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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와 ‘죽음 되찾기’
[337호 브루더호프 통신]
[337호] 2018년 11월 28일 (수) 14:43:58 루벤 짐머만 goscon@goscon.co.kr
   
▲ 글쓴이와 아내 마그릿(2015년).

2017년 5월 25일자 <뉴욕타임스>의 기사에는 아끼는 친구들이 모두 떠난 후, 의사의 도움을 받아 치사 약물을 주입함으로 자신의 장례를 준비한 캐나다에 사는 한 남자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는 잘 쓰였고 매우 확신에 차 있었다.

그 환자는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실 병환으로 지쳐 있었다. 고대 사람들이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던 독수리 깃털도 있고 기도 망또도 있었다. 좋은 음식과 포옹과 눈물도 있었다. 사람들은 초를 켰고 축복의 인사말을 나누는 가운데 죽음을 되찾아오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고 심지어 약물을 주입하는 의사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그가 “내가 생각할 바가 아니다. 이것은 내 직업이고 나는 내 할 바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단호히 주장했지만 말이다.

다른 예도 있다. 오레곤 주에 사는 어떤 노부부는 함께 죽기로 결심했다. 결혼으로 동고동락한 지 66주년이 되었고 그 가운데는 인도로 의료 선교를 다녀온 몇 해도 포함되어 있다. 나이듦과 파킨슨병, 심장질환과 암 같은 여러 질병은 두 사람이 짊어지기엔 너무 버거웠다. 가족들이 비디오로 과정을 기록했고, 그들은 새롭게 죽음의 방식을 개척한 용감한 모범으로 찬양받았다.

그리고 브리타니 메이나드의 경우도 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29세의 이 여성은 수술로 제거할 수 없는 뇌종양이 있었고 조력 자살(assisted-suicide)을 허용하는 법을 제정해 달라고 자신이 속한 주와 다른 주에 청원했다. 메이나드는 여러 잡지와 방송국에서 영웅으로 묘사되었으며, 결국엔 오리건 주로 옮겨와 약물 주입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단지 암이나 신경근육 이상에 의한 장애에 걸린 사람들만이 삶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삶으로부터 소진되는 우울증으로, 또는 일부 유럽에서는 그저 늙었다는 이유로 생을 마감하려 한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도대체 왜?

누가 안락사를 밀어붙이나
의사로서 나는 지난 25년 동안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를 돌보면서, 우리 사회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도록 몰아가는 경향이 있음을 실감했다.

현대 의학이 제공하는 모든 편의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그에 선행하는 고통(이 고통은 때로 수십 년간 지속되기도 한다)은 정복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정복되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비록 소아백혈병 같은 몇몇 질병을 성공적으로 치료하거나 소아마비와 디프테리아를 박멸할 수 있을 지라도 관절염, 심장질환, 요실금, 불면증 같은 여러 질병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단축한다. 이는 멋진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나 돈(치료비)에 대한 걱정을 접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조력 자살에 관한 미국 통계를 보면, 보통 사람들이 독극물을 주입하는 주된 이유가 극심한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사람들은 통제력을 잃을까 무서워한다. 즉 외롭거나 두렵거나 또는 간병인에게 짐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면 단지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다. 그 예로 캘리포니아에서는 죽을 권리에 관한 새로운 법에 의해 안락사를 선택한 사람들이 대부분 고학력의 백인 노인들로서 이미 연명치료나 호스피스 간호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서 치료 비용은 문제되지 않는다. 또한 캐나다의 한 의사는 (그 역시 안락사에 관한 오랜 지지자인데) 안락사를 원하는 많은 환자들이 어떤 특정한 성격 유형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대부분이 의사요 변호사요 회사의 사장이거나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으로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영적인 허전함과 물질주의가 설명하는 현대인의 삶과 궤를 같이하여, 인간의 행복은 유동성, 독립성, 그리고 자기결정성에 근거한다는 믿음이 우리 모두가 도달할 하나의 목표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우리들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우리도 너무나 자주 행복은 불편함과 고통이 없는 상태라는 잘못된 복음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죽음을 조종함으로써 늙음과 질병이라는 결함을 피해가려는 길을 찾기 마련이다.

조력 자살·안락사가 해결책인가
수백 년 동안 인류는 죽음에 맞서 총력을 동원해 싸워왔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무언가 두려움의 대상으로 뒤로 미루고 싶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은 촉진되고 고통과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겨지게 됐다. 그런 변화의 이면에는 현대 의학의 진보, 특별히 생명 연장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죽음은 영원히 뒤로 미루어질 수 있으며, 그와 함께 도덕적 계산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데 있다. 그런 논리라면 환자의 죽음을 막겠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오래된 선서는 오늘날 현실에 맞게 폐기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곡한 표현으로 미화되어 이루어지는 자살이나 안락사가 과연 이 모든 딜레마의 해결책일까? 인간의 몸을 단지 움직이는 세포들의 집합체 이상으로 생각하는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저항해야 한다.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우리의 삶을 육체적 능력이나 불편함의 제거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자아실현을 갈망하며 건강하고 행복할 뿐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살길 소망한다. 그런데 의미 있는 삶이란 보청기나 휠체어 또는 산소통 없이 사는 삶을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의미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만을 위한 삶을 넘어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쏟아 붇는 삶일 것이다.

이는 또한 믿음에 의존한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단지 계몽되지 못한 열정의 부속물 정도로 치부한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이란 믿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며 우리가 이생에서 보거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영역으로 용기 있게 발 디딜 수 있게 해준다. 믿음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 평화는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확신에 이르게 해준다. 죽음의 고통은 주사기로 약물을 주입함으로써 잊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을 겸손히 받아안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 고통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다.

아내의 투병과 죽음 맞이
내 아내 마그릿은 그런 믿음의 본보기였다. 아내는 나이 43세에 소장암을 발견했다. 아내는 더 이상 치료할 없을 때까지 22개월간을 투병했다. 더 이상 치료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 자기 한계 이상의 용기를 갖고 침착하게 죽음을 직시했다.

아내를 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는 자기 생애에 절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였고, 다섯 명의 자녀(열두 살부터 열아홉 살)가 있었다. 그래서 아내는 아이들의 졸업식이나 결혼식을 보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미래의 손주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47살에 홀아비가 될 것에 대해서도 슬퍼했다. 그러나 또한 기쁨과 감사함으로 과거를 돌아보았다. 아내로, 어머니로, 그리고 간호사로 살아온 과거. 아내는 새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지켰으며, 수백 명의 환자들을 간호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을 꽤 오랜 기간에 걸쳐 알게 모르게 돌보았다.

아내는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줄곧 사람들을 섬겨왔고, 오랜 세월에 걸친 섬김은 아내로 하여금 평화롭고 겸손한 성취감 가운데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죽기 몇 주전에 두렵냐고 내가 물었을 때 아내는 “아니요.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데려가실 것이라 믿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2014년 12월, 우리는 은혼식을 축하했다. 이듬해 1월에 아내는 겨우 죽이나 국물을 먹을 수 있었다. 2월에는 겨우 꿀이나 크림을 곁들인 홍차를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3월엔 숨을 거두었다. 의료진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죽기 열흘 동안은 극심한 고통으로 몸서리쳤다. 소장이 막혔으므로 심한 구토를 반복했는데 그 어떤 의료진도 다루기 힘든 최악의 경우였다. 그럼에도 아내는 결코 물러서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화와 사랑의 기운을 발산했고 눈의 광채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까지도 빛났다.

아내는 그녀의 부모, 나의 부모, 그녀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자녀들에 둘러쌓인 가운데 소천했다. 우리는 찬양을 불렀고 함께 기도했으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기도 가운데 그녀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빌었으나 우리들 중 누구도 죽음을 재촉한다거나 우리 힘으로 해결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갓난아이가 태어나길 기쁘게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렸다. 마그릿이 요단강을 건너 다른 세상으로 가는 순간 노래를 부르며 저 편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아내가 굳건한 믿음의 사람임에는 틀림없었으나 그 믿음만으로 고통을 이겨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사랑이야말로 그녀와 우리 가족, 그리고 가장 어려운 순간을 지탱해준 기둥이었다. 아내는 전문의료진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 이상으로 병문안과 기도, 찬양과 예배와 같은 목회적 돌봄을 받았다. 암을 진단받은 순간부터 많은 사람이 아내의 곁을 지켰다. 어린아이들은 꽃을 꺾어 왔고, 알고 지내던 많은 친구들이 찾아와 함께 과거를 회상했으며 얼굴만 겨우 알던 사람들도 음식을 들고 우릴 찾아왔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서둘러 자기 손으로 결정하도록 내몰리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 울타리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1651년 퀘이커 교단의 창시자 조지 폭스는 영국의 종교개혁가 올리버 클롬웰이 보낸 사람들에게 “전쟁의 이유를 제거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우리 역시 자살과 안락사의 이유를 제거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삶은 어떤 삶일까? 자율성과 개인주의를 추앙하는 시대에, 책임이란 말을 조롱하고 자기만족을 숭상하는 이때에 그와 같은 삶을 살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서로의 짐을 져 주라고 부르셨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한 일도 기꺼이 해야 하지 않을까?

중세 유럽의 병원이란 종교적 공동체에 의해 설립된 기관으로 수사와 수녀들이 환자와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는 곳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병원을 ‘hôtels-Dieu’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9세기경에는 샤를마뉴 대제의 명으로 성당과 수도원들이 병원 기능을 할 공간을 지었고 그중에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도 있다. 그 전통은 가톨릭 교회를 통해 지켜져 왔다. 안타깝게도 의학이 과학적 훈련 과정으로 진화됨에 따라 그 원래적인 영적인 핵심은 사그러들었지만 오늘날엔 더 필요한 것이 되었다. 현대 병원을 보면 가족과 친구들은 외딴 대기실에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환자들의 몸에 연결된 기계와 화면에서 신호가 사라지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므로’ 그제서야 가족은 병실로 들어갈 수 있다. 현대 의학은 이렇게 환자의 고통을 고상하게 감소시키려 하나 오히려 부지불식간에 환자를 죽어가도록 내버려두는 역설에 빠져 있다.

우리가 정말 죽음의 의미를 되찾으려 한다면, 죽어가는 환자를 교회와 가족의 품으로 다시 데려와야만 한다. 그리고 죽음의 과정을 의미 없이 연장할 따름인 의료기구들을 멀리해야 한다. 물론 고통을 덜게 하고 가쁜 숨을 쉬는 걸 돕고 욕지기가 나는 것을 덜어주는 처치들은 계속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제와 목사, 찬양과 음악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모셔와서 그분의 뜻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약물이 든 주사기를 손에 들고 고통 없이 미지의 (외로운) 밤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 약속하는 죽음의 조력자들에 기댈 일이 아니다.

사랑의 돌봄 가운데 맞이하는 임종
마그릿의 죽음은 쉽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것은 정확히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대로 되었다. 아내는 고통스러워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 해도 그 고통이 감해지진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을 끌어안는 진정한 길을 발견하고 배우는 기회였다. 하나님의 순간을 기다리는 일에는 깊은 영적인 가치가 있다. 비록 알지는 못했지만 신비로부터 배우는 교훈이 있었고 그 교훈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린 무력했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천사들로부터 보호받았고, 슬픔 가운데 기뻐하여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졌으며 둔감한 양심은 깨어났고 닫혔던 눈이 뜨였다.

고대인은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죽음의 과정은 지상과 천국 사이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도 성스런 시간에 관여하길 꺼려하는 경향이 있지만 오늘날 여전히 배울 점이 많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는 사람들이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가 드물다. 중환자 병동에선 그러는 일은 더더욱 드물다. 마그릿처럼 집에서, 자기 침대 위에서, 꽃들과 음악, 아이들의 노래 가운데서 임종을 맞이한다. 우리 역시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므로 죽음이나 장애를 다른 사람만큼이나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적극적 사랑의 행동이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우며, 환자를 둘러싼 사람들이 투병하는 이를 위해 하루 내내 또는 밤새 올리는 기도는 어떤 약보다 더 강력하다. 환자들은 혼자 외로이 임종을 맞이하거나, 자기 손으로 경야(經夜)를 준비하는 일이 없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든 절망적인 현 상황에 대한 비관에서든 자신의 삶을 끝내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정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길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한 희망의 길이며 고통 가운데, 그리고 고통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길이다.

마태복음에 묘사된 그리스도가 겪은 고통을 살펴보자. 예수님은 이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이는 고통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전적인 순종과 용기의 모습도 보여주셨다. 놀랍게도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몰약이 섞인 포도주를 거부했는데, 역사가들에 따르면 몰약은 신경을 마비시켜 고통을 경감한다고 한다. 그렇게 예수님은 죽음을 맨 정신으로 똑바로 마주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고통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을 우리를 위해 내려놓으신 증거이다.
이렇게 그의 죽음은 그를 따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된다. 우리 모두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은 선택의 장면을 맞이할 것이다. 고통을 회피하고 거절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고통을 통해 정화되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미 1세기에 사도 베드로는 고통의 제자도에 순복하라고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거룩한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십시오. 육신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와 인연을 끊은 것입니다.”(벧전 4:1) 그리고 이어 이렇게 말했다.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벧전 4:13) 바울 역시 이와 같은 어조로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기 때문”이라고 했다.(롬 5:3)

존엄한 삶을 사는 길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종교적 박해의 상황을 두고 이런 말을 했겠지만, 결국엔 몸의 복종과 그 결과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정화는 고통의 근원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앨리슨 데이비스의 예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녀는 자살 시도 후에 살아났다. 그 후 그녀는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삶의 의지를 갖게 되었다. 비록 자살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과 장애로 말미암아 육체적으로는 피폐해졌지만 말이다.

1955년 영국에서 척추뼈 갈림증과 뇌수종을 갖고 태어난 데이비스는 열네 살에 휠체어에 의지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서른 살에는 폐기종과 골다공증과 관절염까지 겹쳐, 결국 자살을 시도하게 되었다. 자살에서 깨어나서는 처음엔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차츰 변화되어 마침내 회심에 이르게 되었다. 프랑스의 루르드까지 순례를 다녀왔고, 28년간을 가장 낮은 이들을 섬겼으며, 텍사스의 사형수들을 돌보았고, 인도의 장애 아동을 위한 단체까지 세우게 되었다.

이런 삶이야말로 존엄함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존엄이라는 말은 라틴어 ‘dignitas’에서 유래했고 의미는 ‘미덕, 가치 또는 존경’이란 뜻이다. 흔히 말하는 자율성이나 독립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우리 삶에 주어진 무거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힘이나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순간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능력과 관련된 말이다.

불필요한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누구도 고통과 아픔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의 고통을 짊어졌으며 그의 고통으로 세상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적은 고통을 받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알리스 본 힐데브란트는 우리가 고통을 이런 식으로 바라볼 때 고통은 오히려 특권이 된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구세주와 함께 고통 받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죽기까지 믿음을 지키라.” “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살아있는 믿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공동체의 사랑으로 둘러싸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자기 손으로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바울이 말한 바 ‘훨씬 더 나은 길’을 알고 있다면 어쩔 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저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 번역_오정환

 

루벤 짐머만
미국 뉴욕주 리프톤에 위치한 우드크레스트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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