는 생각에 누군가 연락이 오면 여러말 없이 “오라고 그러세요” 했다. 한 번은 진주에 계신 분이 연락이 와서 정영기라는 친구를 받았는데, 수저질도 안 되더라.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면 떠먹여 주기도 해야 한다. 그땐 우리 딸이 반기를 들었다. 왜 맨날 오빠는 엄마가 밥 먹여줘야 하느냐면서, 울먹였다. 자기한테 올 사랑을 빼앗겼으니까. “그럼 네가 먹여라” 했더니 그것도 싫지. 먹이면서 다 뱉어 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러니까.(웃음) 딸을 공원에 데려가서 몇 시간씩 설득했다. “엄마 이거 안 하면 하나님한테 혼나는데 그만둘까?” 하면서. 딸이 불만을 제기할 때마다 그렇게 차 태우고 나가서 이야기했다. 나는 ‘시설’이라는 말도 싫지만, 이런 게 시설인지도 처음엔 몰랐다. 차차 ‘증’이 필요하다니 사회복지자격증도 따고 양성교육도 받고 그랬지만. 그냥 ‘식구’로 충분하다. 예전엔 열 식구 정도는 같이 살았으니까. 어쨌든 우리 집에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니까 나도 대책이 안 서고, 결국엔 동네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더라. 당시엔 안산에 있을 때인데 아무래도 도시니까.
― 동네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말은?
식구 중에 뇌병변1급 장애인이 있었는데, 이 친구가 활동력이 많고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휠체어를 타면 발 하나로 밀 수 있으니까 계속 뒤로만 가는 거다. 도로 쪽으로 나가면 차 사고 위험이 있으니 동네 사람들은 신경이 쓰여서 난리가 날 수밖에. 쫓아와서 삿대질해대며 사고 나면 책임질 거냐고 소리를 지르는데, 일단 죄송하다 해놓고는 이 친구를 '단도리'했다. 다른 사람 피해 주니까 그러지 말라고. 야단은 치지만 그러고 나면 내가 속이 너무 아팠다. 사실 누워 있는 거 보다야 뒤로라도 밀고 다닐 수 있는 게 좋지 않나. 그래서 옮길 생각을 했다. 마침 경기도 매송에 친정 땅이 있어서 거기로.
― 매송에 집을 지으셨나?
그러려고 했는데 결국엔 못 지었다. 몰랐는데, 그 땅이 그린벨트로 묶여 있더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두 달 걸려 그 땅에 목사님들 동료들과 함께 비닐하우스를 만드는데, 다 되어갈 때쯤 시청 단속이 나왔다. 지금 같으면 약삭빨라서 버섯 재배한다고 둘러대고 끝났을 일인데, 장애인들 예배드릴 거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웃기는 소릴 한 거다.(웃음) “누가 그린벨트에서 예배드리라고 했느냐”며 내일 철거하겠다더라. 그날 저녁부터 거기 장판 깔고 드러누웠다. 이튿날 진짜로 굴착기가 왔길래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했더니 봐주면 자기가 옷 벗어야 한다고…. 벌금 2천만 원에 징역도 살아야 한다고 협박을 해서 아득했었다. 시청이고 경찰이고 불려 다니고, 쓰라는 대로 자진 철거 각서를 썼는데 날짜가 되니 정말 나가라고 전화가 왔다. 멋지게 살고 싶었는데, 참 어려운 거였다. 어머니가 결국 친정집을 팔아서 다른 땅을 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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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과상황 이범진 | ||
― 다행이다?
아니다. 거기에도 못 지었다. 그 동네에 크리스마스 때 미리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먹을 거 사 들고 인사를 드렸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냉랭한 게 알고 보니 그 동네에서 우리가 들어온다고 진작부터 난리가 났더라. 땅값 떨어진다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융자도 받아놓고 좋은 환경에 집 지을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비닐하우스에 돌아와 하나님한테 집 안 짓겠다면서 울며 기도했다. 장애인도 당신 자녀인데 이렇게 천대받게 두실 거냐면서.
― 지금의 그루터기교회 집은 어떻게 짓게 되었는지.
비닐하우스에 찾아오셨었던 어느 사업가 집사님이 지금 이 땅을 싸게 소개해주셨다. 그분 회사 공장으로 찾아가 예배를 드렸던 적이 있는데 “집 짓게 되면 돕고 싶다”고 하셔서 “주께서 원하시면 하실 수 있다”고 대답했었다. 그분께 집을 못 짓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느 날 갑자기 여기 땅을 보여주시더라. 참 희한한 일인 게 금액이 불가능했었는데, 융자 끼고 형제들 도움도 받고 하니 이렇게 저렇게 신기하리만큼 가격에 딱 들어맞았다. 하나님이 친히 하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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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 여정이 궁금해진다.
20대 중반에 제 발로 찾아가 뒤늦게 믿었고, 책을 읽으면서 점점 많이 변해왔다. 처음엔 주일성수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식의 신앙이었다. 딸과도 그 점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아침잠 많은 딸이 새벽기도에 못 참석하는 걸 “목사 딸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혼냈었으니까. 사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려, 그렇게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려 땅에 오셨는데 우리는 그 진리를 받았다 하면서도 하나의 도그마 안에 사람들을 가두려 하지 않나. 주님이 삶으로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삶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우리 집에 있는 이 강대상도 놓여 있을 뿐, 사실 필요는 없다. 형식을 통해 진리를 만날 수는 있지만, 진리를 만나고 나면 이후엔 형식에 매이지 않아야 하니까. 달을 가리켜 달을 본 다음엔 손가락을 치워야 하는데 그 손가락을 달이라고 하는 꼴이 우리 현실 같다. 주님이 원하시는 건 삶의 예배인데, 우리는 자꾸 삶과는 분리된 예배를 만들어 드린다. ‘내 교인’ ‘내 교회’만 찾을 뿐, 예배 아닌 삶을 산다.
― 목사님 삶은 하나의 예배 같다.
내가 아니라 우리 애들이 삶의 예배를 잘 드린다. 우리 집 막내가 누워 지내는데 이 아이 하나 돌보는 데 다 역할 분담이 있고, 짝이 있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나보다도 서로를 잘 살핀다. 누구는 서툴면서도 다른 이의 기저귀를 갈겠다고 하고. 누구는 나물을 다듬고. 손으로 일하면서 손 감각도 좋아진다. 한 끼를 만들기 위해서 하루가 노동으로 이어진다. 이런 게 주님이 원하시는 삶 아닐까? 나는 저 아이들에게 늘 미치지를 못한다. 집이 어지러워지면 화내기도 잘하고, 아직 멀었다. 특히 동호는 내 일을 정말 많이 도와준다. 천사처럼. 그리고 동시에 나를 많이 만들어 간다. 한 번 화가 나면 꼼짝도 하질 않는데, 날벼락이 쳐도 움직이질 않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가서 미동도 않는다. 그 아이 도움 없이는 힘쓰는 일을 할 수가 없는 나로서는 그 화가 풀리기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다. 여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를 도와주고 동시에 훈련시킨다. 처음엔 의기양양하게 하나님 일 한다고 시작했지만, 내가 얼마나 못됐는지, 오히려 내가 아이들 덕분에 살아가고 있구나 배운다. 낭만적으로 착각했던 것들도 있고.
― 어떤 착각인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는 돌보는 사람들의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리라는 부푼 마음이었다. 오만이었던 것 같다. 장애인 한 명을 돌봐주면 그 가족들이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자연히 전도가 될 줄 알았다. 웬걸. 모셔다 두고 1년에 두어 번 오다가 끝, 연락도 두절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봉순이라는 할머니는 병원에 계시다가 계속 강제퇴원을 당했다. 할머니 딸이 같이 살겠다고 들어왔었는데, 일거리 찾으러 나간 딸이 연락이 끊겼다. 할머니 돌아가실 때 겨우 만났는데, 고개 숙이고 우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안됐는지. 장례 후에 찾아와서 교회 다닌다고 하더라. 어떤 할머님은 치매였다가 돌아가셨는데 오겠다는 자식들은 말만 되풀이하다가 돌아가실 때에야 겨우 왔다. 다시는 연락되지 않았다. 사람에 회의가 드는 때도 있다. 오해도 많이 받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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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과상황 이범진 | ||
― 오해라면 어떤…?
내가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사람들에게 얼굴 눈도장 찍는 건데, 예전에 한 번 인터뷰를 하고 내가 너무 꾸며져 나온 것 같아서 이후론 그런 일을 피해왔더니 이상하게 소문이 나더라. (독자라서) 복상 인터뷰는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모임 와서 사진 찍어가고 그러는 자원봉사도 오면 힘들어서 못 오게 했더니 돈만 밝히는 사람으로 찍히기도 하고. 그런 소리 들을 때면 정말 가슴이 싸늘하게 금이 간다. 실은 얼마 전에 초창기부터 후원해주셨던 교회 후원을 중지 요청했다. 초창기에 우리가 후원을 기다린 것처럼 누군가 더 간절한 곳으로 그 돈이 가서 비빌 언덕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중지 요청을 드렸다.
사람의 속성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 같다. 나 역시 사람 뒤통수 칠 수 있고, 배신할 수도 있다. 그런데 주님이 들어오시면 바뀌는 거 같다. 교회를 다니고 안 다니고의 차원은 아닌 것 같고.
―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표정은 참 밝고 평온하시다.
그냥, 그래도 희망이 있다. 높은 자리 있는 분들 말고, 작고 약한 파도 같지만 혁명적으로 사는 사람들. 젊은 사람들이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주님을 정말로 따르는 자라면 더 많은 이들을 품어야 할 것 같다.
― 앞으로 꿈꾸는 일이 있으신지 궁금하다.
사실 우리 오빠는 나에게 “꿈대로 됐네”라고 한다. 맞다. 어릴 때부터 산에서 나물들 키우고 할머니들이랑 재밌게 살 거라고 말하곤 했으니까. 작은 꿈이 또 있다면, 누워 있는 사람에게도 창밖이 보이도록 집을 고치고 싶다. 내가 독립 공간을 원하듯 우리 식구들에게도 독립공간을 주고 싶다. 그렇게 같이 예쁜 공간에서 더불어 잘 살다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갔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