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호 동교동 삼거리에서]

“저는 조울증이 있어요.”

어느 모임의 상견례 자리, 자기소개를 하던 중 B가 작은 목소리로 꺼낸 말이었습니다. 3월호를 준비하면서 20여 년 전의 이 장면이 떠올라 거듭 얼굴을 붉혔습니다. 기억 속 그 현장에서 저는 박장대소합니다. 핑계를 대자면, 당시에는 저 말이 자기 성격의 역동성을 희화화한 소개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용기 내 털어놓은 말이었을 텐데, 그 힘겨운 고백이 웃음 소재로 전락해 하나의 캐릭터를 남겼을 뿐이지요.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이번 커버스토리는 지난해 7월호(교회와 장애인), 8월호(고립과 불평등), 9월호(돌봄을 돌아봄)에 대한 독자분들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기도 합니다. ‘장애’ ‘우울증’ ‘고립’을 다루며 가볍게 언급했던 ‘정신적·정서적 약함’에 대해 더 본격적으로 비중 있게 다뤄달라는 요청이었지요. 어떤 독자분은 직접 구성한 기획안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반응들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그 간절함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전문 영역이면서도 민감한 주제인 정신·신경 질환 등을 다루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등을 떠밀어준 독자분들 덕분에 무사히 나올 수 있었습니다. 어두움과 직면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눠준 필자와 인터뷰이께 감사드립니다.

크고 현란한 소리가 여론을 장악하는 대선 정국에서 이러한 아픔의 이야기들이 독자들께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합니다. “신문을 볼 때 큰 타이틀의 기사를 보지 말고 밑에 있는 조그만 뉴스거리를 한번 눈여겨봐라. 밑에 조그만 보도를 보면 거기에 숨은 진짜가 있다.” 1979년, 약 200명의 동료와 함께 회사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다 죽임을 당한 ‘여공’ 김경숙 씨가 생전에 어린 동생에게 해준 말입니다. 세상의 큰 슬픔과 억울함이 권력자들에 의해 신문에는 아주 조그맣게 편집되었던 시절의 이야기지요.

요즘은 대중의 클릭 수와 AI 알고리즘이 ‘숨은 권력자’가 되어 편집자 역할을 합니다. 조회 수가 보장되지 않는 ‘조그만’ 기사는 쓰이기도 힘들고, 읽히기도 어려운 환경인데요. 그럼에도 이번 호는 대선이라는 큰 타이틀의 이슈에 올라타지 않고, ‘조그만’ 말들을 건넵니다. 숨소리 같은 미세한 목소리에서 ‘숨은 진짜’를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범진 편집장 poemgene@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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