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호 동교동 삼거리에서]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의 표지가 화제입니다. 4월 5일 자에 실린 이 표지에는 아시아계 모녀가 그려져 있습니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한 여성이 불안한 모습으로 딸의 손을 꼭 붙잡고 더디 오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장면입니다. 미국에서 아시아계를 향한 혐오범죄가 증가하면서, 공공장소에서도 안전을 위협받게 된 이들의 현실을 담아냈습니다.
공공의 공간에서마저 안녕을 담보할 수 없게 된 현실, 미국만의 일이 아닙니다. 안전한 공간은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세상이 바뀌어서인지, 사람이 바뀌어서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마음 편히 안식을 누릴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게다가 팬데믹이 이어지면서 한 공간에 모이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지요. 이런 때, 커버스토리를 통해 다양한 생각을 접해보며 지금의 교회 공간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특히, 교회 건물이 누구에게나 안전한 공간이기를 바라는 최주광 목사의 이야기(사람과 상황)는 교회 공간에 대한 현실/이상의 간극을 좁히는 치열한 질문을 건네줍니다. 우리가 누리는 교회 공간은 ‘모두에게 안전하면서도, 모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곳’인가요?
“어떤 날은 혼자 책을 낭독하다가 마치기도 한다.”
‘클럽하우스’(SNS)에서 독자모임을 꾸리고 있는 박광제 지기님의 글(160쪽)을 읽으면서, 무형의 공간을 떠올렸습니다. 누군가는 들어올 것이라는 마음으로 그 작은 공간을 여닫는 약속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30년째 이어지는 복상이라는 지상(紙上) 공간도 마찬가지겠지요. 더디더라도 침착하게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다른 정서를 충분히 주고받을 수 있는 긴 호흡의 공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새 연재 ‘그림책으로 우리의 안부를’(김주련)을 통해서 그런 공간의 확장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 미얀마 현장에서 분투 중인 선교사와의 인터뷰(116쪽)도 일독을 권합니다. 선교사들은 왕왕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이렇게 위험천만한 일이 터질 때마다 최전선에 서지요. 세계 곳곳의 무고한 희생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인류의 안녕을 위하여 복음의 첨단을 살아내는 이 땅의 많은 선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이범진 편집장 poemgene@gosco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