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호 송인규 교수의 ‘하나님 뜻’ 탐구]

드디어 본 연재가 종착점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우리는 특정 영역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앞서 ‘결혼’(2022년 1월·374호 참고)과 ‘직장’(2022년 2월·375호 참고)을 주제로 다루었고, 이번에는 ‘교회 선택’의 문제를 논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특정 영역에서의 하나님 뜻을 다루는 내용 중 마지막이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인도에 관해 쓴 연재 기사의 최종회라는 점에서도 마지막입니다.

이번에 언급하는 교회 선택은 ①교회를 난생처음 나가는 일뿐 아니라 ②교회를 옮기는 경우 ③변화하는 생활환경에서 신앙 공동체를 새로이 정해야 하는 경우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려면 결국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신학적으로는 이 사안이 꽤 복잡하지만, 저는 좀 더 상식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우선 교회는 사전에 “신자들이 예배 또는 미사 등의 종교적 의식을 진행할 수 있도록 세운 건물”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이 정의는 교회를 교회당과 동일시하는 터라 그리스도인 관점에서 보면 다소 불만족스럽게 여겨집니다. 신약성경은 교회를 건물보다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투옥되었던 성경 기사를 봅시다.

행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이 구절에서는 “교회가 … 기도하더라”라고 적혀있는데, 교회가 건물이라면 건물이 기도한다는 진술이므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기도가 어디까지나 인격적 행위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런 모순은 교회를 건물로 여기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일까요?

행 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여기서는 기도 주체가 “여러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위에서 소개한 행 12:5과 연계해볼 때 교회란 ‘믿는 사람들’이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위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교회는 “어떤 특정 지역의 신자들이 함께 종교 활동에 참여하고 세상에 흩어져 생활하는 신앙 공동체”라고 묘사하겠습니다. 아마도 흔히들 이야기하는 지역교회(local church)가 이 개념과 거의 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선택’이란 여러 교회 가운데 어떤 지역교회를 나갈지 정하는 일, 또 이런저런 사정에 따라 지역교회를 변경하는 일이 주요 골자가 될 것입니다.

역시 결혼이나 직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회 선택에 관한 하나님 뜻을 이해하는 데는 보편적 하나님 뜻[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으로 해당되는 하나님의 뜻]과 개별적 하나님 뜻[그리스도인 각자마다 달리 적용되는 하나님의 뜻]을 나누어 성찰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소속에 대한 보편적 하나님의 뜻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교회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성경으로부터 찾을 수 있을까요? 엄밀하게 말해서 이런 주장을 명시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성경 구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혹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러나 이 구절은 일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예배를 위한 모임’이 폐지되려는 경향이 발견되자 모임을 꾸준히 유지하라며 책망 성격으로 권면한 것입니다. 모든 이가 교회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또 어떤 이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가 되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소속되어야 함을 당위적 수납 사항으로 내세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전 12:12-13, 27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바울은 이 구절에서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합니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병합됩니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병합되면서 그 몸을 구성하는 각 지체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병합되지 않는 이가 없고,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지 않는 지체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사실로부터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교회의 소속원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도출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전 12:12-13, 27의 가르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비가시적(非可視的) 교회(invisible church)라는 용어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 이번 글은 ‘지역교회’를 논하고 있고, 지역교회는 우리가 관찰하여 알 수 있는 가시적(可視的) 교회(visible church)의 면모를 띠고 있습니다.

비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의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는 소속 문제입니다. 즉 두 교회는 소속원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가시적 교회 [여기에서는 지역교회]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비가시적 교회의 일원인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도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에게 세례받은 간다게 여왕의 내시(행 8:34-39)가 대표적 예일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예수를 믿었고(난외주 37절 참조) 그 표로 세례를 받았는데, 그렇다면 그는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병합되었고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가 된 것입니다[비가시적 교회에 속함].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 당시 그가 살던 에티오피아에는 지역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런 의미에서 교회에 소속되지 못했습니다[가시적 교회에 속하지 못함].

또 반대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가시적 교회[지역교회]에 소속되어 있지만, 중생하지 않은 관계로 비가시적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바울을 버리기 전의 데마(딤후 4:10), 요한이 말하는 공동체에서 나가기 전의 “그들”(요일 2:19),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유 1:4) 등이 이런 예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들은 한때 자신들이 지내던 곳의 지역교회에 소속원으로 참여했지만[가시적 교회에 속함],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탓에 그리스도의 몸에 병합되지도 않았고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가 된 적도 없습니다[비가시적 교회에 속하지 않음].

이처럼 고전 12:12-13, 27의 가르침은 비가시적 교회의 실상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진리에 기초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가시적 교회, 지역교회]에 소속되어야 함을 당위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누구나 교회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성경에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소속되는 것을 등한시하거나 경시해도 좋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런 반대 극단은 훨씬 더 위험하고 해로울 수 있습니다. 지역교회는 예배(요 4:24), 말씀(고전 14:26), 성찬(고전 11:22-26), 상호 격려(히 10:24) 등이 실행되는 중심 기관이므로, 지역교회에 소속되거나 참여하는 일을 무시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또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신앙적 퇴보와 약화를 피하기 힘듭니다.

물론 개인이 겪는 내외적 요인 때문에 지역교회에 소속하거나 참여하기가 곤란하든지 불가능한 경우는 예외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개인이 노화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든지, 질병에 걸려 격리되든지, 신체·정신 상태가 불안정하든지 하는 것이 내적 요인의 예입니다. 외적 요인으로는 신앙을 핍박받는 상태에서 회심하든지, 그리스도인이 전혀 없는 이슬람 문화권에 텐트 메이커로 파송받든지, 해외 출장·파견·업무 관계로 무교회 지역에 들어가는 경우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외 상황에 있지 않은 일반적인 형편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지역교회에 소속되어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 선택에 대한 개별적 하나님의 뜻

이제 어떤 그리스도인이 평생 처음으로 출석 교회를 택해야 한다든지 거주지 변동에 따라 교회를 새로 정해야 한다든지 할 때, 어떤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정할 수 있을까요? 역시 결혼이나 직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별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돕는 다섯 가지 수단/방편을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1. 성경 구절을 통한 하나님 뜻의 분별

이 수단/방편은 결혼이나 직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개별적 뜻을 찾을 때 다른 방편들보다 유별나게 독특한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교회에 대한 언급, 묘사, 지침 등이 결혼이나 직장보다 더 많기에 다른 주제들의 경우보다는 이 방편이 다소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2. 기도 중 확신을 통한 하나님의 뜻의 분별

이 수단/방편 역시 ‘성경 구절’ 항목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선택하는 상황의 차이에 따라 기여도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첫째, 어떤 교회를 선택해야 할지 그저 막연히 찾고 있는 경우에는 ‘기도 중 확신’이라는 방편은 그리 독특한 역할이나 기여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둘째, 몇 교회를 후보 대상으로 정한 상황에서 어느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아보고자 할 때는 좀 더 도드라진 역할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제5강(2021년 6월·367호 참고)에서 밝혔듯 기도 중 확신 ─기도할 때 우리 심령에 강렬한 영적 인상이 각인되는 일─ 에는 ①인지적 창안물 ②정서/감정의 영향 ③사태에 대한 전망의 변화 등이 있습니다. 이 중 ‘정서/감정의 영향’은 기도 중 확신을 형성하는 가장 흔한 사항입니다. 즉 몇몇 교회를 놓고 계속해서 기도할 때 어떤 교회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불편함이나 부담감이 생기고, 또 다른 교회의 경우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점차 강해진다면, 후자가 하나님의 뜻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특정 후보 대상이 정해진 상황에서는 ‘기도 중 확신’이 꽤 유효한 방편으로 작용할 수 있겠습니다.

3. 자기 평가를 통한 하나님 뜻의 분별

교회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단/방편은, 직장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자기 평가’입니다. 자기 평가는 자신의 욕구·능력·기질을 고려 대상으로 삼는 일인데, 중요성에 따라 정리해도 ‘욕구 → 능력 → 기질’ 순서로 배열됩니다.

① 욕구를 통한 분별

욕구는 교회 선택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가장 중요한 고려 요인입니다. 물론 욕구는 앞선 글들에서 누차 이야기했듯 타당한 욕구와 그렇지 않은 욕구로 크게 나뉩니다. 타당하지 않은 욕구에 따라 교회를 선택하면, 이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 행위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K라는 인물은 교회 직분을 일반 회사에서의 승진처럼 여긴다고 합시다. 그는 A·B·C 세 교회 가운데 한 교회를 정해야 하는데, 머지않아 직분자를 세울 공산이 큰 곳이라는 판단하에 B교회에 출석하기로 정했다고 합시다. 또 어떤 소도시에 교세가 제법 큰 Y교회가 있다고 합시다. 이 지역으로 이주한 M은 이런 교회에 출석하면 관계망이 넓어져 자신의 요식 사업에 유리하리라는 타산적 추정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교회를 제치고 Y교회에 출석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합시다. 이런 사례들은 분명코 타당하지 않은 욕구에 따른 교회 선택이므로, 하나님 뜻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교회 선택과 연관된 우리 욕구들은 대부분 타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구체적으로는 “신학적으로 건전한 교회에 나가고 싶습니다” “주일학교 시설이 잘되어있는 교회를 찾는 중이에요” “예배 스타일이 너무 개방적이지 않으면 좋겠어요” 등이 교회 선택에 관한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예입니다.

교회 선택 욕구는 해당 그리스도인이 누구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선택자 개인이 어떤 신분/처지/조건의 그리스도인이냐에 따라, 또 선택 주체가 몇 명이냐에 따라 교회 선택에 관한 욕구 조항들은 수효와 우선순위에서 크게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려해야 하는 신분/처지/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자신의 나이
· 혼인 여부
· 자녀 유무 및 수효, 그들의 나이
· 신앙 연륜과 성숙 정도:
더 배우고 자라야 하는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가? 두 가지 모두 필요한가?
· 기혼자라면, 부부의 신앙 상태: 양쪽 다 신앙인인가? 한쪽만인가? 한쪽인 경우 누구인가?

교회 선택의 결정자가 개인이면 개인의 욕구만 고려하면 되지만, 부부라면 양쪽 모두의 욕구를 고려해야 하고, 만일 자녀가 있는 부부의 교회 선택이라면 자녀들 바람까지도 포함해야 하기에 훨씬 복잡해집니다. 이렇듯 교회 선택을 하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새로 선택할 교회에 관한 욕구 조항들도 상당히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이제 구체적 상황을 설정해봅시다. S는 회사에서 새로이 지부장 직책을 맡으면서 신도시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과거 살던 곳과 신도시는 무려 2시간 거리이므로 교회조차 옮기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S는 부부가 함께 오랜 연륜의 신앙인으로 지내왔고, 초등학교 5학년과 2학년(1남 1녀)을 자녀로 두고 있습니다. S는 목회자 설교와 공동체 분위기를 교회 선택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꼽습니다. 그의 아내는 봉사 기회와 예배 스타일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이 이주한 지역에 세 교회가 강력한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고 합시다. S는 아내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욕구 체크리스트를 작성해 보았습니다(Gary Friesen, 〈The Wisdom View〉, 《How Then Should We Choose?》, ed. Douglas S. Huffman, 158쪽). 각 항목에 매겨진 숫자는 만족의 정도입니다.

물론 이 비교표만으로 교회 선택을 마무리 지으라는 말은 아니지만, 욕구 점검은 교회 선택에 관한 하나님 뜻을 분별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② 능력을 통한 분별

자신의 능력과 은사도 ─결코 욕구만큼은 아니지만─ 교회 선택에 관한 하나님 뜻을 분별하는 데 한몫합니다. 만일 어떤 이가 교회 봉사를 교회 선택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의 능력/은사를 고려하는 것도 부분적으로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은사가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되는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깝다고 판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기질을 통한 분별

개인의 기질은 교회 선택에 관한 하나님 뜻을 분별하는 데 별다른 독특한 기여를 하지 않습니다.

4. 상담과 조언을 통한 하나님 뜻의 분별

상담과 조언을 통한 수단/방편은 두 가지 방면으로 유익합니다. 첫째, 후보 교회의 소속 교단이나 교파의 역사적·신학적 전통과 관련하여 목회자(혹은 신학자) 자문을 필요로 하는 수가 있습니다. 신앙 전통이 문젯거리일 수도 있는데 모르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전혀 문제 되지 않는데 오해와 의아심을 갖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전문가로부터 받는 진단과 소견은 해당 교회에 관한 선택과 관련하여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줍니다.

둘째, 선택을 고려하고 있는 교회의 신앙 선배로부터 그곳의 목회적·사역적 실정을 소개받는 일도 자신에게 맞는 교회를 선택하는 데 유용한 참고 사항입니다. 어떤 대학생이 해당 교회 청년부가 수행해온 제자 훈련 프로그램에 관한 내용을 듣고서 그 교회 출석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든지, 아니면 특정 선교단체 입김이나 영향이 너무 강한 것을 인지하고서 출석을 재고한다든지 하는 것이 구체적 예입니다.

5. 환경의 문을 통한 하나님 뜻의 분별

‘환경의 문’은 교회 선택에 관한 하나님 뜻 분별에 그다지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환경의 문’이 우리의 주목을 끄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새로 이사한 아파트 단지 내에 평소 흠모하던 목회자가 목회 사역을 하고 있다든지, 교회를 막 옮기려던 찰나 자기 소유의 건물에 임대받은 개척교회 목회자가 과거 같은 교회 대학부 직속 선배로서 함께 사역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왔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이때 당사자는 환경의 문이라는 한 가지 방편에 의해서만 하나님 뜻을 분별하려 들지 말고, 다른 방편들 ─기도 중 확신, 자기 평가, 상담과 조언 등─ 의 지원을 받는 가운데 신중히 결정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선택과 관련한 개별적 하나님 뜻을 찾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자기 평가의 수단/방편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중에서도 합당한 요구를 통한 탐색이 하나님 뜻에 근접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로 여겨집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기도 중 확신’과 ‘상담과 조언’도 다소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구절’과 ‘환경의 문’은 그 기여도가 가장 떨어지는 수단/방편이라고 하겠습니다.

필자 후기

기독교 신앙에 관한 모든 글쓰기는 지도와 비슷합니다. 지도 없이 생소한 장소를 찾아가는 일은 오리무중과 같고 큰 위험 부담을 초래합니다. 본 연재도 이런 식의 지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쓰였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하나님 뜻을 찾고자 할 때, 불필요한 혼란이나 방황을 미리 방지하려면 일종의 가이드(지도)가 필요한데, 그런 바람에서 연재를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2020년 10월경]에 김도완(비아토르 대표)·옥명호(전 〈복음과상황〉 편집장) 두 분의 주선으로 연재가 결정되었을 때, 뿌듯한 각오보다는 자격지심에 발이 저려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다른 일로 바빠 최근 복상의 글 분위기나 독자들 경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맞물린 고민이 제 뇌리를 맴돌곤 했습니다. 첫째, 글의 적합성 사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이라는 주제가 복상의 분위기에 맞을까?’ ‘나의 글쓰기 스타일과 내용이 복상 내 다른 글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를 움츠리게 만들곤 했습니다. 둘째, 저자로서의 소통 가능성 문제였습니다. ‘내 나이가 70세가 넘어 이미 꼰대 중에 상꼰대인데, 복상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원고를 싣기로 합의한 이상, 무를 수도 없는 처지여서 회의와 불편함을 억누른 채 글쓰기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위로를 삼기 위해, 글을 쓰는 의의를 두 가지로 설정했습니다. 우선, 이 주제와 관련하여 한국인 그리스도인의 글이 없는 만큼 좀 더 우리 실정에 부합하고, 우리 실정을 반영하는 글을 써봐야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또, 하나님 뜻을 찾는다든지 하나님 인도를 받는다든지 할 때 여러 방면에서 모호하거나 불명확한 점들이 등장하곤 하는데, 이런 사항들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정리해야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계획한 대로 13회 연재를 마치고 나서 갖는 느낌은 보람과 아쉬움입니다. 막상 글마다 주제를 정하고 쓰다 보니 거의 미답지를 항해하는 일과 같은 어려움에 봉착하곤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인도에 관한 영미 도서(및 번역판)가 많이 있었지만,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심하게 말해 중구난방일 뿐 납득이 가는 설명이 상당히 희귀한 실정이었습니다. 특히 제4강 ‘성경 구절을 통한 인도’부터 제9강 ‘다섯 가지 수단과 결정’이 그랬습니다. 글이 잘 풀리지 않아 버둥거렸는가 하면,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리기도 했고, 몇 번을 뜯어고쳐야 하는 시시포스의 고역을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연관된 소주제들에 대한 성찰을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이후로 좀 더 체계 잡힌 설명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보람이라면 보람입니다.

당연히 아쉬움은 남지요. 상투적인 빈말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시 연재한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정련된 글을 쓸 수 있겠다’라는 다소 만시지탄식 소감을 갖게 됩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정해진 분량 내에 모든 내용을 담다 보니까, 설명이 불충분하거나 건너뛰는 식으로 내용이 전개되어 안쓰러운 느낌을 떨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글을 다 쓰고 나서 갖는 현재의 심정은 안도의 한숨이라는 말로 묘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일단 책임을 다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글쓰기를 시작하며 가졌던 질문은 아직도 제 마음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글의 적합성과 독자들과의 소통 가능성 문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해하든지 자신을 괴롭히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도 하고, 남은 과제는 혹시 이런 주제로 다시금 전달이 필요할 때 좀 더 틀이 잘 짜이고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이라는 지도가 우리 신앙생활 실상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 그 판정은 이제 여러분 몫입니다. 연재에 관심을 보내주신 기자님들과 복상 독자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빛내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송인규
건국대학교에서 축산학, 총신대 신학대학원과 미국 캘빈 신학교에서 신학을,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철학(Ph.D.)을 공부했다. IVF(한국기독학생회) 총무를 지냈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으며 은퇴 후 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새로 쓴 기독교, 세계, 관》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하라》 《고립된 성》 《세 마리 여우 길들이기》 《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 《정말 쉽고 재미있는 평신도 신학 1, 2》 《자아가 자아를 엿보다》 《분별력 1, 2》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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