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호 은수연의 네버엔딩Q]

쌀독 긁는 환청
안정적이고 괜찮은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 있습니다. 10년 넘게 한 직장을 다니며 저축도 하고, 빚을 껴서든 아니든 집도 사고, 연금보험은 몇 개씩 가입해두고, 노후를 기다리면서 종신보험에 암보험, 의료실비보험, 치아보험 등 다양한 보험으로 만약의 사태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대비해놓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분들과 비교하면 저는 맥이 쭉 빠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한 달 일하면 한 달 먹고 사는 제가 겸사겸사 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며 직장을 정리했거든요. 아무런 대안 없이 일을 정리하고 나니 막막합니다. 겁 없이 삶의 터전을 떠나는 모험은 어릴 적부터 시작되어 그런지 별로 어렵지 않지만, 돈이 통장에서 점점 줄어가는 걸 보는 건 마음이 참 고달픕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쌀독이 있었습니다. 그 쌀독에 쌀이 점점 줄어가면 쌀을 푸는 컵이 항아리 밑바닥에 닿아 벅벅 긁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소리가 들려올 때면 매일 밥을 도맡아 하던 저는 마냥 배가 고파 왔고, 불안하고, 겁이 더럭 났습니다. 지금이 딱 그런 때입니다. 통장에 돈이 점점 줄어들 때마다 쌀독 바닥을 긁을 때 나던 벅벅 소리가 환청으로 들립니다.

마음이 초조하고, 답답하고,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만 눈에 잔뜩 들어옵니다. 그러다 문득 9호선 지하철 역사에 붙은 이른 새벽 안전요원 모집안내문을 봤습니다. 냉큼 전화를 하고, 간단한 이력서를 작성해 제출했습니다. 이른 아침 짧게 아르바이트를 하면 공부에도 크게 방해 안 되고, 용돈도 벌 수 있겠지 편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날 오후 바로 전화가 왔습니다. 9호선의 한 혼잡한 역에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으니 그곳에 배치해도 되겠냐고요. 그 다음 날 새벽부터 형광 빛 연두색 조끼를 입고 승강장 안전요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5시30분에 일어나 빛의 속도로 준비하고 나가야 6시 30분까지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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