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호 곱씹어 보는 영화]

전라남도 곡성에서 박흥식이라는 남자가 친구와 그 아내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경찰인 전종구(곽도원)는 때마침 벌거벗고 고라니 사체를 뜯어먹었다는 외지인(쿠니무라 준)에 관한 소문을 듣는다.

그가 오고부터 마을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이윽고 끔찍한 살인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는데, 가해자들은 모두 심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종구의 딸 효진(김환희)이 피부 발진과 함께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마을의 문제는 곧 종구의 문제가 되었다. 굿을 하고 병원에도 가보고 가톨릭 부제(김도윤)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어느 것도 궁극적 해결책이 되진 못한다. 오히려 무당 일광(황정민)과 일본인이 귀신이라고 주장하는 무명(천우희), 기괴한 주술의 흔적에 피해자들의 사진과 소지품까지 지닌 외지인 사이에서 종구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다. 눈앞에서 내 아이는 죽어 가는데,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

1. 확신: 우리는 곡성(谷城)에 살지 않지만 곡성(哭聲)에 갇혀 있다
원 지명과 달리 한자 ‘哭聲’을 제목으로 사용한 덕에, 공간이기도 하고 공간을 점유하는 소리(정서)이기도 한 〈곡성〉의 사건들은 인물들이 발 딛고 있는 땅에서 일어난 일이면서 동시에 그 공간을 지배하는 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악마를 보았다〉 〈파괴된 사나이〉 〈아저씨〉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등 2010년 전후 쏟아져 나온 잔혹스릴러들이 심판하는 ‘신의 부재’를 전제하고 악마가 되어가는 인간의 폭력성을 통해 ‘악’을 탐구했던 것을 떠올리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의 한국영화들이 영의 세계를 무속과 ‘한’(恨)의 정서에 국한하여 다룬 점을 생각하면, 〈곡성〉이 최근 한국 대중영화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독보적이다. 〈곡성〉은 경험되는 현실의 폭력과 초월적 세계의 악이라는, 적어도 한국영화 텍스트에서 분리되어 있던 위의 두 세계를 어떻게든 연관 짓고자 하는 분투였으며, 그 와중에 영의 세계를 정면으로 다룬 몇 안 되는 한국 대중영화 중 하나로 기록될 만하다.

영화 〈곡성〉에는 두 개의 서사 층위에서 해석 가능한 두 개의 알레고리가 있다. 첫 번째 경우, 일본인인 외지인은 천황 부부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사진 앞에서 주술을 행한다. 불탄 집의 목매단 여주인은 일본인에게 강간을 당했다 하고, 하체에 상처를 입은 효진과 술집 여인을 포함하여, 여성 희생자들은 일본인에게 성적인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을 암시하며, 일광의 훈도시와 카메라는 그가 결국 일본인과 한패였음을 보여준다.

이상의 단서들은 이 영화를 일제 강점기의 상처를 해결하지 못한 한국사회의 여전한 폭력에 관한 메타포로 읽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일광은 고통 받는 이웃을 착취하거나 일제의 하수인이 된 존재이며, 박흥식이나 박춘배는 전쟁 피해자였다가(박춘배는 군복을 입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 가해자가 된, 살았으나 죽은 ‘좀비 같은’ 이들일 것이다. 사건 현장에 늘 늦게 도착하는 경찰이자 희생자의 아버지인 종구는 무력한 공권력이자 국가이기도 하고 의욕은 앞서지만 무능력한 ‘보호자’로 볼 수 있다. 무명은? 희생자들의 의복(군인의 점퍼나 술집 여인의 가디건)을 걸치고 나타나는 무명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이자 고통의 기억이다. 비교적 단선적인 이 알레고리가 섬뜩한 것은 아득한 세월이 흘렀으나 그것이 여전히 진행 중인 폭력임을, 우리가 ‘아직도’ 곡성을 살고 있고 도처에 곡성이 가득함을 뼈아프게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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