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호 표지]

“종종 기독교인들은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성적 지향성에 더 큰 가치를 두는 것 같아요. 어쨌든, 만약 어떤 사람이 교인이 되어 성찬에 참여하길 원한다면, 그들이 거절당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에 다니는 10대 청소년 허린 씨의 셀프 인터뷰 내용 일부입니다(“성찬의 ‘논쟁’보다 ‘아름다움’을 가르쳐주세요”_46쪽). 그는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지 않으냐는 견해에 다시 물음으로 답한 셈입니다.

“교회에서 누군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더 불경건한 것”이라는 이 열여덟 살 그리스도인의 말에 이르러 저는 문득 부끄러워졌습니다. 매월 한 차례 이른 바 ‘성찬위원’으로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교회 공동체에서 성찬의 전례가 지니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공부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저 예배 중에 때때로 치르는 경건한 전통 의식 정도로 여기는 수준밖에 안 됐던 거지요.

“이것은 형제를 위해 찢기신 주님의 몸입니다.” “이것은 자매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입니다.” 교우들에게 떡과 포도주와 함께 전하던 이 말은 과연 말하는 이와 듣는 이에게 얼마나 공명이 되었을까요?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전례인 성찬을 지키고 행하는 일에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왔는지 스스로 돌아봅니다.

루터 신학 전문가인 최주훈 중앙루터교회 담임목사는 ‘루터는 복음 선포와 성례전 두 가지를 올바르게 행하는 성도의 모임을 교회로 정의한다’고 강조합니다.(“루터 신학 전문가에게 듣는 종교개혁 이후의 성찬”_26쪽) 그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이번 커버스토리는 루터교, 메노나이트, 정교회 등 다른 교파의 성찬 신학을 담아보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매월 성찬에 참여해왔으면서도 정작 성찬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저 자신부터 성찬에 대해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시, 첫 머리에 언급한 허린 씨의 물음으로 글을 맺으려 합니다.

“성찬에 대한 논쟁이 아닌 의미 있는 전례를 통해 우리가 진정한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과 함께 친교를 누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게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 아닌가요?”(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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