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호 레드레터 크리스천] ‘미친 상상’을 현실로 일구어가는 국경선평화학교 대표 정지석 목사

   
▲ ⓒ복음과상황 오지은

# 01. DMZ평화문화센터 내 국경선평화학교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의 시간은 느릿느릿 평화로이 흐른다. DMZ(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반세기 넘게 남과 북을 둘로 나눈 견고한 분단철책 너머로 적막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오갈 수 없는 철조망 위를 새들만 자유로이 넘나든다.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설화가 서려 있는 북녘의 평강시가 바라보이는 남쪽 민통선 안에 ‘국경선평화학교’가 있다. 강원도 소유의 DMZ평화문화센터를 빌려 한반도(포함 전 세계 분쟁지역)를 섬길 ‘평화의 일꾼’(peacemaker)을 키워내는 국경선평화학교는, 군인들만 주둔하는 민통선 안에 세워진 최초의, 더욱이 ‘평화’를 가르치는 학교다. 지천명(知天命)에 새로운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모든 것을 최전방으로 달려온 정지석 목사(57)가 2013년에 3월 1일에 세운 이 학교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미친 상상”을 현실로 빚어가려는 ‘꿈꾸는 자들’의 공동체다.

“저기 보이는 게 비무장지대고 그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마을이 평강시예요. 인구가 11만 명이 사는 아주 큰 마을입니다. 우리가 저 마을을 두고 기도하고 있어요. 그곳에 평화학교가 서는 날을 위해서요. 그래서 남북의 평화학교를 중심으로 서로 교류하고 왕래하는 게 우리 마음 속 큰 기도제목이에요. 그뿐 아니라 이곳 철원 말고도 가까운 화천, 인제, 양구, 고성을 비롯해서 경기도쪽으로는 연천, 파주, 김포, 옹진, 강화에도 평화학교가 하나씩, 모두 열 곳이 생기고, 그 맞은편 분단선 너머 북쪽 마을에도 하나씩 세워져서 남북한 평화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게 우리의 비전입니다. 그런 사람을 남북의 평화학교가 함께 키우고 프로그램을 같이 하고 서로 만나고 오가는 날을 기대하는데, 우리가 먼저 이곳 철원에서 훈련하면서 준비해보고 있는 거지요.”

국경선평화학교 수업이 진행되는 DMZ평화문화센터 건물을 안내한 뒤 옥상에서 북녘을 바라보며 정 목사가 한 말이다. 그는 한신대 신대원에서 신학(M.Div.)을 공부한 뒤 민중교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사역하다 유학을 떠나 아일랜드 평화 에큐메니칼 대학원에서 에큐메니칼 평화학 석사, 영국 버밍엄 우드브룩 퀘이커 대학원에서 평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후 한신대 신대원과 성공회 대학원에서 평화신학을 강의하고 새길교회 등에서 사역하던 중, 2010년 새로운 소명의 삶을 찾고자 미국 퀘이커 영성평화학교인 ‘펜들힐’(Pendle Hill)로 떠났고 침묵기도 가운데 ‘철원으로 가서 남북한 평화를 일구라’는 소명을 받고 2011년 9월 무작정 이곳으로 들어왔다.
 
취재의 출발점은 <복음과상황> 편집부로 날아든, 기사 사용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는 한 통의 이메일이었다. 생소한데다 특이하기까지 한 학교명을 접한 뒤 품은 궁금증이 결국 이번 인터뷰로 취재진을 이끌었다. 인터뷰는 작년 11월초, DMZ평화문화센터(국경선평화학교)를 시작으로 철원 평화전망대와 소이산, 월하리, 동송마을 등으로 옮겨가며 한나절 가까이 진행됐다.

   
▲ 국경선평화학교가 빌려서 사용중인 DMZ평화센터 ⓒ복음과상황 오지은



― 미국 보스톤 대학 교수가 ‘평화학교’ 이야기를 듣고 “미친 상상”(crazy imagination)이라고 했다던데….
그분은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돕는 유대인인데, 팔레스타인 주교와 함께 우리 학교를 방문했었다. 그때 내가 열정에 차서 남북 평화학교 비전을 얘기했더니, 놀라서 그러더라. 당신 미친 거 아니냐고, 그건 ‘미친 상상’이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다. ‘당신 말이 맞다. 그런데 예수님도 미친 분 아니었나.’ 그러면서 서로 웃었다.

― 민간인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민통선 안에 학교를 여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 건물 강당에서 개교식을 열었는데, 애초 200명 정도 온다고 하니까 군청에서도 돕고 관할 사단에서도 협조하는 분위기였다. 정작 내 마음속으로는 200명 넘게 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초대 연락을 받고 500명 정도가 참석하겠다고 답신을 보내왔다. 그 얘기에 사단에서 안 된다고, 200명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난색을 표했다. 민통선 출입허가가 200명까지가 사단장 관할이고, 그 인원을 넘어서면 한미연합사에 통보해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초청에 응해서 온다는데 어떻게 누구는 오고 누구는 오지 말라고 할 수 있겠나. 최종적으로는 그대로 진행하게 되었고, 개교 당일 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했는데 너무 많이 오니까 그게 다 깨졌다. 그래서 아예 민통선 출입문을 다 열어놓고 헌병이 경계근무를 섰다. 민통선 생긴 이래 초유의 일이었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서 이듬해 청소년 500명을 모아 민통선 안 바로 여기서 평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 행사 또한 휴전 이후 민통선 안에서 연 최초의 청소년 행사였다.

   
 

― 학교 입학 조건이 어떻게 되나.
개교할 때 12명이 입학했는데, 학생들 나이는 18세 이후부터 은퇴한 사람까지 아우른다. 대안학교를 마치고 오는 경우도 있고, 일반인이 오기도 하고, 외국인도 들어온다. 기숙사처럼 사용하는 임대 단독주택이 있긴 하지만, 따로 정식 기숙사가 없으니까 기숙형 교육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가능하면 철원에 와서 살도록 권한다.

# 02. 철원 평화전망대

제2땅굴, 노동당사 등과 함께 철원 안보관광코스에 들어가는 평화전망대는 평일인데도 관람객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전망대에 오르자, 아래로 비무장지대 내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옛 터가 눈에 들어왔고 그 뒤로 드넓은 평강고원이 펼쳐져 있었다.

― 미국 퀘이커 영성학교인 펜들힐에서 “철원으로 가라”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이곳으로 오셨다고 들었다. 철원에 연고가 있거나 부모님 고향이 북녘이거나 어떤 연관이 있었나.
개인적으로 아무런 연고나 관련이 없다. 내 고향은 충청도, 아내는 고향이 대구다. 기도하는 가운데 길을 따라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이젠 두 번째 고향이 되었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 펜들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상황이 궁금하다.
펜들힐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기독교 소종파 퀘이커공동체의 영성평화학교인데, 1999년에서 2000년까지 논문을 쓰느라 한 차례 머문 적이 있다. 10년이 지나 2010년에 다시 갔다. 아침마다 공예배처럼 침묵예배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에 누구든지 침묵 가운데 자신이 받은 음성을 조용히 일어나서 나눈다. 성경 한 대목을 읽는 분도 있고, 그 시간 동안의 영적 체험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면 다른 이들은 조용히 귀 기울여 듣는다. 나는 매일 아침 침묵기도 중에 새로운 소명을 간구했다.

― 펜들힐의 침묵예배 중에 하나님 음성을, ‘철원’이라는 구체적인 지명까지 들은 건가.
‘철원으로 가라’는 명확한 음성을 들었다. 왜 철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젠가 어느 시점에 내 마음 속에 철원이라는 곳이 새겨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 왜 굳이 철원인지, 하나님께 반문하지 않았나.
철원이라는 지명을 들었을 때 오히려 굉장히 기뻤다. 내가 가야 할 길이 구체화된 거였기 때문이다. ‘왜’는 여기 와서 물었다. 철원에 와서는, 나에게 ‘남북평화통일’이라니 너무 엉뚱한 거 아닌가 하고 자주 물었다. 이게 과연 내가 할 일인가, 내가 혼자서 어떻게 하나, 계속 질문을 던졌던 거다.

― 평화학을 공부하고, NCCK와 크리스챤아카데미 등에서 일하신 과거 여정으로 보아, 무관한 분야는 아닌 듯하다.
그렇다고 해도 내 전 생애를 걸고 뛰어들 분야나 주제도 아니었다.


# 03. 소이산 이동 차량 안

평화전망대를 뒤로 하고 국경선평화학교가 날마다 평화기도순례길로 오르내리는 소이산을 향했다. 소이산은 정 목사가 낯선 철원 땅에서 와서 막막한 시간을 보낼 때 날마다 찾았던 기도 처소이기도 했다.

“이제 소이산으로 갈 겁니다. 소이산 평화기도순례는 수요일만 빼고 우리 학교에서 하는 매일의 일과입니다. 제가 여기 왔던 초기에 이 산을 날마다 오르내리며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많이 받았어요. 당시 ‘하루’라고 래브라도 종 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혼자 기도하러 오르내리는 그 시간에 정말 하루 덕을 많이 봤지요. 제가 산 위에서 기도할 때는 하루가 조용히 앉아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펜들힐에 남아 있던 두 딸이 철원으로 오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하루 때문에 왔어요.”

― 두 따님뿐 아니라, 사모님은 “철원으로 가겠다”는 목사님 얘기에 처음엔 무지 황당해했다던데 가족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나.
당연히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척후병처럼 생면부지의 이 땅에 1년 정도 먼저 들어와서 살았다. 거처도 마련해야 했으니까. 그러고 나서 아내도 결정을 했다. 그런데 당시 초등 5, 6학년이던 두 딸아이가 미국 학교가 좋았던 모양이다. 처음엔 영어 때문에 힘들어했는데, 1년 정도 있으니 적응되어서 거기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화상통화 하는데 ‘우린 여기 있음 안 되냐’고 사정사정하더라. 그런데 엄마가 ‘안 된다’고,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얘기하니까 자기들끼리 상의할 시간을 좀 달라고 하더라. 그러더니 세 가지 조건을 내밀면서, 그걸 들어주면 오겠다는 거였다. 첫째, 개를 키우게 해달라. 둘째, 2층집에 살고 싶다. 셋째, 콩국수 많이 먹게 해달라. 콩국수는 둘째의 요청이었는데 별 문제가 없었고, 2층집은 미국 친구들 집에 놀러가 보고 좋았던 경험에서 나온 얘기였는데, 서울에서야 불가능하겠지만 철원에서는 가능할 거 같았다. 문제는 개였는데,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마을주민들과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는데 한 분이 자기집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한 마리 주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강아지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는데, 그 강아지를 보려고 날짜를 앞당겨 들어왔다. 아빠 때문에 온 게 아니었다.(웃음) 2012년 7월에 온 가족이 철원에서 재회했다. 강아지는 아이들과 함께 가서 데려왔는데, 아이들이 이름을 ‘하루’라고 지었다.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라는 뜻으로 지었다더라.

   
▲ 수업에 함께 참여중인 정지석 목사 ⓒ복음과상황 오지은

― 처음 철원으로 왔을 때 마을 주민들이 경계하지는 않았나.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2011년 9월에 들어왔는데, 와서 맨 처음 간 곳이 부동산중개소였다. 중개소 사장님이 ‘뭐 하시는 분이냐’ 묻기에 목사라고 하니까, 옆에서 뜨개질 하시던 부인이 감리교회 집사였는데, 철원에는 교회가 너무 많으니까 여기 말고 서울에서 하라고 하시더라. 당시 나는 교회 한다는 생각은 없었고, 기도는 해야 하니까 수도원 형태를 생각하고 있었다. 수도원에서 대학이 시작된 과거 역사를 생각해봐도 평화학교와 연결성이 있고, 또 교회와 달리 목회 부담도 없고. 설령 교회를 개척하더라도 이 지역교회 다니시는 분은 절대 우리 교회 못오게 한다 했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그게 원칙이 되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2012년 1월에는 펜들힐에서 만난 은퇴 교수님 한 분과 새길교회 교역자로 일할 당시 전도사였던 자매가 합류하여 셋이 한 팀이 되어 방 세 개짜리 아파트 얻어서 지냈다. 캐더린 교수님은 자기가 도울 일 없냐기에, 시골에서 영어 가르쳐주면 좋겠다 했더니 곧장 달려오셨다. 주민들이 볼 때 굉장히 이상한 조합이지 않겠나. 머리 허연 외국인 할머니에 개량 한복 입은 젊은 여성, 거기다 멀끔하게 생긴 중년 남성.(웃음) 목사라고는 하는데 교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먹고 사는지도 의문이고. 나중에 들으니, 주변 교회에서 우리를 통일교 사람들이라고 했다더라. ‘평화’ 이야기를 자주 하고 외국인도 껴 있고 하니까. 나중에 지역교회 가서 설교할 기회가 있어서 그런 얘기를 했다. “‘평화’를 말하면 통일교냐? 이건 너무 이상하다. 왜 평화가 통일교의 것이 되었나? 평화는 우리 예수님의 제자나 교회가 당연히 앞장 서서 실천할 일인데, 어쩌다 ‘평화’를 말하면 통일교라고 하고 또 평화가 통일교의 상징이 되었나? 이건 정말 우리가 반성해야 할 일이 아닌가?”

   
▲ ⓒ복음과상황 오지은


# 04. 노동당사를 지나며

차량이 검문소를 빠져 나오자 왼편으로 노동당사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들를 곳이 더 남았기에 눈으로만 일별하고 지나쳤다. 노동당사가 검문 없이 민간인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지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 노동당사가 원래 이렇게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나.
원래는 민통선이 남방한계선 15킬로미터까지여서 노동당사가 민통선 안에 있었다. 방금 지나온 검문소가 노동당사 지나서 저 아래에 설치돼 있었던 거다. 지금은 민통선이 남방한계선에서 7킬로미터로 줄어들었다. 이곳 농민들이 밤낮없이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민통선 출입 제한으로 어려움이 많다며 국방부에 줄기차게 민원을 넣었다고 들었다. 검문소가 2킬로미터 더 올라갈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

― 지인들에게 철원 생활을 나누는 편지글(<철원 편지>)에서 “철원이 평화로우면 한반도는 평화로울 것”이라고 한 대목이 인상 깊었다. 요즘 철원에서 바라보는 남북 관계나 한반도 상황은 어떤가. 
여기서는 남북 관계, 통일 문제가 많이 다르게 보인다. 서울에서 볼 때 ‘통일은 물 건너갔다’는 얘기들을 하지 않나. 그런데 분단 철책이 가까운 여기서는 오히려 진척이 되고 있다. 사람도 안 사는 곳에 왜 철도를 놓겠나. 그것도 수백 수천 억씩 들여서. 터널까지 뚫어가며 신탄리역에서 백마고지역까지 경원선을 왜 연장해놓겠는가. 서울에서 말하는 통일론은 서울-평양-베이징-워싱턴의 정치 담화를 가지고 상업적인 미디어들이 앞다퉈 전쟁 보도를 하면서 보통 시민들의 의식과는 멀어진다. 남북 관계가 잘되는 건 상업 언론들이 안 좋아하는 것 같다. 뭔가 위기 소식들을 보도해야 주목을 받기 때문인데, 매체들이 거기에 경도되어 있다. 여기서는 계속 철도가 연결되고 공사가 진척되고 있다. 오히려 분단 접경지에서는 해빙 분위기를 감지하는 상황인데, 언론보도에는 위기나 긴장관계 관련 보도가 많이 나오니까 시민들의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 ⓒ복음과상황 오지은


# 05. 소이산 평화기도순례길

소이산 입구에 내리자, 인적이 드물어 보였다. 정 목사는 평화학교의 평화기도순례를 설명하면서 똑같이 해보자고 제안했다.

“소이산에 올라갈 때까지 모두 침묵합니다. 침묵으로 걸어올라가서 북녘땅을 바라보며 각자 침묵기도를 드리고 나면 내려갈 때는 자유롭게 노래하거나 대화하면서 내려가지요. 학교를 방문하신 분들과 함께 오기도 하는데, 지난 월요일에는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 중부노회에서 목회자 32명이 와서 여기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일행은 모두 침묵 가운데 산길을 올랐고 산 정상에 오른 뒤에야 인터뷰는 다시 이어졌다.

 

― <철원 편지>에서 “기도는 투쟁이다”라는 구절과 함께, 침묵기도 중에 “염려하지 말라. 평안하라. 여기서 보내는 네 시간이 복될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내용이 인상 깊었다.
철원으로 들어온 이래 내게 가장 큰 영적 파워를 안겨주는 곳이 바로 여기다. 내게 늘 새 힘을 주는 이 소이산 기도길이 결국 내 철원 삶의 핵심이다. 2011년 11월에 이 산을 처음 알았는데, 그때가 민간인에게 산을 첫 개방한 날이었다. 여기가 원래는 미군기지였다. 미군 막사 건물이 아직 남아 있는데, 지하에는 벙커가 있다고 들었다. 산 저쪽 사면에는 지뢰가 깔려 있어서 들어갈 수 없다. 미군이 철수한 후 한국군이 한 5년 주둔했던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산 정상에 데크를 설치한 것도 재작년(2014년) 가을 일이다. 이 산을 개방하는 날 나도 주민들 따라서 기념식에 참석했는데, 그때 마음을 정했다. 매일 올라오기로. 처음엔 혼자 기도하러 올라왔고, 이듬해 1월에 캐더린 교수와 전도사가 합류해서 함께 올라와서 기도했다. 그때 캐더린 교수가 이곳을 정말 좋아했다. 미국으로 돌아갈 때, 이 산 덕분에 자기 건강이 좋아졌다고 말하더라.

― 학교를 준비하고 시작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혼자 시작하셨나.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년간은 커리큘럼을 비롯한 콘텐츠를 만드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피스메이커를 키워야 하는데, 피스메이커의 정의부터 시작해서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훈련을 받아서 어떤 일을 할지를 커리큘럼에 담아내야 했다. 그렇게 콘텐츠가 웬만큼 갖춰지고 나서 2016년부터는 학교의 공간을 갖추는 일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지금 쓰는 건물은 강원도청 소유여서 빌려 쓰는 것이다. 지난해 가을에 월하리에 학교 지을 땅 1천 평을 빚을 내서 마련했다.

사실은 이게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을 내가 하고 있는 거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면 그렇다. 머리를 싸매고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준비해도 어려운 일일 텐데, 아마 그랬으면 아직까지도 학교 어떻게 만들지 서울에서 회의만 하고 있을 거다. 하나님 뜻은 그게 아니었다. 일단 혼자 들어가서 부딪치면서 하라는 거였다. 초기에 여기서 ‘최소한 5천 평 정도의 땅을 찾는다’면서 돌아다녔더니, 내가 서울의 큰손으로 소문이 나서 연락이 많이 왔다.(웃음) 한동안 여기저기서 땅 있다는 전화가 몰려오더니 나중에는 저 사람 별 거 없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전화가 뚝 끊기더라.(웃음)  



2013년에 학교를 개교할 때, 강원도와 철원군이 나서서 직접 플래카드를 붙여주었다. 강원도 소유의 건물을 사용하니까 도청과 군청이 나섰는데, “축 국경선평화학교 개교”라고 작은 마을에 10개 정도 붙였다. 도에서 관심 갖고 나서지, 조사해보니까 영국에서 학위도 했지, 거기다 개교식에 500여 명이 몰려오고 하니까 뭐가 있나 보다 해서 군청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줬다. 물론 이런저런 오해를 받기도 했다. 국경선평화학교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나를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도청에 민원을 넣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군인으로 은퇴한 분이었다. 그 즈음 전혀 예기치 않게 <조선일보>에서 나를 취재해서 기사가 크게 난 일이 있었는데, 그 기사가 오해와 민원에서 날 살렸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내가 자주 ‘모든 게 하나님 뜻이다’ 하니까, 친구들이 ‘정 목사가 이제 부흥사가 되었네’ 하더라.(웃음) 난 사실이 그러니까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 다른 것도 아니고 ‘사상 문제’ 관련 민원에서 <조선일보> 기사가 구해줬다는 게 의외다.
NCCK의 언론 분야 담당이던 황필규 목사가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가 취재하고 싶어한다면서 만나보라고 권하더라. 그런데 내가 취재 자체를 좀 꺼렸다. 그때는 학교를 시작하기 전이라 비전만 있지 달리 내세울 게 없기도 했고, 또 앞으로 우리 학교가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도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어서 세상 언론에 섣불리 나가는 일이 꺼려졌고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계속 전화가 왔다. 기자가 좋은 사람이니 만나보라고 황 목사가 자꾸 얘기했고, 이태훈 기자는 취재 목적만이 아니라 영국 유학을 준비중인데 개인적인 조언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만났는데, 좋은 사람이더라. 함께 소이산도 올라왔는데, 날 만나고 돌아가면서 아무래도 자기가 기사를 써야 할 것 같다면서 결국 취재도 해갔다. 취재는 해놓고 기사로 안 낼 수도 있다면서 돌아가더니 아무래도 기사로 내야겠다고 연락이 왔다. 어떻게 하나 싶어서 그 문제를 놓고 이곳(소이산)에서 기도하는데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이 무슨 잘못이라도 있기에 그렇게 자꾸 숨기려 하느냐? 이 일은 내가 하는 일이니, 너는 믿음 지키면서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라’ 하시더라. 그래서 결국 기사화에 동의한 뒤 <조선일보>에 보도가 나왔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개교 때 플래카드가 나붙자 마을 사람 중에 그런 민원을 넣은 거였다. 학교가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건 이랬다. 첫째, 학교 이름에 ‘국경선’이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이냐, 헌법 제3조를 어긴 거 아니냐. 헌법 3조는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 섬으로 한다”는 영토 조항인데, 38선을 국경선이라고 하는 건 북한을 인정하는 것이고 결국 종북좌파 아니냐는 얘기였다. 둘째, 이렇게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에게 왜 국가가 공공건물을 빌려주느냐. 셋째, 학교를 창립하는 사람이 기독교 목사인데, 특정 종교에 공공건물을 빌려주면 되느냐. 이 세 가지 문제제기로 군청에 민원을 넣었다는 건데, 민원이 들어오면 공무원은 반드시 답변을 해야 한다더라. 그래서 내가 우리 학교 1기생으로 들어온 학생 중에 그 마을 유치원 원장 하시는 분이 있어서 ‘이런 분이 민원을 제기했는데 혹시 아시냐’ 물었다. 그랬더니 ‘박정희장군동상건립운동 하는 지역 보수단체 총무를 맡고 있는 아는 사람’이라면서 그 단체 회장을 만나도록 주선해주었다. 회장이 철원군청 공무원으로 은퇴하신 분이었다. 여차저차 차분하게 설명을 드렸고, 마침 같이 간 그 원장님이 ‘조선일보도 이 학교를 이렇게 훌륭하다고 하지 않았냐’ 하면서 <조선일보> 기사를 보여드리니까, 이분이 그 기사를 가만히 보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다들 시골을 떠나는데 이렇게 찾아와서 철원을 위해 일해주니 오히려 고맙다’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랬다. “아니 간첩이면 뭐하러 철원까지 와, 서울에 있어야지?”(웃음) <조선일보>가 뭐가 아쉬워서 기어이 찾아와서 우리 학교 기사를 잘 소개해줬나 했더니, 이런 일을 해결하는 데 쓰임받게 하신 하나님 뜻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 학교명은 펜들힐에 있을 때 미리 지어놓은 것인가.
그렇다. 나는 여기를 보더(border), 곧 국경으로 봤다. 국경 문제는 전 세계적 갈등의 주 요인이고, 현대 평화학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다. 그래서 나도 이곳을 국경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 찾아보고 오래 고민했다. 어느 토론회에서도 한 얘기지만, 북한이 유엔회원국인데 이는 남북이 유엔 동시가입할 때 대통령과 국민들이 모두 동의한 거 아닌가. 문제가 된다면 그때 문제제기했어야지 지금 나한테 시비할 일이 아닌 거다. 그리고 북한이 아무리 밉다 해도 국제법상 유엔 가입국이고 엄연히 헌법을 가진 국가다. 이런 국제 정치 현실을 인정할 때 남북 평화통일의 실마리가 풀릴 수 있지 않겠냐는 거다.

작년에 독일 방문했을 때 정말 놀랐던 게, 동서독 분단 시절 서독은 헌법을 만들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헌법은 통일 이후에 ‘온전한 독일’이 되었을 때 제정하기로 하고 기본법을 쓰고 있었다.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 회고록을 읽는데, 변호사 출신인 그가 ‘분단된 임시국가 상태에서는 헌법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 우리는 아직 분단이 된 임시국가다’라고 썼더라.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가 1948년에 건국했다고 하는 주장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헌법 3조를 보면 앞서 얘기한 그 보수단체 총무가 문제제기한 영토 조항이 있다. 북한 헌법은 영토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찾아봤는데, 내가 찾지 못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영토 조항이 없더라. 그 뒤부터 여기 찾아오는 법학 교수나 국회의원들에게 그 얘기를 하니 ‘성문법을 가진 나라들은 대부분 영토 조항을 헌법에 두지 않는다’는 거였다. 영토라는 건 확장될 수도 있어서 헌법상에 문구로 정해놓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우리 헌법에 영토 조항을 넣은 건, 북한을 의식한 ‘정당성 확보라는 명분’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헌법 3조는 헌법 4조의 평화통일 조항과 충돌한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주간조선>이 그 논쟁을 이미 한번 했더라. 헌법 제3조에는 영토가 이미 북쪽 땅까지 확정되어 있으니 제4조의 평화통일 조항과는 충돌이 되어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여러 헌법학자들도 개정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게 이념 문제와 연결될 수 있어서 누구도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안 한다.

# 06. 월하리 평화학교 부지

소이산에서 내려와 도착한 곳은 월하리,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장수였을 때 살았던 역사적인 마을이다. 이 마을 들머리에 국경선평화학교의 독립적인 터전이 될 부지를 대출을 받아 구입했다. 정 목사는 잡풀로 뒤덮인 이 터 위에 교사(校舍)와 기숙사, 카페 공간을 지어서 학생과 스태프를 포함하여 50명 정도가 함께할 작은 평화교육공동체의 그림을 가슴으로 그리고 있다.

― 여기에 학교와 부속공간까지 지으려면 아무래도 후원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
그동안 경험한 바로는, 걱정하지 말고 그냥 믿음으로 나가면 된다. 모금할 생각하면, 그런 재주도 없는데 골치만 아프다. 그냥 기도한다. 기도하면 듣게 되는 주님 말씀이 ‘이 일은 내 일이니 너는 염려 말아라’ 하는 거다. 그러니 걱정 안 한다. 그동안 모든 일이 그렇게 되어왔고.

― 학생 모집은 어떻게 하고 있나? 기사 사용 문의 메일을 받고 처음 평화학교의 존재를 알았는데, 홈페이지도 없고 딱히 홍보하는 걸 보지 못했다.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는데, 사실 많이 온다 해도 현재로선 감당이 안 된다. 평생 헌신적으로 남북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일할 동지들을 만나는 건데, 그렇게 대대적으로 알려서 모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6명이 공부한다. ‘중요한 건 헌신된 한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자꾸 듣게 된다. 강원도 측에서 유엔평화대학 설립을 장기계획 중 하나로 갖고 있다면서, 같이하자는 제안도 해왔다. 그들이 필요하다면 협력할 수는 있겠지만, 제도권 대학을 만드는 게 우리 일은 아니다. 평화학교운동은 기본적으로 예수운동이다.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평화운동의 원천으로서 예수운동이다. 앞으로 전체 학생과 스태프를 합쳐서 50명 정도 규모로 해서 자체적으로 지속가능한 작은 평화학교 모델을 만들어가는 게 바람이다. 그래서 이런 작은 씨앗 같은 평화학교가 여러 곳에 떨어지길 소망한다. 앞서 얘기한 남북한 각 10개 마을에 평화학교가 세워지는 꿈을 꾸고 있다. 북녘땅에도 평화학교를 세우라는 메시지는 나의 멘토인 고 오재식 전 월드비전 회장님이 2012년에 여기 오셨을 때 주신 것이다. 당시 북녘땅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는데 그때 그분이 ‘남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일한다면서 남쪽에서만 하면 되느냐’ 하시기에 주저없이 ‘잘 알겠습니다’ 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게, 비전에 따라서 삶의 현실에서 굉장히 큰 차이가 생기는 걸 경험했다.

― ‘큰 차이’라니, 어떤 경험을 말하나.
그 일 이후로 2013년부터 외국인들이 우리 학교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교단 총회 관련하여 독일, 체코, 프랑스 등 여러 나라의 교회 지도자들이 와서 얘기를 듣고는, 뭘 도와주면 좋겠는지, 재정 상황은 어떤지 물어오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다. “재정보다는 북녘에도 이런 평화학교를 세우려고 하는데, 당신들은 북한과 외교 관계가 있으니까 북한에 직접 들어가서 평화학교를 세우면 좋겠다.”

2014년에는 캐나다에서 한 학기 인턴십을 하러 온 젊은 메노나이트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이 평화단체에서 일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기에 “그럼 형제는 저 북녘땅 평강으로 가서 평화학교를 열어라” 했다. 그러자 자기는 전혀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라며 처음에는 ‘노’ 하더라. 그 부부와 소이산 기도길을 매일 같이 올라갔는데, 한국을 떠나는 날 그가 ‘목사님이 얘기하신 거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북한에 간다 해도 아무런 끈도 없지만, 계속 생각하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 얘기를 들을 땐 정말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장차 어떻게 될지는 우리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게 북녘땅 평화학교에 관한 비전이 없었다면 해외에서 온 방문자들에게 그런 얘길 꺼낼 수나 있었겠나.

   
▲ 국경선평화학교에서 펴낸 평화문고


# 07. 동송마을 카페

정 목사가 살고 있는 동송마을에 도착할 즈음, 어느덧 어둑어둑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카페에 앉았을 때는 취재 시작한 지 이미 5시간째를 넘어서고 있었다.

― 국경선평화학교의 교육 과정과 내용을 소개해달라.
3년간 8개 과정을 배우게 된다. 첫째, ‘평화학’에 대한 사상과 영성을 배우는 코스가 있다. 둘째, ‘평화실천론’ 코스로 유기농법과 건강 관련 수업을 진행한다. 북한의 결핵 인구가 비공식 500만 명일 정도로 건강 상황이 열악하기 때문에, 의사나 간호사가 아니어도 기본적인 건강 센스를 지녀야 북한을 도우면서 평화운동을 할 수 있다. 평화건강학은 아주대 의대 은퇴교수님과 가정의학 전문의인 아내가 가르친다. 셋째, ‘평화구호봉사’를 배우는데, 남북관계가 열려서 구호활동이 본격화되면 평화 관점을 가진 전문 구호활동가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중요한 코스다. 넷째, 남북간 평화 문제는 물론 국제 감각을 지니기 위해 ‘국제평화운동’을 배운다. 다섯째, 남북 문제는 국제 문제이기도 해서 국제기구와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의 ‘영어’ 능력은 갖춰야 한다. 영어는 필수고, 제2외국어도 기초 활용은 할 수 있을 정도로 배워야 한다. 지금은 콩고에서 온 형제가 불어를 가르치는데, 독일어도 가르칠 계획이다. 독일은 디아코니아 운동과 학문이 잘되어 있어서 거기서 3년 공부하면 ‘디아콘’이란 자격을 주는데, 피스메이커의 구호활동(relief work) 수련에 해당한다. 거기에 우리 학생을 보내면 받아준다고 해서 독일어를 하는 게 필요하다. 여섯째, ‘동서양 고전’을 매학기 읽으면서 해당 분야 선생님을 모셔서 공부한다. 피스메이커는 짜여진 매뉴얼대로 하기보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중요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보기에 고전을 읽는다. 일곱째, ‘석학초청특강’을 진행한다. 이론이 아닌 초청 석학의 삶을 통해 평화가 왜 중요한지를 배운다. 지난 학기에는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를 모시고 4박5일간 함께 생활하며 배움의 시간, 삶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까지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길회성 교수 같은 분을 모셨다. 이분들의 특강은 문고본으로 엮어서 출판도 하고 있다. 마지막 여덟째, ‘평화예술과 스포츠’ 코스가 있다. 펜들힐에는 도자기나 종이공예 같은 예술 활동, 창작 활동 교실이 있는데, 평화 영성을 기르는 시간으로 중시한다.

   
▲ 소이산 정상에서 북녘땅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정지석 목사 ⓒ복음과상황 오지은

― 정규 교육 과정 외에 좀더 현장중심적인 프로그램 같은 것도 있나.
시대적인 주요 이슈가 있을 땐 ‘평화 워크숍’을 별도로 진행한다. 체험적인 공부인 ‘평화 순례’는, 국내와 해외로 나누어 도보순례를 떠나는 프로그램이다. 여름학기에는 6·25주간이 끝나면 일주일간 비무장지대 마을 길을 걷는다. 가을학기엔 해외평화순례 시간을 갖는다. 2014년에는 베트남을 찾아가 통일의 역사를 배웠다. 호찌민 정신을 접하고, 통일 이후 베트남 40년 역사에 대해 역사 교수의 강의를 듣고 토론하기도 했다. 2015년엔 독일 통일 25주년을 맞아 베를린과 라이프찌히 등지에서 12일 동안 지내면서 보고 듣고 토론하는 시간을 보냈다. 내년(2017년)에는 인도네시아로 가서 무슬림 세계에서 기독인이 겪는 고통에 대해 듣고 거기서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내는지 배우러 갈 계획이다. 이렇게 해외는 서구권의 갈등-평화 현장과 아시아/아프리카권을 번갈아 찾아간다. 

지난 3년을 통해 새로 추가된 것 중 하나는 ‘개척자를 찾아 배우는 평화여행’이다. 피스메이커가 되려면 개척자적인 헌신된 마음과 새로운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과정은 우리 사회 여러 영역에서 개척자적 삶을 사시는 분을 직접 찾아가서 삶의 스토리를 듣자는 의도로 기획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 개척자를 찾아 가는 과정에서 같이 여행도 하는데, 1학점짜리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녹색당 청년위원장을 만났고, 정농회 창립멤버로 포천에서 생명역동농법을 하고 계시는 김준권 선생님을 만났다. 주변 농부들이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김준권 선생님은 연세가 일흔 정도이신데, 깊은 사상이 담긴 농사철학을 갖고 계시더라. 여수 돌산 오동도에서 페이스북으로 수산물 사업을 하시는 분들을 만나서는 새벽 경매장엘 따라가서 삶의 현장을 보고 오기도 했다. 돌아가신 분을 찾아간 적도 있는데, 목포에 있는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기념관을 방문하여 모두들 감격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 학교 커리큘럼은 1년 2학기제로 운영하는데, 3월에 시작해서 6·25주간까지가 1학기, 9월에 시작해서 12월 둘째주까지가 2학기로, 일반 대학 학기제와 비슷하다. 기숙사 생활하는 학생은 방학 중에는 집으로 간다. 현재 학교 실무자는 나를 포함해서 전영숙 부장과 정보경 간사 모두 셋이다. 평화순례 프로그램을 잘 이끌고 있는 전영숙 부장은 철원에 정착했고, 목회자의 길을 접고 피스메이커가 되겠다고 찾아온 정보경 간사도 결혼하면 여기서 정착할 생각을 하고 있다.

― 학비나 운영비는 어떻게 되나.
학비는 일반대학의 절반 정도이다. 현재 있는 학생들은 전액 장학금이 지급되고 있다. 정기적으로 후원해주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고, 방문자들 중에 후원금을 보내주시는 분들도 있다(후원자는 전영숙 부장이 관리한다). 물론 후원이 많지는 않고, 또 아직까진 적극적으로 권유하지도 않고 있다. 학교 초창기엔 교회에 평화통일운동 차원으로 1년에 1인당 5백만 원의 장학금을 지원해달라고 해서 첫해엔 8명 분의 장학금이 들어왔다. 여기서 나도 개척교회를 하면서 우리 교회도 한 사람의 장학금을 후원했다. 강사로 오시는 분들에겐 대학교 시간강사비 정도 드리고 나는 그냥 하는 거니까 아직은 그닥 많은 돈이 들진 않는다. 그런데 이제는 학교 부지를 사느라 대출 받고 하드웨어 구축하는 데 목돈이 들 것 같다. 걱정해서 될 일은 아니다. 하나님이 계속 하라는 메시지를 주시니까 걱정하지도 않지만. 생계는 의사인 아내가 책임지고 있다.

― 평화학교의 내용과 교육 과정에 목사님이 영국과 미국에서 경험하신 퀘이커 영성이 깔린 것인가.
아무래도 그럴 거다. 퀘이커리즘을 접하고 나서 여기까지 온 거 같다. 퀘이커들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경험한 퀘이커들은 굉장히 조용하면서도 파워풀하다. 좋은 의미에서 상당히 고집쟁이라서 옳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한다. 겉으로 눈에 띄게 드러나진 않으면서도 아주 실천적이다.

― 목사님이 쓰신 《퀘이커리즘으로의 초대》를 읽으면서도 든 생각이지만, 그게 좀 불가사의하다.
퀘이커 신앙은 개인의 영성 체험과 ‘내면의 빛’을 중시하고 강조하던데, 이게 한국교회 상황에서는 대체로 주관적 신비주의 아니면 신앙의 사사화(私事化)와 연결되지 않나. 개인의 영성 체험이 당연히 사회적 영성,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퀘이커 영성에 대해 읽으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더라.

내 체험으로는 두 가지는 반드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안 되는 게 문제인 거다. 사회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혼자 신비주의에 들어가 있는 건 온전하지 않고 잘못 가는 거다. 위험한 말일 수 있지만, 우리가 상당히 ‘신학적 신앙’(theological faith)에 치우쳐 있다. 퀘이커들은 단순하다. 신학적 사고보다는 직접 하나님과 만나는 체험에 집중한다. 그들의 표현 중에 ‘direct meeting’(직접 만남), ‘dierct experience’(직접 체험)가 있는데, 그 내용이 바로 듣는 거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 말씀, 음성이 들리기를 기다린다. 이게 굉장히 파워풀한데 체험 세계에선 그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직접 만나는 체험은 각자 개인이 하는 거고, 하나님을 만나서 음성을 들으면 그 음성은 반드시 사회와 따로 동떨어져서 고립될 수가 없다. 하나님 말씀을 들은 걸 진리라고 하지 않나. 그러면 그걸 실천해야 하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지 않겠나. 그건 반드시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면, 사회 불의를 절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사회적 어려움과 불의와 비평화와 폭력을 외면하고 혼자만 따로 살아간다는 건 있을 수가 없다. 나도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위험한 말일 수 있지만, ‘신학’으로는 그게 가능해진다. 이건 이런 이유로 되지만, 저건 저런 이유로 안 된다는 식이다. 본회퍼 신학도 사실상 ‘직접 체험’이다. 그가 감옥에서 하나님과 직접 만났지 누구를 통해서 만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영적 파워가 나오는 거다. 그리고 그들(퀘이커들)도 분별 과정을 갖지만, 자기가 하나님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이상 누가 그 의지를 꺾을 수 있겠나.

― 하나님 음성을 들었을 경우, 그걸 공동체 내에서 검증하는 과정이 있나. 이단의 경우, 자기가 직접 계시를 받았다, 직접 체험을 했다고들 하지 않나.
그건 다 가짜라고 본다. 퀘이커에서는 남의 체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는 안 한다.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서 어떻게 한다고 하면 이래라 저래라 하지도 않는다. 퀘이커들은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영적 체험이 어떤 것이든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공동체적 영성이라 한다. 반드시 소속된 커뮤니티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워드 브린튼이라는 20세기 퀘이커의 성자가 있다.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기도 한 그가, “퀘이커의 영성이란 윤리성을 가진 신비주의(ethical mysticism)다”라는 말을 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을 만났다면서 혼자 제멋대로 하고 자기 욕심 챙기고 혼자 고상한 척하면 그건 그냥 영성이고, 퀘이커 영성은 사회 정의와 개혁운동에 참여하는 ‘책임적 영성’이라는 얘기다. 그 영성이 있기 때문에 사회적 행동에 과감할 수 있는 거다. 이런 퀘이커의 가르침과 영성이 한국 사회에 굉장히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에서 신앙체험 했다는 사람은 대부분 성속 분리를 말하고 교회를 게토로 만들면서 순수신앙, 순수복음이란 말을 강조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과 이어진 거라면 예수처럼 되어야지, 예수가 언제 혼자 자기만의 성을 쌓고 살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사회 정의, 사회 개혁에 실천적인 참여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다른 한 편으로, 사회운동주의로 가 있는 소위 진보적 기독교인이 있는데(나도 그쪽이었고), 하다 보면 내가 왜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까지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동력이 떨어지고, 가다 보면 아무도 없이 혼자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사회 정의와 평화에 관한 일을 하면서 점점 고갈되고 의미를 잃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허탈감에 빠지는 거다. 그런 일을 의무감이 아니라 풍요롭고 시종일관 기쁘게 하려면 개인의 영적 체험을 통한 영적 파워가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해갈이 안 된다. 사회적 행동주의는 거칠어지고 사나워지기 마련인데, 예수의 영성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결국 사람이 메마를 수밖에 없다. 퀘이커들은 엄청난 사회적 행동을 하더라도 유명세를 따라가고 그런 게 전혀 없다. 개인의 영적 체험을 통해 평범하게 생활한다.

― 사회적 행동과 연결되는 영적 체험이라 함은 결국 특별한 순간이 아닌 매일의 영적 체험을 의미하는 건가.
그렇다. 사회 운동을 하는 건 영적 체험을 하는 좋은 자리다. 그 일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내적 체험을 크게 누릴 기회이기도 하다. 평화학교를 꾸려가는 내 행동이나 실천이 대단하다고 생각지 않는데, 이 일은 내가 기쁘니까 하는 거지 의무로는 못할 거 같다. 친구들이 하는 얘기가 ‘정 목사 언제 그만 두고 나오나’ 하고 기다린다고 한다. 그런데 작년에 집을 사서 마침내 딸들에게 ‘이층집 약속’을 지켰다. 그 소식 듣고 친구들이 ‘너 철원에서 진짜 계속 있을 거냐’ 묻더라. 내가 서울에서 목회를 할 땐, 이상하게 스스로 매일매일 소진되는 걸 느꼈다. 교회에서는 굉장히 잘해주시는데도, 집에 돌아갈 때마다 ‘오늘 하루도 깨졌구나’ 허망해지면서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 싶었다. 그 전에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이야 계속 있었다. 그런데 ‘50’이라는 숫자(나이)가 주는 도전이 오더라. 이렇게 계속 살다가 끝나는 건가, 실존적인 물음 앞에서 결국 다른 길을 찾은 거다. 그 길이 엉뚱하게 철원으로 이어졌지만. 여기 온 뒤로는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어느 새 6년째인데, 여전히 좋다. 친구들 보고 빨리 이리 오라고 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친구도 있고 지방에서 목회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특히 서울에서 대학교수하는 친구들 보면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 2013년 4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북한의 문은 머지않아 열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이후”라고 했는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현재의 남북 대치와 한반도 신냉전 상황에서도 같은 생각인가.
지금도 변함 없는 생각이다. 소이산 정상에 오를 때마다 드는 생각이 ‘그 시기가 곧 올 텐데 준비해야 한다’는 거다. 합리적으로 따져보면, ‘하나님 지금은 아닙니다’ 한다. 왜냐면 지금 남북이 하나 되는 과정으로 들어가기엔 서로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엄청난 혼란과 감당 못할 상황이 올 것 같다. 차라리 나쁘더라도 아직은 분단 상황이 낫다. 그래서 하나님께 지금 당장은 안 된다고, 시간을 달라고 기도한다. 우리가 준비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우리 사회의 평화적 개혁이 필수적이다. 그 개혁을 어떻게 이루어 가야 하는가 하는 점은 서울에 있을 때보다 철원에서 훨씬 실감나게 보인다. 그 일을 위한 주도세력, 희망 파워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거니까 결국 보이는 게 교회더라. 철원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리 세상이 ‘개독교’라고 해도 그래도 교회밖에 없더라.

분단 철책이 열리는 날이 곧 온다는 건 변함없는 생각이지만, 하나님의 시간에서 ‘곧’이라는 게 어떤 의미일지, 어떤 방식일지를 생각한다. 그에 대해선 물론 나름의 생각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민족의 거대한 변화를 시작하셨다는 거다. 북한이 곧 열리는 건 분명한 진실인데, 우리가 절실한 마음을 갖고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변화를 준비할지 시급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사회가 놓치고 있다. 그 때를 염두에 두고 우리 모두 각성하고 깨어야 하는데 잘 모르는 거 같아 걱정이다. 

― 개개인이 그 준비를 어떻게 할 수 있나.
학교를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우리 민족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을 회복하자고 호소한다. 방문 후 돌아가서 삶의 자리에서, 교회 공동체에서 기도할 때 이 민족 공동체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한다. 그게 시작이다.

― 교회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은 없나.
거기까지는 내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어쨌든 사회과학적으로나 논리적인 근거는 없지만, 나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다는 믿음, 그래서 남북이 상호 파멸이나 전쟁으로는 안 갈 거라는 확신이 있다. 여러 소문들이 돌아다니지만, 두렵거나 걱정되기보단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긍정적인 일을 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나가야 한다고 말할 주제도 안 되는 거 같아서 여기서 내가 할 일에 집중하고 있다.

― 《퀘이커리즘으로의 초대》에서 ‘한국에는 공동체형 성인교육 기관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국경선평화학교가 그 연장선에서 나온 결과물인가.
그렇다. 내가 말하는 공동체형 성인교육기관의 모델은 ‘펜들힐 영성평화학교’다. 물론 우리 교육의 목표는 학위가 아니라 사회 공동체를 위해 선한 영향력을 드러낼 인재 집단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지식 중심의 교육 커리큘럼이 아니고 같이 모여서 삶을 나누면서 공부하는 그런 교육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 학교의 세 가지 정신은 공부하고 기도하고 노동하는 건데, 이게 온전히 이뤄지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생각한다.

― 현재 학교를 운영하면서 목회를 병행하시는데, 힘들지는 않나.
계획엔 없었는데 결국 하나님의 뜻은 목회에 있는 거 같다. 내 계획과 다르게 나타났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목회가 평화학교를 꾸려나가는 기본이 되더라. 그래서 또다시,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2011년 3월 1일에 교회를 개척하게 하셨고, 교단 등록까지 했는데 그 뒤로 우선 나부터가 달라졌다. 두세 명이 모여도 매주 일요일은 예배를 드리게 되니 생활의 중심이 잡히기 시작했다. 안 그랬으면 이 교회 저 교회 오라고 하는 데마다 불려다니느라 바빴을 거 같다. 또 목회를 하는 게 마을에서 내가 목사로 인정받는 동시에 평화학교운동이 이념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중요한 요소다. 마을이 좁아서 금세 소문이 퍼지는데, 두 명이든 세 명이든 매주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한다는 걸 만나는 분들도 다 안다. 근데 내가 주일마다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면 마을 사람들에겐 이상한 건달로 비춰졌을 거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곳이 내 목회 처소니까 철원에 더 안착하게 되는 게 나 스스로도 그렇고 주변인들이 음으로 양으로 나를 그렇게 평가해준다. 그러니 이게 하나님 계획 아니겠나. 내가 이곳에서 개척 교회를 하지 않고 마을과 상관없이 학교를 운영했으면 잘 안 됐을 거다. 내가 씨앗을 뿌리는 터전인 철원에 더 애착을 갖게 되고 마을 사람들 만나는 태도가 달라진 걸 보면, 개척 교회 한 건 엄청나게 좋은 시작이 된 거다.

― 앞서 목사님은 6년째인데도 여전히 기쁘다 하셨는데, 지금 청소년기의 두 따님은 이곳 생활을 힘들어하지 않나.
나보다 철원을 더 좋아한다. 너무 좋아해서 오히려 걱정이다. 서울은 절대 안 갈 거라고, 서약서까지 쓰겠다고 하더라. 처음에 여기 동성초등학교에 5학년, 6학년으로 왔는데, 학교 가기 전날 저녁엔 긴장하더니 다음날 선생님이 따뜻하게 이름을 부르니까 금세 긴장 풀고 손잡고 들어갔다. 교대 막 졸업한, 교육에 열정이 있고 참신한 선생님들이 철원으로 오시는데 애들이 선생님들을 너무 좋아하고 학교를 정말 좋아한다. 가끔 서울 가면 빨리 철원 가자고 한다. 복잡하고 정신없고 매연 때문에 싫다는 거다. 초등학생 있는 부모에게는 자녀를 위해서라도 이리 이사 오라고 권한다. 교육이 질이 정말 높고, 자연환경도 좋고, 무엇보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애정이 있다. 예전에 용인에 살았을 때 아이들 개학식에 가서 뵌 40대 후반 선생님들은 얼굴에 권태가 느껴지더라. 애들 걱정 전혀 없다.

― 요즘 소이산 침묵기도 중에 듣게 되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나.
가서 앉아 있으면 지금도 ‘꾸준히 네 할 일을 하라’는 말씀과 함께, ‘사랑하라, 누구든지, 언제든지’라는 음성을 계속 듣는다. 재작년에는 청소년에 대한 메시지가 자꾸 들려와서 우리 스태프들과 얘기해 보니 자기들도 기도 중에 그런 메시지를 듣는다고 했다. 그게 우리가 청소년 평화교육프로그램을 시작한 계기였다. 현재 1년에 1만 명의 청소년을 DMZ에 데려 와서 분단 현실을 눈으로 보고 경험하고 배우는 현장평화통일 교육을 한다는 비전을 갖고 진행중이다. 한 달에 천 명 정도는 커버할 수 있으니까 열 달이면 만 명 정도는 가능하다. 경기도와 서울, 강원도까지 합하면 세 지역에 150만 명의 청소년이 있다. 장기적으로 DMZ마을 열 곳에 평화학교가 세워져 같이 움직이면 상당수 청소년 평화통일 교육을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기도하는 중이다. 이걸 두 가지 콘셉트로 계획중인데, 하나는 교회 청소년 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 청소년 대상이다. 작년 여름에 강원도 교육청 기획관과 장학관들을 만난 자리에서 1박, 2박 프로그램을 보여줘서 호응을 얻었다. 이 일을 위해 통일부에 법인 신청을 했고, 지난 12월 초순에 통일교육기관으로 사단법인 승인을 받았다. 강원도도 청소년이 30만 여명인데, 우선 만 명을 대상으로 내년(2017년)에 프로그램을 해보려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평화통일운동은 단순히 프로그램 운영하는 걸 넘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100년의 평화 계획’이 되어야 한다. 그 100년의 평화 계획을 세우고 현재 5년째 일을 해왔다. 지난 번 독일 갔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 ‘100년 평화 계획’을 얘기하니 다들 놀라워하고 수긍하더라. 우리 세대가 사는 동안 하고 가면, 우리 자녀세대, 그 다음 세대들이 이어갈 수 있게 하자는 구상인데, 이를 날마다 주님이 격려해주시는 음성을 듣는다. 


# 08. 에필로그

때마침 수업을 마치고 아빠를 찾아온 큰딸 세온 양(17)에게 “학교 어때요?” 하고 물으니, 기다렸다는 듯 “좋아요. 재밌어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곧이어 전옥희 사모(57)도 퇴근을 하고 자리를 함께해서 자연스레 ‘철원행 결정’에 대한 지난 이야기를 물었다.

― 누구라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결정하시게 되었나.
당시 남편이 철원으로 가겠다는 신앙적 결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니까 내가 가타부타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그래서 ‘그럼 가야지요’ 했지만, 사실 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게다가 애들이 이제 언어 익히면서 적응하는데, 다 정리하고 들어가자니 여러 면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남편은 마음이 뜨거워져서 한시라도 여기(미국)서 더 낭비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 결국 남편에게 먼저 들어가서 지낼 만한 곳인지 살펴보고 살 곳도 찾아보라고 하고, 애들 하고 나는 미국에 남아서 1년 정도 더 생활하기로 했다. 인터넷 스카이프로 연락하는데 남편이 너무 재밌게 잘 지내더라. 그래서 남편 걱정은 크게 안 했는데, 난 1년 내내 고민을 했다. 아무래도 안정되고 익숙한 곳으로 가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나.

결혼을 늦게 해서 40대 초반에 첫 애를 낳았는데, 애들이 자라다 보니 교육이 가족의 터전을 옮기는 데 가장 큰 요소가 되더라. 그러니 오지처럼 여겨지는 곳에 가서 어떻게 애들을 교육시키고 키울까 싶고, 나도 거기 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쉽지 않았지만 철원으로 가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교육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지식 취득’이 교육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교육 때문이라면, 미성년일 땐 부모랑 같이 사는 게 좋고 그게 또 가장 기본적인 교육 아닐까 하는 생각. 애들이 미국에 친척도 있고 하니까 그냥 미국에 두고 올 수도 있지만, 결국은 가장 기본은 부모와 자녀가 한 가족으로 함께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원하면 두고 오려고 했는데 감히 엄마랑 떨어질 생각을 못하더라. 학교도 좋고 미국에 있고도 싶은데 엄마 없인 싫다고. 그런데 엄마는 가야겠다고, 아빠랑 떨어져선 못 산다고 하니까 아이들이 ‘세 가지 조건’을 아빠에게 제시해서 들어오게 되었다.

남편이 전세로 얻은 집에 짐을 미리 보내놓고 귀국을 했는데, 원래는 철원에 잠시 들른 뒤 친정에서 좀 지내다 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보낸 짐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걸 보고는 그대로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휴직계를 냈던 용인의 병원에는 사직을 하고 직장 문제를 고민하는데, 이곳에 병원이 있을 거 같지도 않고 개업 자체도 어려운 일이었다. 모든 건 하나님이 하신다고 한 남편 말 따라 일단 왔는데, 내가 철원 오기 딱 1년 전에 오픈한 요양병원에서 의사를 찾고 있었다. 기대도 안 했는데 거기서 일하게 되었다. 게다가 병원이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다. 지금까지 다닌 직장 가운데 가장 가까운 거리다. 이런 걸 보니까, ‘순종 하면 다 예비해 주신다’ 한 남편 얘기가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는 도시보단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없고 마음이 편하다. 도시생활을 하다 보면 모든 게 비교를 하게 되고 욕심을 부리게 되지 않나. 여기선 욕심을 별로 안 부리니까, 너무 여유로워서 게으른 느낌이 들 정도다. 아내 입장, 엄마 입장에서는 남편이 이곳에서 행복해하고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니까 나도 좋고 감사할 뿐이다. 
 

■ 국경선평화학교 입학 및 후원 문의 : 033-91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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