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호 성서해석, 어디까지 해봤나요]
저는 평신도들로 구성된 교회를 섬기는 신자입니다. 사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교회에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그분을 따르고자 합니다. 우리 자녀들도 그런 부모들을 보며 말씀을 따르는 삶에 진지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교회’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목회자가 없는데 교회라고요? 목회자 없이 평신도끼리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요?”라고 반문합니다.
그런 시선을 의식해서 평신도로 구성된 몇몇 교회는 주변에 이를 알리지 않고 조용히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평신도들이 예배로 모여서 말씀을 공부하며 나누는 것은 초대교회에 흔하게 있었던 일이며, 루터의 종교개혁을 온전하게 완성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종교개혁에서 다 담지 못한 초대교회의 정신
한국 개신교의 뿌리는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와 츠빙글리, 칼뱅 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517년 루터는 가톨릭교회에 대항해서 ‘오직 믿음으로!’라는 구원론을 붙들고 교회 갱신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의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의 여러 전통에 문제를 제기하며,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태도를 취했다는 점에서 옳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종교개혁은 절반의 개혁이었습니다. 그는 ‘이신칭의’ 구원의 원리를 강조하느라 ‘산상수훈’의 삶을 덜 강조했습니다. 교회 바깥의 고통에 민감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치권력의 편에 서서 권력에 저항하는 이들을 탄압하는 일에 동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보급했으나, 말씀 선포의 자격은 목회자들에게만 한정했습니다. 성경 해석의 주체가 ‘사제 계급’에서 ‘목회자 그룹’으로 이동되었을 뿐, 신자들이 말씀을 붙들고 공적 공간에 서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불완전한 종교개혁의 전통이 오늘날 한국교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는 신약성경 속 초대교회의 흐름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를 믿는 자들이 늘어나면서 사도들이 말씀 사역에 전념하기 위해서 스데반 등 7명의 집사를 세워 구제와 봉사를 맡겼습니다(행 6:1-5). 오늘날 교회에서는 집사들을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으로 한정하고, 말씀 전하는 일은 맡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초대교회 집사 스데반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넘어, 회중들에게 구약의 말씀을 해석해주며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선포합니다. 이는 한국교회에 뿌리내린 ‘목회자=설교자’라는 고정관념에서는 그릇된 행동입니다.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 또한 스데반의 순교로 박해를 피해 사마리아로 가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으며(행 8:5-15), 가사로 가는 길에서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 말씀을 풀어주며 세례를 베풉니다(행 8:26-40). 그 장면 역시 의아합니다. ‘아니 어찌 집사가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다는 말인가?’
에베소서 4:11을 보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목사라는 직분이 나오지만, 이는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교사와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목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적 공간에서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전하는 유일한 존재’로서의 목사와는 그 의미와 기능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또한 고전 14:26-30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고린도 교회 내에서 예배 중 찬송과 말씀, 계시, 방언과 통역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계시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 또한 두세 명이 넘었음에도 바울은 이를 단속하기보다는 질서 있게 진행하라고 당부할 뿐이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 내에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한 사람이 아니며, 여러 신자들이 말씀과 계시를 공적 공간에서 드러내는 일이 금지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의아합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는 아시아에 흩어진 교회들의 고정적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몇 년 만에 한 번씩 말씀을 전하러 방문하는 순회 전도자였을 뿐이며, 평상시 그들은 사도들이 자기 교회에서 준 말씀이나 편지에 의존해서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초대교회에 관한 연구들에 따르면, 당시 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수백 수천의 신자들이 모인 대형교회도 아니었습니다. 리더와 직분이 존재했지만 한 번 장로면 영원한 장로와 같은 ‘항존직’이라 불리는 존재가 아닌 기능적인 구별이었습니다. 일반 신자들과는 격이 다른 구름 위 존재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신자들 간의 관계는 수평적이었고 말씀 나눔의 기회는 개방적이었습니다.
루터가 청산하지 못한 가톨릭교회 잔재들
이런 초대교회의 흐름이 끊긴 것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식 인정한 후였습니다. 교회가 정치권력과 결탁하거나 교회가 국가를 장악하는 이른바 국가교회(Christendom)가 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말씀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주체가 사제로 한정되었고, 일반 신자들은 라틴어 성경 말씀에 접근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미사를 통해서 오직 해석된 말씀만 들을 뿐이었습니다. 말씀 전하는 권한이 사제로 제한되고 권력까지 주어지게 되니 교회가 부패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신자들은 이런 가톨릭교회의 국가교회 흐름을 거부하고 그 바깥에서 초대교회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들의 존재를 잘 몰랐습니다. 1517년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만 기억합니다. 기껏해야 그전에 후스나 사보나롤라, 존 위클리프 같은 이름 정도를 기억할 뿐입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교회사 기록을 살펴보면,1) 4세기 국가교회의 대세를 거부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때까지 프랑스 리옹, 이탈리아 피에몽 계곡, 터키와 스페인의 계곡에서, 가톨릭교회에 저항하며 초대교회 정신을 계승하고자 사투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 전통을 거부하고, 마리아 숭배도 거부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신칭의’를 붙들며 동시에 예수의 제자로 ‘산상수훈’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했습니다. 이미 자국어로 성경 말씀을 번역해 보급했으며, 말씀을 전하는 목사 그룹과 일반 평신도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일반 신자들도 말씀을 전했고, 그들의 선한 삶으로 주변 지역 사람들이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이들의 고백은 16세기 종교개혁과 오늘날 개신교회의 고백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들 존재에 위협을 느낀 가톨릭교회는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습니다.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세우며 고문과 화형으로 죽였고, 이들이 기록한 문서를 샅샅이 찾아 불살랐습니다. 존재 자체를 말살하기 위해 힘쓴 것입니다. 그 탓에 탄압에 맞서 신앙을 지킨 그 처절한 역사를 우리는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가톨릭교회의 핍박으로 지도자들이 수없이 죽자 그들은 빈 공백을 또 다른 평신도 지도자들로 채우면서 말씀의 끈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이 핍박을 피해 각처에서 피에몽 계곡으로 모여들었고, 다시 그 핍박을 피해 지금의 스위스·독일·체코로 흩어져 그곳에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며 버텼습니다. 그러다가 루터 등의 종교개혁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이렇게 가톨릭교회 바깥에서 4세기부터 15세기까지 초대교회 정신을 계승하며 버텨온 그 계승자 공동체들이 없었으면 위클리프나 후스도 없었을 것이고 루터의 종교개혁도 없었겠지요.
루터는 이들 초대교회 계승자들의 전통에서 성경 중심, 이신칭의 교리를 붙들고 종교개혁을 한 셈이지만, 예수의 제자로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살아내는 것, 사회와 권력의 불의를 바로잡는 것, 교회가 정치권력과 결탁하는 국가교회 흐름을 벗어나는 것,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평신도 지도자들을 세운 것 등의 정신은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반쪽의 종교개혁을 보고 그들을 따르던 신자들은 실망하고 더 온전한 삶, 아니 초대교회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힘썼습니다.
신자란 누구인가: 오직 그리스도에게 의존적인 주체적 존재
저는 그 흐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목회자 없는 평신도교회를 시작하고 보니, 그들의 역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평신도가 자신이 해석한 말씀을 공적 공간에서 전할 수 있느냐와 관련해, 제가 경험한 바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믿는 신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분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 오직 그리스도께만 의존하며 주체적인 존재로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의 지향점은 무엇입니까? 예수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타자인 우리를 위해 그분이 몸을 바치셨으니 우리도 타자 지향적 삶을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민은 무엇입니까? 나는 부족한데 내게 주어진 사명의 짐은 무겁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나와 감당할 사명 사이에는 내 힘으로 넘을 수 없는 깊은 간극이 존재합니다. 제자의 짐을 지고 가다가 때로 혼란에 빠집니다. “내게 왜 이런 시련이 찾아오는가?” “이 일에 반대하는 힘은 왜 이렇게 강한가?” “내게 주어진 약속은 과연 성취될 것인가?” “나 홀로 짐을 지고 가는 것은 아닌가? 주는 어디 계시는가?”
이런 질문을 해결할 길이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아무리 격려해도 그 격려가 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압니다. 이는 예수의 제자로 살기로 하면서 겪게 되는 한계요 아픔이니 그분이 풀어주셔야 할 몫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께로 나오게 됩니다. 매일 새벽이고 밤이고 그분 앞에 나가서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기도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난제를 풀어달라고 부르짖기 마련입니다. 그런 요청, 탄원, 부르짖음에 주께서 침묵하시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남들은 무심코 지나가는 말씀이 자신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힘으로 이해됩니다. 지루한 족보 이야기나 제사의 장황한 절차에 대한 지침 속에서 문득 나를 위로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합니다. 평상시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밀쳐 두었던 말씀이, 갑자기 이해되기도 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다가 갑자기 한 말씀이 자신을 파고들어 해묵은 내적 문제가 풀리기도 합니다. 기도 가운데 문득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고를 치며 찬송하는 장면이 떠오르며, ‘아, 내 문제도 해결되겠구나!’ 그렇게 안심합니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던 말씀이 내게 살아있는 힘으로 경험됩니다.
그래서 크게 기뻐하고 안심합니다. 내려놓았던 의욕의 끈을 잡기도 하고, 위기 속에서 두려움에 떨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풀 수 없었던 과제를 푸는 지혜, 그리고 돕고자 하는 이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모욕에 참지 못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다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전진합니다.
설교란, 그 깨달음을 예배라는 공적 공간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회중 가운데는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영혼의 불꽃이 생깁니다. 말씀이 한 인생의 삶에 침투해서 그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보며, 그도 말씀 앞에 서고자 하는 열망이 솟구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나는 다른 존재라 여기게 되면, 말씀에 무심한 것을 당연시하게 됩니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자가 목회자인 경우에 그것을 듣는 많은 사람은 자기를 성경 해석의 주체로 세우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자기와 같은 평범한 신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주께서 찾아와서 그에게 말씀하시고 변화시키는 모습을 볼 때, 신자들은 말씀과 자기 사이에 가려진 게으름의 벽을 걷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를 보며 자신 또한 매일의 삶에서 스스로 말씀의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란 누구인가: 말씀을 해석하는 신자들의 공동체
전문적 신학자나 목회자도 아닌데 과연 평신도가 전하는 저 말씀이 옳을까? 저러다가 제 소견의 옳은 대로 살아가는 사사시대의 혼란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평신도 설교자와 평신도교회를 불안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로 순종하며 살면서 말씀을 의지하는데, 그 말씀이 그를 그릇된 길로 인도할 리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릇된 길로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의 제자로서 자기 생의 과제가 없고 오직 자기 이익을 확장하는 데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사명의 짐이 있어야 자기 한계를 넘는 길을 하나님께 물을 텐데, 내가 할 만한 일이요 내 욕망 내 안전을 위한 길인데 그분께 물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다가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못한 채 자기 생각에 빠진 후 망하는 것입니다. 전문 신학자나 목회자라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신학을 배운 것이 없어도 말씀을 붙들고 선 그들이 그릇된 길로 가지 않는다는 더 확실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주께서 그분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할 때, 성령께서는 말씀을 이해하고 분별하고 깨닫게 하십니다.(요 14:16-17; 15:26; 16:13-14). 예수의 영이 그에게 임하는 한,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이의 열심에 성령께서는 침묵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을 가고자 말씀을 보는데 그가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은 것은 주의 영이 그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가르쳐줄 목회자도 없는 평신도교회가 성경을 붙들고 씨름하는 근거입니다.
그렇게 신자 개개인이 말씀을 깨닫고 해석한 후 교회라는 공적 공간에서 이를 나눌 때 큰 유익이 생깁니다. 성령께서 개개인에게 영감을 주셨다고 해서 그 말씀을 완전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는 필요한 말씀이었으나, 성령께서 또 다른 이들을 통해서 해석의 지평을 넓혀주실 수도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만 이해한 말씀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 더 깊고 넓게 완성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놀라며 탄복하고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의 존재에 눈을 뜹니다. 이렇게 성령에 의해, 말씀이 나로부터 시작해서 공동체를 통해 검증되고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해석하는 공동체라 함은 하나의 해석만 지배하는 공간임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풍부한 해석이 함께 모여 서로의 오류가 수정되고 내가 깨달은 말씀의 진실함이 확인되며,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신자들의 말씀 나눔 속에서 반복되는 일을 경험합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 내에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분만이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들이 말씀을 붙들고 자기 삶을 살아가며 또 공적으로 자신이 해석한 바를 나누는 주체로 설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이런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세상의 고통에 응답하기 위해 힘쓰며 목회자와 평신도의 그 낡은 구조를 용인하지 않고, 말씀이 누구를 통해서 선포될지 기대하며 서로 배우는 교회는 그 자체가 초대교회입니다.
저는 평신도들로 구성된 이런 작은 교회들이 확산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대신 기존 교회 내에서 가정교회들이 많이 세워지길 바랍니다. 그 공간 속에서 평신도 지도자들을 세워 말씀을 전하며 서로 말씀에 대해 나누는, 이른바 해석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체험하게 되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목회자 설교와 별도로 그들 지도자 중 일부를 정기적으로 전체 예배의 설교자로 세운다면 좋겠습니다. 신자들에게 주는 도전이 작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목회자 역시 ‘신자들을 저런 존재로 세우는 것이 내 직무이구나’라고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전하는 기능으로 평신도들과 자신을 구별해왔다면 그 벽이 무너질 테지요. 그 벽이 무너짐으로 목회자란 평신도들과 다른 구름 위 존재가 아니라, 바로 신자들 공동체 속의 한 일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지도자의 새로운 역할이 보이게 되겠지요. 그 순간, 가톨릭의 ‘사제-평신도’의 이중 구도가 깨지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지 않을까요.
※ 평신도교회와 관련된 어떤 궁금함이나 질문도 환영합니다.(noworry815@hanmail.net)
1)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교회의 역사》(세움북스)
송인수
평신도들로 구성된 산아래교회에 출석하며 평신도교회들 연합모임과 공부 모임을 섬기고 있다. 평신도교회의 설교문을 모아 《만남》이라는 설교집을 내기도 했다. 2008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창립해 활동했고, 현재는 (재)교육의봄 공동대표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