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최종편집 : 2019.10.1 화 13:37
기사검색
   
> 뉴스 > 커버스토리
       
〔백소영〕 나·너·우리의 관계 혁명과 하나님 나라
[345호 커버 스토리]
[345호] 2019년 07월 31일 (수) 10:30:12 백소영 goscon@goscon.co.kr

1. 죽음과 죽임이 가득한 일상에서
요즘엔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읽기가 두렵다. 외롭게 혼자 죽은 사연은 차고도 넘치고 동반자살 기사도 한두 꼭지는 실려 있다. 그중 부쩍 늘어난 기사가 생면부지의 젊은이들이 인터넷에서 서로 고통을 나누다가 오프라인으로 함께 만나 동반자살을 했다는 소식이다. 외롭게 고군분투하던 젊은이들이 서로 연대한 것이 죽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참담하다.

일찍이 에밀 뒤르켕(Emile Durkheim)은 전통 사회의 안전망이 빠르게 붕괴하던, 아직 근현대 사회의 법적 보장이 형성되지 않았던 19세기 프랑스 도시민들의 자살률을 분석하면서, 특정 시기 특정 공간에서 자살률이 급증하는 것은 개인의 일탈이나 병리현상이라기 보다는 사회제도적 원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의 가설대로라면, 10년 넘게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를 계속 유지해온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매일 벌어지는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해야 하는 현상이다.

어찌 자살뿐이랴. 자신이 10년 동안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며 분노한 진주의 한 독거 중년은 2019년 4월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는 이웃들을 무차별적으로 찔러 죽였다. 사망한 다섯 명의 희생자가 모두 여성이거나 노인이라는 점에서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분노를 표출한 ‘사회부적응 범죄’의 전형을 보여준다. 보복형 살인이야 시절 불문하고 있어 왔지만, 폭력과 살인이 분노를 일으킨 유발자를 향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약한 불특정인을 향해 있다는 것이 최근 일어나는 잔인한 ‘죽임’ 현장의 특징이다.
 

   
 

‘죽임’은 범죄 현장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정규직, 그것도 공기업에 취직했다고 좋아하며 정장을 입고 출근한 첫 날 모습을 신바람 나게 동영상에 담은 한 젊은이는 몇 달이 안 되어 허술하고 강도 높은 노동 현장에 제대로 된 훈련 과정조차 없이 배치되었다가 사고사를 당했다. 시민 안전을 위해 지하철 안전문을 고치던 젊은이는 정작 자신의 안전을 살펴봐 줄 2인 1조 팀원을 확보하지 못했고, 군 제대 복학을 위해 여름방학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던 젊은이는 감전 위험을 관리해줄 감독관을 가지지 못했다. 후기-근대(late-modern), 그러니까 근대적 기획의 후기 상태를 직면한 이 사회는 그야말로 죽음과 죽임이 가득한 공간이다. 그런데 이런 죽음과 죽임의 사건들이 우리의 일상에서 매일 일어나는데, 제도는 변화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다른’ 세상을 향해, ‘다른’ 상호작용을 향해 한걸음도 나아가지 않으니 답답하고 우울하기까지 하다.

‘험한 현장에서 죽기 싫으면 열심히 공부하면 되고 안전한 곳에서 일할 만큼 능력을 기르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니 너도 저런 일 당하기 싫으면 지금부터 정신 차리라’는 어른들의 압력은 청(소)년들을 ‘선행학습’과 ‘자기계발’ ‘끊임없는 스펙 경쟁’의 트랙으로 내몰 뿐이다. 하지만 근현대 사회라 하여 ‘출발선’이 같았던 적은 없다. 그 후기 상태인 지금은 ‘신(新)신분제’ 사회라 불릴 만큼 넘기 어려운 선이 견고하게 그어져 있다. ‘수저계급론’은 예리한 사회학자의 분석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생활의 일선에서 근대적 기획의 후기 상태를 살아내는 평범한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삶의 배치가 전혀 ‘평등’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음을 제일 먼저, 그리고 ‘폭력적’으로 경험하면서 만들어낸 말이다.

“오늘 아침도 자살하고 싶었는데, 왜 비까지 추적추적 오고 난리야.” 새내기들이 우산을 받고 지나가며 ‘해맑게’ 내뱉는다. “좋겠어요. 저 사람은 쉴 수 있잖아요.” 장례 문화를 배우던 대학생들이 죽은 이의 영정 사진을 보고 거침없이 말한다. “아, 괜찮아요. 어차피 살기 싫어요.” 인간이 관계적 힘을 기르지 않으면 드론의 무기화 같은 일이 발생해서 대량학살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설명에, 본인 포함 다 죽어도 괜찮다고, 이제 겨우 십대에 접어든 학생들이 ‘쿨’하게 답한다. 캠퍼스에서, 강의실에서, 특강을 가서 만나는 청(소)년들의 입에서 이런 소리들을 직접 들으며 어른으로서, 선생으로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무엇보다 기독교 사회윤리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가슴이 탁 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정도면 근대적 기획은 전면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냐, 자본주의자냐, 지공주의자냐 따위의 패러다임 문제로 시작부터 싸울 일이 아니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쓴 엄기호의 말처럼 “문제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의 제도는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본디 ‘제도’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안정감 있는 생존이 가능해야 유지되는 법이다. 그런데 세대와 계층을 통틀어 다수가 근현대 사회의 제도적 삶에 불만 내지는 의욕상실을 보이고 있지 않나. 아니, 아예 이 제도 안에서는 삶의 기회가 제공되지 않아 죽음과 죽임이 일상이 되어버렸지 않나.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하나다. 제도를 다시 구상하는 것, ‘생각하는’ 종이라는 호모 사피엔스가 늘 해왔던 일이다. 그리고 현행 제도의 ‘불합치’를 경험하며 우리도 이제 새로운 생존 방식을 치열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바탕이 되는 질문부터 물으려 한다. 처음 제도권으로 진입하여 우리가 배운 말, 나, 너, 우리. 그것부터 다시 시작하자.

2. 나로 살아내기, 경건일까 욕망일까
우리가 ‘나’로 태어난 세상은 ‘경쟁’이 문화적 패턴인 근현대(modern) 세계이다. 출생이 운명을 결정했던 전근대(pre-modern) 사회의 신분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한 개인은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고 이를 위해 자유 경쟁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세상의 후기를 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물론 이런 세상이 끔찍하고 고단하지만, 전근대를 막 빠져나온 개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복음’이었을 거다. ‘내 삶을 내가 기획할 기회’라는 선물을 받은 최초의 근대인들은 어제보다 더 발전된 모습으로 성장하려 애썼을 것이고 내가 도출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내달렸을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 그들은 ‘기꺼이’ 그리 했을 것이다.
 

   
 

하필 ‘근현대’ 사회와 시간, 공간, 주체가 중첩되었다는 ‘역사의 우연성’으로 인해 근현대적 작동 방식을 만드는 데 함께 공헌한 개신교는 근대인의 끊임없는 자기계발의 습속에 신앙적 이유를 덧붙였다. 개신교가 천명한 ‘직업 소명’이라는 교리, 막스 베버가 “이세상적 금욕주의”(thisworldly asceticism)라고 부른 삶의 자세가 그것이다. 칼뱅은 이미 ‘부르주아’였던 중세 말기의 독립도시 개신교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구원 상태를 위해 할 수 있는 바가 전혀 없으니 오직 ‘믿을’ 뿐이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인지를 확인할 가능성은 있으니, 선택된 사람은 소명으로서 자신의 직업적 성취 과정과 결과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즉, 성실하고 근면한 노동 태도, 놀라운 업적과 성과는 바로 하나님의 동행을 입증하는 외적 증거들이라는 가르침이다. 중세를 막 빠져나온 개신교도 입장에서야 구원 상태의 확인이 절실했을 일이고, 이들이 하나의 ‘습관’으로 만들어놓은, 금욕적이기까지 할 정도로 쉼을 모르는 직업 영역에서의 질주는 20세기 말까지도 대한민국 교회들로 하여금 ‘청부론’과 ‘고지론’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엄격한 칼뱅교도 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던 벤자민 프랭클린의 설교는 어쩌다 그냥 나온 일화가 아니었다.

   
 

시간이 돈임을 잊지 말라. 매일 노동을 통해 10실링을 벌 수 있는 자가 반나절을 산책하거나 자기 방에서 빈둥거렸다면, 그는 오락을 위해 6펜스만을 지출했다고 해도 그것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 외에도 5실링을 더 지출한 것이다. 아니 갖다 버린 것이다. 신용이 돈임을 잊지 말라. 누군가가 자신의 돈을 지불 기간이 지난 후에도 찾아가지 않고 맡겨 두었다면 그는 나에게 이자를 준 것이거나 아니면 내가 이 기간 동안 그 돈으로 할 수 있을 만큼의 것을 준 것이다. 좋은 신용을 가졌고 그것을 잘 이용한다면 대단한 액수의 돈을 쌓을 수 있다. … 근면과 검소 이외에 모든 일에서 시간엄수와 공정보다 젊은이를 출세시키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당신이 빌린 돈을 결코 당신이 약속한 것보다 한 시간이라도 지체시키지 말라. 이는 그것에 대한 분노로 인해 당신 친구의 돈주머니가 당신에게 영영 닫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신용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아주 사소한 행위도 조심해야 한다. 당신의 채권자가 오전 5시나 오후 8시에 듣는 당신의 망치소리는 채권자로 하여금 6개월을 유예시키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일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그가 당신을 당구장에서 보거나 주점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는 바로 다음날 상환 독촉을 할 것이며 당신이 그 돈을 쓰기도 전에 다시 내놓으라고 할 것이다. … 세부적인 것까지 주의하는 노력을 한다면 다음과 같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즉 당신은 매우 사소한 지출이 모이면 엄청나게 불어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고, 무엇을 저축할 수 있었고 또 앞으로 무엇을 저축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물론 세대가 지나면서 개신교 신자들은 더 이상 ‘구원 상태의 확인’이라는 신앙적 목적을 위해 달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덧 ‘습속’이 되어버린 개신교 신앙과 근현대적 삶의 ‘친화성’(affinity)은 신실한 개신교 청년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성공하고 교회에서 헌신하며 공적·사적 영역에서 모두 ‘모범’이 되도록 종용했다. 그것이 ‘경건’의 지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전대미문의 내적 고립감”을 가진 자아, 오직 발전해야만 자기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 근대 개신교 신앙인인 ‘나’는, 그야말로 쉬지 않고 달리는 존재여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 본연의 모습과 얼마나 적합한지에 대한 질문은 뒤로 하고라도, 경건의 이유로 열심히 달린 근현대 초기와 중기의 개신교 청년은 대부분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먼저 뛰었고, 쉬지 않고 뛰었으니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처음엔 경건의 동기였을지 몰라도) 점점 세상적 성공의 ‘맛’을 보게 된 ‘나’는 어느덧 ‘자리’(bureau)를 욕망하게 되었다. 기왕이면 더 안정적인 자리, 더 높은 자리, 더 비싼 자리.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결론부에서 우려했던 “스포츠의 정신과도 같은 경쟁”은 어느덧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라면서 간증 무대를 가득 채웠던 성공 사례들은 21세기에 들어와 후기-근대의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 시스템이 기승을 부리는 환경에서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개신교인이라고 하여 구조조정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희망퇴직의 길에서 건짐을 받는 것도 아니지 않나. 청년들의 경우는 아예 진입 자체에 커다란 장벽을 만나야 했다. 결국 세상적 성취를 이루지 못한 신앙인 ‘나’들은 이것이 근현대적 작동 방식의 구조적 모순임을 간파하는 대신에 이를 개인적 신앙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예배당에 와서 무릎 꿇고 자신의 실패나 좌절을 ‘감정적으로’ 호소했다. “순식간에 하늘에서 내리는 계시”나 “씨앗믿음으로 심은 헌금”으로 세상적 성공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미국발(發) ‘번영신학’이 최근 20년 사이에 유난히 ‘번성’하게 된 맥락도 우리 사회의 경기 침체나 고용 불안정성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개인의 실패는 그의 성실성이나 신앙심의 문제가 아니다. 꼬리 잘리지 않으려고 죽음의 질주를 하는 후기근대인들은 과연 ‘나’만 대체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근현대 사회 초기 동력 기계의 등장으로 물리적 힘이 경쟁력을 상실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빈곤 계층으로 떨어뜨렸다면, “생각하는 기계”의 출현이 무너뜨릴 노동자는 이제 누구이겠는가?

이즈음 교회 밖에서는 ‘워라밸’을 외치는 젊은이들이 생겨났다. 무작정 뛰는 삶을 잠시 멈춘 채, 혹은 속도를 조정하면서 그들은 질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떨 때 가장 나다운가? 무슨 일을 할 때 비로소 의미를 찾으며 행복한가. 안정적 자리와 고액 연봉에 내 존재를 ‘갈아 넣느니’ 차라리 자리가 불안정하고 연봉이 낮아도 나를 위한 시간과 에너지를 남기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이다. 필시 이들의 선봉에 섰던 선배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일 것이다. 뛰었다면 최고의 자리를 너끈히 차지했을 시간과 공간, 스펙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근대인이면서도 일찌감치 ‘워라밸’을 추구하며 살았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의 하루 중 오전 오후 전부를 사회에 팔아 버린다면, 확신하건대 나에게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확신컨대 죽 한 사발을 위해 나의 생득권을 결코 팔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매우 부지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은 아닐 수 있음을 언급하고 싶다. 자신의 삶 대부분을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 소모해버리는 사람보다 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과업은 자기 자신을 부양하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과업은 자기 자신을 부양하는 것이다.” 오전과 오후는 물론 저녁시간까지도, 아니 전 존재를 사회에 ‘팔아버린’ 후기근대인이 가슴에 새겨야 할 문장 중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그러니 소로우의 선언은 비단 생존의 전략만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청교도적인 나’를 찾은 사람이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경건한 신앙인과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환경에서 끊임없이 내달렸던 근대인의 ‘선택적 친화성’이 만들어놓은 그런 청교도(이는 ‘프랭클린 모형’이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신 ‘나’, 고유한 ‘나’를 지키는 거룩한 소명을 감당하는 신앙의 경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건’이란 무엇인가? 세상의 소리에 휩쓸리거나 좌우되지 않으며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는 삶의 자세요 실천 아니겠나. 그렇다면 각자 경건한 신앙의 표현은 다를지언정, 바탕이 되는 자세와 실천은 큰 ‘원칙’으로 수렴되어야 한다고 본다. 근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원칙, 소로우가 그래서 ‘원칙 없는 삶’이라고 비판했던 그 ‘원칙’을 찾는 것이 경건한 나들의 공동 과제이다. 나 자신을 부양하는 과제 말이다.

3. 너의 의미, 사이-공동체의 비밀
가뜩이나 이기적 개인들로 가득한 근현대 사회인데, 그래서 혹자는 ‘나나랜드’라고 비웃기도 하는데, ‘나’로 살아내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은 성취되는가? 서로가 다른 답을 가진 ‘나들’이 끊임없이 만나고 부딪히는 것이 사회인데, 나를 부양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나들이 만난다면 그건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가 아닌가? 이런 질문이 들 법도 하다. 하여 두 번째 원칙을 소개한다. 자기를 부양하는 주체적 개인들이 그 다음에 주목해야 하는 원칙은 ‘너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데 결코 반영된 적이 없었던 ‘너’의 의미가 가장 먼저, 가장 진지하게 들려져야 한다.

사실 근현대의 제도는 전근대 신분제 사회에서는 ‘너’였던 시민(市民) 남자 계층(제3계급)의 의미가 반영되면서 만들어졌다. 상업, 공업, 무역, 행정을 담당하면서 중세 봉건 영토의 신민(臣民)들과는 상대적으로 자유와 독립, 그리고 꽤 든든한 자산을 가지고 있었던 시민 남자들은 자신의 권리와 재산을 지킬 수 있는 새로운 정치체를 원했다. 그래서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외치며 비로소 ‘나’로, 내 의미를 발화하는 주체로 우뚝 섰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만인’은 결코 문자 그대로의 ‘만인’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소위 ‘생각하는 지성’을 통해 자신의 능력에 맞는 자리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사회의 정치·경제 생활을 운영하고자 했던 근대적 기획에서 여성은 만인에 포함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한 번 선언된 ‘보편’ 법칙이 어찌 사람을 가리랴. 지난한 투쟁이 있었지만 그 보편 선언 ‘덕분에’ 무려 5천 년 동안 ‘너’였던 여성들이 20세기 전반기를 지나면서 비로소 ‘나’로서의 법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진행된 1기 페미니스트 운동의 성취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을까? 근대 시스템을 기획한 남자들이, 그리고 ‘내’가 되는 일에 몰두했던 1기 페미니스트들이 놓쳤던 것은 근대 제도적 배치의 구성상의 모순이었다.

   
 

많은 사회학자가 지적하듯이 이들이 ‘근대화’되는 방식으로 구상한 세계는 공적 세계이다. 그러니까 가정의 작동방식에 대해서는 전혀 ‘근대적’ 기획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시도는 가장의 개별화된 자리 이동을 따라 전통적인 확대가족이 핵가족으로 전환되는 변동을 낳았고, 한 가정에서 아내요 엄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여성의 경우는 확대가족 관계망 안에서부터 핵가족 관계망 안으로 공간 이동만 했을 뿐 여성의 사회적 배치에 본질적인 변화가 없었다. 아니, 경제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여성의 종속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셈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귀족을 제외한 대다수 서민 가정의 경우 남편뿐 아니라 아내도 생산노동에 참여해야만 생계가 유지될 수 있었기에 가정은 재생산뿐이 아니라 중요한 생산 공간이었다. 그러나 산업 혁명 이후 획기적인 생산수단의 발달로 중산층 가정의 경우 남편의 외벌이 노동으로 핵가족이 유지 가능했던 근대의 전·중기에는 낭만화된 결혼을 통해 ‘전업주부’들의 배치가 전적으로 사적인 가정 영역으로 제한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반만 근대화된 “산업적 봉건사회”라는 말로 이 기획의 모순을 비판한 바 있다.

임노동이 가사를 전제로 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19세기에 생산영역 및 형태와 가족이 분리되어 창출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적대와 마찬가지로 산업체제의 산물이며 기초이다. 동시에 그 결과 나타나는 남녀의 처지는 출생의 귀속에 기초한다. 이런 점에서 남녀는 근대적 신분계급들이라는 진기한 잡종이 된다. … 그들은 산업사회 내부의 근대성과 반(counter)근대성 사이의 모순에서 자신들의 폭발력과 갈등논리를 끌어낸다. 따라서 성별 지위의 귀속역할과 적대는 초기 근대성이 아니라 후기(late) 산업의 근대성 속에서, 즉 사회 계급들이 이미 탈전통화되었고 근대성이 더 이상 가족과 결혼과 부모됨과 가사의 문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는 지점에서 마치 계급적대처럼 분출한다.

독일은 우리보다 근대화의 후기 상태를 먼저 겪었기 때문에 이러한 갈등이 일찍 표출된 것일 뿐, 오늘날 전쟁을 방불케 하는 젠더 갈등을 경험하는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 들어맞는 사회학적 분석이다. 근대 사회에서 안정적 수입원의 원천인 임금노동을 확보할 수 있는 ‘자리’의 수효는 한정적인데, 시민 남성들만이 아니라 여성들까지 그 자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후기근대 사회에서는 공동체 영역의 ‘전근대적 방식’과의 충돌이 더욱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다.

최근 벌어지는 성별 연대와 분노의 표출은, ‘주체’라는 근현대적 원동력이 ‘안정감과 지위 상실’이라는 후기-근대적 상황에서 중첩되어 전개되는 하나의 문화 현상이라고도 분석할 수 있다. 후기근대 사회란, 개별 경쟁이 시작된 이래 모두가 ‘부르주아’가 될 줄 알았던 세상이 환상이었음이 드러난 공간이다. 전근대 사회와 비교하여 근현대인은 공동체적 안정성을 잃은 대신 ‘자리’(Bureau)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와 안정(혹은 공동체적 생존)을 맞바꾼 셈이다.

그런데 주체가 되고 개인이 되기 위하여 공동체의 안정성을 포기하고 달린 근대인들은 후기 상태를 맞이하여 그 자리조차 빼앗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전근대적 신민(臣民)처럼 ‘입’을 빼앗긴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니까 가부장제가 끝난 마당에 나이든 남성들도 아니고 젊은 남자들의 연대를 통해 ‘여성 혐오’가 공격적으로 양산된 까닭도 어찌 보면 이런 상황에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젊은 남자들은 공적 영역으로 들어와 성취하는 여성들을 경계해왔다. 그들의 분노는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곡해’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근대적 기획 자체가 갖는 결함에 대한 이성적 성찰 대신에 젊은 남성들이 붙잡은 것은 ‘마지막 기득권’인 남성성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향유했던 권력, 그것을 ‘처음’ 박탈당한 그들은 이 상실감을 또래 여성들을 향해 분출한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되었다. 만약 ‘기득권’으로서 남성 지위의 상실에 분노하려면 “출생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전근대적 전제를 전복시킨 근대적 기획 자체를 향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다. 그리하여 남성의 젠더 권력을 회복할 가능성은 희박하거니와, 그리 한다고 해도 남성들만이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에서 과연 모든 남성들이 ‘평등한 주체’로 살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1980년대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지적처럼 ‘남근로고스중심주의적인’(phallogocentric) 남자들이 건설하는 시스템은 결국 힘에 의한 쪼기 서열(Pecking Order)을 위계화할 것이기에.

그 어떤 집단보다도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젊은 여성들의 분노’ 역시 근대적 원동력으로서의 주체 경험과 후기근대적 상황이 긴밀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에 발생했다. 2016년 5월의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인터넷 상에서 표출되는 ‘메갈리아’ ‘워마드’의 분노는 결코 ‘실패한 자들의 대항정체성’으로서의 분노가 아니다. 이 분노하는 여성 집단의 연령대가 10-30대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학창 시절을 지내는 동안 여자라고 특별히 이익이나 불이익을 받아본 적이 없던 세대다. 솔직히 분노하려고 든다면 대한민국에서는 40-50대 여성이 들고 일어나야 하지 않나. 이들은 그야말로 전근대적 여성상과 근대적 여성상 사이에서 양쪽 기대를 몽땅 수행했던 세대요, 양쪽으로 독박 쓰느라 과로사가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강남역 여성 살인’에 의해서 촉발된 대한민국의 “헬페미니즘”은 젊은 여성들의 것이다.

   
 

혹자는 비난조로 말한다. 뭐가 그렇게 쌓였냐고. 그러나 생존이 위태로운 시대에 젊은이이면서 동시에 ‘여성’이라는 두 가지 ‘불리함’을 가진 집단이 “헬페미니스트” 세대이다. 가뜩이나 고용유연성 이후의 직장 구조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청년층으로서의 박탈감이나 배제감이 큰데, 거기에 더하여 똑같이 공부하고 똑같이 노력했음에도 단지 ‘생물학적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고용구조와 성차별적 응시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극단적인 젠더 갈등을 일으키는 ‘일베’나 ‘워마드’ 집단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들이 기반하는 분노의 환경은 ‘후기-근대’라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개신교는 가부장적 성 질서를 거룩한 신적 질서로 고착화함으로써 후기근대를 사는 경건한 여신도들의 존재를 분열시키고 있다. 종교사회학자인 정재영 교수가 2018년 봄 19세 이상 개신교도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성 평등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인식 조사” 결과 분석에 따르면, 자신을 소위 “그리스도중심층”(신앙의 4번째 단계로서 “하나님은 내 삶의 전부이며 나는 그분으로 충분하다. 나의 모든 일은 그리스도를 드러낸다”고 답한)은 기존 교리를 신앙적 진리로 절대화하는 경향성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남녀의 성역할이 구별되어 있으며 이는 성경적이요 하나님의 질서라고 답한 응답자들 대부분이 바로 이 그룹이었고, 목사님의 설교가 전혀 성차별적이지 않다고 답하면서도 설교 내용 안에 포함된 내용들, 즉 “아내는 남편을 내조하는 것이 기본적인 역할이다” “여성은 순종적이고 지혜로워야 한다” “교회에서 여성 리더는 부드럽고 포용적이어야 한다” “여성은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 “여성은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안 된다” “교회에서 남성이 할 일과 여성이 할 일이 따로 있다”는 말들에 대해서는 전혀 ‘성차별적’이라고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

“어떤 남자 집사님이 저더러 ‘그렇게 입으면 형제들이 어떻게 시험을 이기냐며, 성폭행은 그렇게 일어나는 거다’라고 이야기 했어요.” “기도하는데 전도사님이 와서 묻길래 인생이 안 풀려 기도 중이라고 했더니 나이를 묻더라구요. 20대 후반이라고 했더니, ‘아 그럼 이제 슬슬 빡시게 해야겠네! 슬슬 자궁 말라비틀어질 나이잖아’라고 하셔서 황당했던 기억이…” “여성 신학생들은 교회가 아닌 특수목회를 해라. 이 나이 들어서 여자에게 머리 숙이는 것도 그렇고, 교회에는 남자 목회자가 있어야 본이 선다.” “여자는 아이를 많이 낳아야 전도와 포교에 도움이 된다. 경력단절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이 알아서 도우실 문제이니 그저 믿고 아이들 낳으라고” “남편이 바람피우는 이유는 집에서 아내가 스스로의 역할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네요.”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남의 나라 이야기도, 한 세대쯤 전의 이야기도 아니다. 2017년 3월 <뉴스앤조이>에서 353명의 2030 청년들에게 물은 설문에 답한 내용들이다. 교회 안에서 들었던 성 편견의 말들을 적은 것이다. 고상한 표현으로 되어 있지 않아서 그렇지 교회 청년들이 들었다는 저 말들은 모두 ‘개신교 여성 응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아니, 정말로요? 근현대 문명을 여는 데 사상적 기반과 운동성을 가진 시민들을 양성했다는 ‘그’ 개신교가, 저런 여성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맞다. 개신교도들은 세속 사회에서의 일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부여하신 특별한 부르심대로 ‘살아내려’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그 열심 때문에 경제, 정치, 교육, 소위 사회 제도 안에서 역할도 컸다. 무엇보다 여성 응시에 있어서도 전근대적 가톨릭의 여성관과는 사뭇 다른 ‘개혁적’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딱 ‘저기까지’였던 거다. 여성의 ‘부르심’(소명)은 조신한 여성, 사랑받는 아내/현명한 엄마, 돕는 2인자의 역할이라고. ‘적어도’ 16세기 이래 몇백 년간은 ‘다수’의 개신교 여성들에게 ‘나름’의 의미가 있었을 이 여성 응시는, ‘분명히’ 21세기 후기-근대적 상황에서는 ‘억압적인’ 시선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끊임없이 ‘너의 의미’를 우리 공동체 안으로 초대하는 나라이다. 카타리나 폰 보라와 동시대 인물이었고 자신의 소명을 ‘다른 재능’에서 찾았던 마리 당띠에르는 여성을 변호하며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몇몇 선한 여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에게 성서를 통해 거룩하고 선한 것을 드러내시는 데도, 진리를 훼방하는 자들로 인해 여성들이 그에 관해 서로를 향해 글을 쓰고, 말하고, 선포하는 것을 망설여야 합니까? 아, 그들을 막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뻔뻔한 일이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우리가 숨기는 것 또한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교회의 이름인 ‘우리’로 살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너의 의미’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 원칙 없이 ‘서로를 건설하는’ 교회는 결코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4. 우리, 서로를 건설하는 이름
교회(하나님 가문의 사람들)는 언제나 ‘생존 공동체’였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협했다는 말이 아니고, 죽음과 죽임의 세상 한복판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대신에 살고 살기 위해 권위를 나누고 소유를 나눈 공동체였다는 말이다. ‘우리’였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권위를 나누었다. 힘 있는 자가 독점하고 약자를 착취하던 이집트적 질서를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제도로 살아가기로 약속했던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는 군주제 대신에 사사 제도를 공동체적 합의로 채택했다. 그 질서는 여호와만이 오직 우리 위에 군림하는 왕이시라는 “여호와-왕 사상”을 신앙고백으로 삼으며, 사람들끼리 왕 노릇하는 것을 불신앙이요 신성모독으로 여기던 사회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어기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형제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독점한 아비멜렉과 그에 복종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막내 동생 요담은 언약 공동체를 상기시키는 장소인 그리심 산에서 외쳤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삿 9:9-13)

결국 나무들 위에 군림하여 우쭐대기로 결심한 나무는 ‘가시나무’였다고 성경은 전한다. 필시 아비멜렉을 비유한 것일 텐데, 이 우화에서 드러나는 고대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비전은 한마디로 ‘재능사회’(meritocracy)라고 할 수 있다. 수직 위계의 명령 하달형 시스템이 아니라, 각자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께 받은 재능으로 공동체를 섬기며 그 유익이 서로에게 닿게 하는 방식의 삶이다.

물론 그 시절이야 부족사회였으니 가능했을 일이지, 초대형 국제도시들이 등장한 요즘 시절에 가당키나 한 사회적 상상력이냐고 실천가능성에 의문이 들 수도 있을 일이다. 하지만 관료제적 자리를 내려놓은 채 작고 구체적인 단위의 공동체적 생활을 통해 ‘성경적 원안’으로 살아보려 애쓰는 ‘우리’들의 사건이 이미 있다. 도시 한복판에서 자기 자리를 내려놓지 않고도 ‘생존 공동체’를 이루고 연대하여 살아가는 경우도 제법 보인다. “하나님의 오이코스로서의 교회와 가정”이라는 주제로 10여 년간 출판과 강연을 이어갔던 필자가 최근 5-6년 사이에 초청받는 곳들 중에서는 직업이 같거나 같은 교회 청년부 출신, 혹은 비슷한 또래의 자녀들을 키우다가 알게 된 대여섯 가정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하면서 ‘오이코스적’ 생활 방식을 이어가는 곳이 많았다. 공동 기금의 출자 방식이나 규모는 각각 달라도 혈연 중심의 핵가족 단위의 생존을 넘어서는 ‘생존 공동체’의 필요성과 신앙적 요청을 인지하고 이를 신학적으로 확인하려는 의지들이 강했다.

사실 가정은 가장 오래된 생존 공동체이다. 예수가 교회를 하나님의 오이코스 즉 ‘하나님의 생존 공동체’로 선포한 가장 핵심적인 까닭이 여기 있다고 본다. 신약성서 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예수가 혈연 중심의 가족을 넘어 새로운 형태의 가족 연대를 선포하러 이 땅에 오셨다고 해석한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 그러고서는 당신 주위에 둥글게 앉아 있는 이들을 둘러보시면서 말씀하셨다. “보시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여기서 새 가정이라는 주제가 다시 등장한다. 예수는 “고도로 수사적이면서 고도로 법적이기도 한 고대의 말투로” 자기 가족으로부터의 해체를 선언하고, 스스로 다른 가족에 편입된다. 아니, 즉석에서 이 다른 가족을 구성한다: “여기 이 사람들이 내 형제들이다!”라고. 누가 이 새 가족인가? 제자단만인가? … 예수 자신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로핑크는 이 새로운 가정에 ‘아버지’가 없다고 선언한다. 인간공동체의 수장을 의미하는 ‘아버지’는 새로운 가정에서 자리를 가지지 않는다. 로핑크는 새 가정의 구성원을 호명하는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삭제했다고 읽는다. “새 가정에는 아버지들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란 너무나도 가부장적 지배의 상징이다.” 마태복음 23장 8-12절에 근거하여 스승, 아버지, 지도자 등의 수장 자리는 다 한 분 하나님께로 돌리라고 선언하신 예수는 ‘하늘 아버지’를 제외한 모두가 형제자매라고 선포한다. 로핑크는 예수께서 새로운 가정을 선포하시면서 왜 ‘어머니’라는 이름은 살렸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지배·통제·폭력을 단념하라는 경고와 그런 지배적 힘이 없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는 예수의 메시지를 강조했음으로 미루어볼 때 유추는 가능하다. 여기서 ‘엄마’는 생명의 성장에 구체적으로 관여하는 이름이되 결코 지배하거나 통제하려 하지 않는 어른을 일컫는다. 자녀의 인생 진로와 나아가 존재 자체까지 기획하고 통제하는 3세대적 “전문엄마”의 길은 물론 예외다.

교회는 세상 질서를 닮지 말고 늘 ‘거룩’하라고 배웠다. 그러나 이는 배타적으로 교인들만의 생존 공동체를 만들어 우리만 깨끗하고 우리만 잘 살고 우리만 안전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여호와의 성전에서 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불은 꺼지지 않고 24시간 늘 타올라야 했다. 그 본문을 묵상하다가 필자는 문득 이런 상상을 했다. 그 거룩한 불을 죽음과 죽임이 가득한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실현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뛰어 들어가면 사는” 그런 공간과 시간과 자원과 인력을 제공하는 ‘중간 지대’가 되어야 한다.

제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강력한 힘을 가진 독재자가 탑다운으로 바꿀 수도 있겠으나 더 이상적이고 근대 시민사회에 적합한 방식은 새로운 제도에 합의하는 구성원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집단 역학 안에서 힘을 갖게 되는 경우다. 교회는 “하나님의 생존 공동체”가 되는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제도를 향한 걸음을 옮겨야 한다.

필자가 신앙의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김교신은 언젠가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은 전문학자도 아니고 직업적 종교가도 아니라서 ‘사상’이나 ‘교리’를 가지고 죽자고 싸우는 일은 본업이 아니라고. 그러나 보통사람이요 소인(素人)으로서 현실을 살기에 “현실에 착안하여” 싸운다고. 교회가 비본질적이면 교회의 존재방식과 싸워야겠으나, 세상 제도나 문화가 반(反)하나님적이면 그와 싸우는 일이 더 급한 것 아니겠냐고. 하여 그는 1920-30년대 교파주의적 제도 교회를 향하여 쏟아 붓던 비판적 싸움의 방향을 1940년대에는 반생명적인 일본 제국주의로 돌렸다. 시절마다 신앙의 이름으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다르다는 그의 주장을 접할 때마다, 필자는 우리 시절에 우리가 싸워야 할 반(反)하나님적인 제도는 무엇일까를 묻게 된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 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으며, 굶어 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갈 수 있을까.” 발달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격리된 한 살 아래의 동생이 내내 마음에 걸려서 결국 혼자 뛰는 삶을 그치고 동생과 함께 공동체로 살며 <어른이 되면>이라는 삶의 프로젝트를 선언한 한 청년은 이렇게 노래했다. 살고 싶다고, 혼자 말고 사랑하는 동생과 둘이. 굶기 싫다고. 하지만 누군가를 죽이고 굶기며 생존해야 한다면 그것도 싫다고.
 

   
 

필자는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이 가사야말로 오늘날의 예언서라고 생각했다.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말씀’ 말이다. 4차 산업혁명 이후의 세상에서 보통의 성인이 생계비를 벌기 위하여 차지할 수 있는 ‘관료제적 자리’가 과연 몇 퍼센트나 될지. 2045-2050년엔 리프킨의 인용대로 5%일지, 아니면 더 극단적으로 1%만 남을지, 그건 우리가 알 수도 조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남은 자들의 생명을 지키고 살리기 위해 때론 나조차도 용감하게 내던지는 존재의 힘을 지닌 나와 너라면 ‘우리’가 될 수 있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 방식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라고 믿는다.

 


백소영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와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공부했다. 이화인문과학원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강남대학교 기독교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회 및 시민단체에서도 강연하며 기독교 세계관과 윤리의식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 《엄마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 《교회를 교회되게》 《우리의 사랑이 의롭기 위하여》 《드라마 속 윤, 리》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등이 있다.

백소영의 다른기사 보기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복음과상황 기사제보 광고문의 제휴안내 오시는길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03785)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 3길 15 산성빌딩 104호 | 전화 : 02-744-3010 | 팩스 : 02-744-3013
발행인 : 김병년 | 이사장 : 황병구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병년
Copyright 2008 복음과상황.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con@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