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호 커버스토리]
헌신과 광기는 정반대이면서도 동시에 비슷한 점들이 많습니다. … 그러면 헌신과 광기의 차이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들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이의 구별 기준으로 무사심(selflessness)을 듭니다. 하지만 헌신만이 아니라 광기도 기꺼이 헌신하며 때로는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적절한 기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정서적 공감(empathy)을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헌신과 같이 광기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합니다. 때로는 광기가 더 많이 공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헌신과 광기의 차이는 가치 기준(values)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광기에도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이 있습니다. 아니 때로 광기는 헌신보다 더 확고한 가치 기준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헌신과 광기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섬기는 리더십”의 창시자인 그린리프(Robert K. Greenleaf)는 헌신과 광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의심의 그림자”(shadow of doubt)가 있는가 여부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견해야말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바른 견해”(right view)라고 생각하는 것을 광기라고 말합니다. 만일 자신이 “이것이야말로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확신한다면 다른 견해가 맞을 수 있는 가능성은 모두 없어지며,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따르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헌신을 하면서 동시에 “의심의 그림자” 속에 있을 수 있을까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헌신과 “의심의 그림자”가 상호 배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이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의심의 그림자”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배울 수 있습니다. “나도 잘못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헌신의 본성입니다. 항상 “의심의 그림자”를 갖고 있으라는 말은 불신앙의 영역에 머물라든지, 자신의 일에 불성실하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들이 옳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린리프의 “의심의 그림자”에 더하여 철학자 호퍼(Eric Hoffer)는 광기와 헌신의 차이를 “불확실성”(uncertainty)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헌신에는 “불확실성”이 있지만 광기에는 어디에도 그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광신자는 강한 확신이 있고(certain), 자신은 틀릴 수 없으며, 자신은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해결하는 분명한 플랜을 갖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들에게는 의심과 불확실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인내할 수 있는 근거(foundation for tolerance)도,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정서적 공감도, 겸손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명백한 정답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겸손할 수가 있을까요?
칼럼을 쓴 양승훈 교수가 헌신과 광기에 대해 깊이 성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창조과학회 창립 멤버로 지구 나이가 6천 년이라는 ‘젊은 지구론’을 오랫동안 주장하다 지구 나이가 수십억 년이라는 ‘오래된 지구론’으로 생각을 바꾸었을 때 창조과학회에서 제명당한 개인적 경험과 독실한 기독교도인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독실한 미국 기독교인들이 부시의 결정을 지지하는 시대적 경험을 겪으며 ‘헌신’과 ‘광기’는 어떻게 다른지, ‘광기’가 아닌 ‘헌신’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깊이 고민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광기를 헌신이라고 쉽게 착각에 빠지는 인간 본성의 한계와 극복 방안을 담은 이 글은 세월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 성찰의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한다.
헌신에는 있고, 광기에는 없는 것은 ‘의심의 그림자’와 ‘불확실성’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여지와 여백’이다. 막힌 담을 헐고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가 옳을 수도 있다는 ‘여지와 여백’이 아닌가 한다. ‘의심의 그림자’와 ‘불확실성’이 없는 사람과는 누구도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화란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바뀌는 상호작용이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가치관의 공존을 위한 여지와 여백
20세기 현대사를 지나온 세대들의 가치관과 관점을 거칠게 구분한다면 6·25전쟁을 겪은 산업화세대와 독재 투쟁의 경험을 안고 있는 민주화세대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세대는 성 정체성, 지방과 서울, 금수저와 흙수저 등 각자의 경험과 만남 속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가치관과 관점이 촘촘히 분화되고 있다. 20세기는 계급이 만들어낸 이념과 현실의 경험으로 가치관과 관점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면, 21세기에는 ‘정치적 부족주의’ ‘정체성 정치’라는 표현처럼 다양한 가치관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수많은 부족을 이루고 있다. 부족 간의 대화가 단절된다면 21세기는 20세기 냉전 시대의 갈등을 넘어선 갈등과 분열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교회는 다양한 가치관과 관점으로 부족화되고 있는 시대에 막힌 담을 헐고 대화의 물꼬를 틔울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의심의 그림자’와 ‘불확실성’에 열려있어야 한다. 광기의 조짐이 보이는 대다수 사람도 자신은 ‘의심의 그림자’와 ‘불확실성’에 열려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본능은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하기에.
자신의 열정과 진정성에 ‘여지와 여백’이 있어 헌신에 가까운지, 광기에 가까운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자신의 주변에 자신과 같은 가치관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만 있는지, 다른 생각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에게 ‘여지와 여백’이 있는지는 자신과 다른 생각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잘 안다. ‘여지와 여백’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를 꺼리게 된다. 내 주변에 나와 다른 관점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없다면, 다른 관점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 대화하는 것을 꺼린다면 내가 헌신이 아니라 광기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위기 경보가 울리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여지와 여백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생각을 판단하지 않고 먼저 부지런히 듣는 것이 필요하다. 저 사람은 왜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어떤 경험이 저 사람의 생각과 관점을 만들어 내었을까 생각하고 계기를 알게 된다면, 나와 다른 가치관과 관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해는 할 수 있다. 동의하지 않지만 이해할 수 있다면 대화는 가능하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지난 대선 이후 4월에 진행했던 ‘기독교 운동과 정치: 대선 이후의 대화’ 집담회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민주당 복음주의’에 비판적인 발제자 3명과 ‘민주당 복음주의’에 대한 해명을 하고픈 발제자 1명으로 구성되었다. 후자가 〈복음과상황〉(제379호) ‘무브먼트 투게더’의 필자인 윤환철 활동가였다. 대선 국면, 발제자들 모두 각자의 정치적 우려를 SNS에 썼기에 윤환철 활동가도 발제자들의 생각을 모르진 않았을 테지만 서로의 생각을 더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불편할 수 있는 자리임에도 기꺼이 응했다고 느꼈다. 이후 8월 소그룹 집담회에도 청년 세대의 생각을 듣고자 참석하는 모습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감동을 받았다. 본인의 생각을 검증하기 위해 계속해서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담회가 끝나도 각자의 생각들은 바뀌지 않았지만 나와 다른 관점의 생각을 들어보려 하는 윤환철 활동가의 마음과 자세는 필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여지와 여백이 주는 힘이 아닌가 한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대화하기는 쉽지 않다. 초기 인류가 살았던, 사방에 위협이 가득한 사바나 시절에 각인되었던 낯섦에 대한 경계와 공포가 유전자 어딘가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런 경계와 공포는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 본능과 끈질기게 엮이어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