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호 그들이 사는 세상] 목회학 학위 과정 개설한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전성민 원장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Vancouver Institute for Evangelical Worldview)은 캐나다 트리니티웨스턴 대학교(Trinity Western University) 산하 ACTS 신대원과 협약 을 맺고 ‘세계관 연구와 교육’에 매진해왔다. 양승훈 초대 원장에 이어 현재 전성민 교수가 2대 원장을 맡고 있으며, 특히 올 가을학기부터는 목회학 석사 과정을 새로 시작한다. 한국에 잠시 들른 전성민 원장을 만나 VIEW의 목회학 과정 개설 및 코로나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는 7월 3일, 본지 세미나실에서 있었다.
2대 원장으로 일하신 지 시간이 좀 흘렀다.
2018년 11월부터 맡게 되었는데, 만 2년이 안 됐다. 아무래도 일이 많아지다 보니 외부 원고가 밀리거나 거절하는 경우가 잦아진다. 무엇보다 원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은 ‘후원 발굴’인데, 바라는 만큼 성과가 나지는 않는다. (후원 문의: viewinkorea@gmail.com)
VIEW도 코로나 사태 영향이 없지 않을 텐데 수업 상황은 어떤가?
대구에서 대확산이 있었을 때도 캐나다 상황은 괜찮아서 대면수업을 했다. 그러다 봄학기가 끝나는 3월 말에서 4월 초에 마지막 두 주 정도 수업을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현재 VIEW가 속한 트리니티웨스턴 대학교(TWU) 측이 철저하게 온오프라인 수업 상황을 관리하는데, 가능하면 원격 수업으로 하라는 게 원칙이다. 대면수업으로 진행한다고 해도 학생이 불안해하거나 몸이 안 좋은 경우 원격으로 들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어떤 경우에도 학업을 시작하는 데 문제가 없게끔 준비하고 있다. 9월 학기부터는 목회학 과정도 시작된다.
VIEW의 목회학 과정 명칭이 ‘M.Div. in Worldview and Peace Studies’인데 ‘평화학’이 들어 있어서 의외였다. 평화학은 보통 퀘이커나 메노나이트 전통에서 연 구하고 가르쳐온 학문 범주 아닌가?
VIEW는 TWU 산하 ACTS 신대원과 협약을 맺고 학위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는데, 이 ACTS가 교단 신학교 4개 컨소시엄으로 이뤄진 기관이다. 침례교 2곳, 복음주의독립교단 1곳, 메노나이트 1곳으로 서로 다른 교단 신학교가 협력하여 운영하는 혁신적인 신학교 모델인 셈이다. 캐나다가 메노나이트 전통이 강한데다 ACTS 자체가 평화주의 전통을 배우기에 좋은 토양이다. VIEW에서도 이미 필수과목 중에 평화주의 관련 과목이 있다. 그러니까 평화학이 포함된 건 자연스럽기도 하고 섭리라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목회학 석사 과정은 이미 국내의 여러 신학교에 개설되어 있다. 같은 학위 과정을 굳이 ‘기독교세계관 연구와 교육’을 핵심으로 삼은 VIEW에서 개설한 이유가 있나?
VIEW가 세계관 운동을 20년 넘게 해오면서 경험적으로 터득하게 된 것 중 하나는 한국 상황에서 세계관을 얘기하고 확산하기에 가장 중요한 통로 중 하나가 교회라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일상이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이뤄지는 곳으로 보는 세계관적 개념을 목회자들이 잘 이해하는 것과,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사역의 주체로 설 수 있게 잘 돕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VIEW에서는 과거 교단 신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시간을 보내는데, 그런 점에서 아예 처음부터 세계관적 개념의 바탕 위에서 목회자를 양성하면 어떨까 하는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다. 또한 VIEW 학생들의 60-70%가 목회자들이고 나머지가 평신도들인데, 평신도 가운데 선교사 같은 분들이 실제적인 필요로 목회학 과정 개설을 꾸준히 요청해왔다. 관건은 VIEW만의 특성과 차별점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VIEW의 목회학 과정에 세계관이 들어가는 건 자연스런 귀결이지만, 한국의 교단 신학교에서 접할 수 없는 과목이 바로 평화학이었다. 세계관과 평화학을 접목한 목회학 과정은 VIEW만이 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결론에 이르렀고, 여러 경로로 의견을 청취한 결과 아이디어가 멋지고 현재의 한국 상황에 적합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사실 세계관은 개혁주의 전통, 즉 신칼뱅주의에서 나왔고, 평화학은 아나뱁티스트 전통에서 나온 건데 교회사적으 로 이 둘은 서로 반대편에 있어 왔다. 종교개혁 주류인 칼뱅주의가 아나뱁티스트를 이단시하고 핍박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양쪽의 신학적 전통을 접목하고 융합한다면 이제까지 없었던 제3의 신학적 혁신과 도전을 한국교회 안에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다. ‘변혁자 그리스도’라는 말로 대표되는 세계관 운동은 세상 속의 변혁을 추구하는 운동인데, 한국에서 이 운동이 시작된 지 수십 년이 지나 는 지금, 기독교가 사회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사회의 영향을 받아 지배 주의적이고 권력주의적인 한계가 드러나는 위험성을 포착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도 세계관과 평화학의 접목은 의미 있는 실험이 될 것 같다. 세계관과 평화학을 접목한 목회학 과정은 한국 최초가 아닐까 생각 한다. 평화학이라고 하면 한반도 상황 같은 거대 이슈도 있겠지만, 일상의 모든 층위에서 이뤄지는 관계적 갈등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주제로 다루게 된다.
평화학과 세계관이 접목된 목회학 과정이라니 확실히 새롭고 흥미롭다. 그런데 새로운 만큼 커리큘럼이나 학위 과정으로 검증이 안 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과정에 대한 기획을 2년 전부터 시작하여 TWU의 최종 학위과정 승인을 얻기까지 꽤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왔다. VIEW 내부 논의와 이 사회 승인은 물론이고, ACTS 목회학 위원회의 검토와 승인, ACTS 교수회의 검토와 승인, TWU 대학원 위원회의 검토 및 승인 절차를 모두 거쳤다. TWU 대학원 위원회에서는 예비심사를 통한 리뷰와 피드백을 거쳐 본심사를 통과했다. 그만큼 의미 있는 과정으로 ACTS 및 TWU 내 전문가들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다. 특히, 신학을 전공한 TWU 총장 또한 굉장히 좋게 평가했을 정도다.
캐나다 교회는 코로나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으며, 목회나 신앙 양육 차원에 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캐나다도 엄격한 2주간 자가격리 정책이 실시되고 있고 집합금지도 철저히 시행했는데, 공공시설뿐 아니라 상업시설도 다들 잘 지키고 교회들도 모두 잘 따랐다. 내가 사는 데가 브리티시컬럼비아(BC) 주의 밴 쿠버 외곽이라서 전체 상황을 말할 수는 없지만, 3월 말에 락다운(봉쇄) 이 되어 5월 23일에 한국 들어오기까지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며 산책 하는 것말고는 정말 집에만 있었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제한된 인원만 들어갈 수 있고 나머지는 정확히 2m 간격으로 줄을 서서 두세 시 간을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식당이나 가게,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교회들도 현지인 교회든 한인 교회든 내가 아는 한 정부의 방역 정책 에 따라 바로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고 정부에 항의한 경우는 보지 못했 다. 그래서인지 캐나다는 확진자가 여전히 하루 5만 명을 넘나드는 미국 상황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이런 코로나 상황에서 캐나다 교회나 현지 한인 교회도 목회 차원에서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온라인을 어떻게 잘 활용할지 고민한다. 내가 알기로는 한국교회는 중 앙집중 방식으로 온라인을 활용하는데 반해, 캐나다 교회는 훨씬 수평적이어서 가정이나 소그룹 단위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데 훨씬 열려 있는 편이다. 그래 서 한국교회보다는 좀더 분산적인 흩어지는 사역을 쉽게 시작하는 것 같다. 이게 전체 캐나다 교회 상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내가 아는 주변 교회들을 보면 그렇다는 거다. 또 캐나다 교회는 매주 헌금을 걷지 않고 연간 헌금을 작정해서 연초에 내거나 분기별로 내는 방식이라서 온라인 예배 전환 결정이 더 쉽지 않았나 한다.
캐나다 정부의 집합금지 정책에 교회가 반발한 경우가 없다고 했는데, 한국교회의 반응과는 꽤나 다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주에 따라 5명 또는 10명 이상 집합금지가 시행되고 있고, 밴쿠버가 있는 BC 주의 경우 지금도 50명 이상 집합금지가 시행중이다. 그럼에도 캐나다 교회는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따른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캐나다 교회 성도들이 각자가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시민의식이 한국교회에 비해 더 명확하기 때문 아닌가 싶다. 그들은 자기가 속한 사회를 바로 세우고 유익하게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언젠가 ACTS 교수님 한 분과 식사하다가 한국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세금 내는 문제를 두고 찬반 논쟁이 크다는 얘길 했더니, 엄청나게 충격을 받더라. 목회자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세금은 당연히 내야 하는 건데 왜 그게 문제가 되냐는 거였다. 그런 인식 차이가 있지 않나 싶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교회는 성역이며 성도는 일반 시민과 구별되는 거룩한 무리’ 라는 일종의 구별의식 혹은 선민의식이 은연중에 깔려 있어서 그렇다는 얘긴가?
캐나다 교회도 당연히 거룩을 추구하지만, 그게 사회 일원으로서 마땅한 공적 역할이나 책무에서 열외되는 어떤 특권의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양쪽을 모두 경험한 내 눈에는 캐나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좀더 상식적으로 보인다. 상식적이라는 말은, 세상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얘기다. 캐나다에도 당연히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교회가 있지만, 그게 주류는 아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목소리가 굉장히 크고 주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다른 것 같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신학자로서 이 초유의 상황에 교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코로나 시대는 불확실성이 특징이다 보니, 어떤 얘기도 한순간 물거품이 되거나 말도 안 되는 허언이 될 수 있어서 뾰족한 답이 있지는 않다. 그저 파편적이고 단편적인 생각들을 나눌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우선, 코로나 이후 나타나는 한국교회 양상은 전부터 세대 간의 차이로 있어오지 않았나 싶다. 코로나가 빨리 지나가서 예전처럼 교회에 열심히 모여 예 배드리고 신앙생활 하기를 바라는 건 아무래도 예배당 중심의 신앙생활 에 큰 의미를 둔 세대에 적용되는 이야기 아니겠나. 그와 달리 현 상황을 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세대도 있는데, 이미 존재해온 이런 세대 간 차이가 코로나로 인해 더 명확하게 드러난 것 아닌가 싶다. 둘째, 코로나 이후(Post-Corona)를 대비한다는 것은 어떤 세대의 신앙적 감성을 기준으로 얘기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다. 50대 이상의 신앙적 감성을 기준 으로 하면, 예배당에 다시 모이는 게 그만큼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당에 그렇게 매이지 않는 세대와 가나안 성도라 불리는 이들의 감성으로 는, 온라인 예배와 비대면 만남이 새로운 공동체로 이어지는 통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코로나 이후 목회에서 중요한 변수 중 첫째는 어느 세대를 목회의 중심에 둘 것이냐가 아닐까 싶다. 물론 신앙은 몸으 로 체험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비대면 신앙생활은 신학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을 제외하면, 비대면 환경이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신앙 형성의 토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
비대면 예배·교제·만남이 일상화되는 온라인 교회, 온라인 공동체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500년 전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 21세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이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저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이 라고?’ 반문하지 않을까? 기독교는 각 시대마다 독특한 모습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대교회를 기준으로 생각할 때, 오늘날 2천 명이 스크 린을 보면서 드리는 예배는 과연 예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 시대든 교회는 그 시대와 상황에 맞는 신앙생활 양식을 찾고 적용할 것이며, 하나님이 이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이어가시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터부시하지 않았으면 한다. 과감하게 생각하면, 이제는 가상현실(VR) 기술을 예배에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은 상상하지 못하는 예배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고 본다. 코로나로 인해 줌(ZOOM)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는 건물이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정말 실감했다. 말로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오랫동안 교회 공간, 건물 안에 들어가서 예배드려왔기 때문에 ‘교회는 건물’이라는 의식이 이미 몸에 배고 내재되어 있지 않나. 그런데 줌으로 연결되면 화면에 보이는 건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뿐이다. 정말 교회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전에는 교회당에 가면 예배시간에 목사님 얼굴만 보이고 나머지는 거의 뒷모습만 보게 되어 있는데, 스무 명이 한 화면에서 모두 얼굴을 마주하니까 정말 성도의 교제를 누리는 느낌이었 다. 줌으로 하면 목사님도 N분의 1이다. 한국교회는 목회자를 중심으로 판옵티콘 구조에 가까운데, 줌으로 예배드리면 그 구조가 깨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미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비대면 예배나 교제는 의미가 있겠지만, 서로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는 비대면 상황이 과연 피상성을 넘어 의미 있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연애도 카톡이나 페북 메신저 같은 SNS 에서 먼저 말을 트고 만나지 않나. 기술을 통한 만남의 방식 변화는 다양해질 것 같고, 어떤 만남이 다른 만남에 비해 더 진정성이 있다 하는 것도 자기 경험에 국한된 판단일 수 있기에 관계 형성의 다양한 방식과 통로에 대해서는 열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진행 옥명호 편집장 lewisist@gosco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