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호 사람과 상황] 대구지방검찰청 중요경제범죄조사단 임은정 부장검사
임은정 검사는 오랫동안 검찰 내부를 비판해온 ‘내부 고발자’다. 그는 2007년 일명 ‘도가니 사건’(광주 인화원 아동 성폭력 사건) 공판검사를 맡으며 ‘도가니 검사’로 알려졌다. 2012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던 박형규 목사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구형했는데, 당시 검찰 상부에서는 백지구형(검사가 형에 대하여 특별한 의견이 없으니 법원이 알아서 형을 정해달라는 의미로 형량을 일임하는 것이다. 재심 사건이나 재정신청 사건에서 종종 일어난다)을 지시해놓은 상태였다. 같은 해 고 윤길중 과거사 재심 사건에서는 상부 지시를 어기고 소신 있게 ‘무죄 구형’을 하며 주목받았다. 그 후 임 검사에게 돌아온 것은 정직 4개월 징계 처분이었다. 그는 징계 취소소송을 하여 2017년이 되어서야 승소할 수 있었다.
그를 향한 검찰 내부의 시선은 곱지 않다. 7년마다 실시되는 검사 적격심사에 회부되어 퇴직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e-PROS)에 검찰의 반성과 개혁을 요구하는 글을 90여 차례 올렸으며, 검찰을 향한 비판은 언론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그는 2018년 남부지검 성폭력 은폐 사건을 고발했고, 2019년 부산지검 고소장 위조 등 사건 은폐를 고발했다. 지난해 한동훈 법무부장관 취임 후 이뤄진 대규모 검찰 간부 인사에서 법무부 감찰담당관이던 임은정 검사는 대구지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현재까지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검찰 외부에선 그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높다. 10년 동안 상식적이지 않은 조직 문화를 없애고 개혁하기 위해 싸워온 그에게 이 싸움을 멈추지 않는 이유와 동기를 물었다. 그의 말에는 사건마다 지키고 싶은 신념과 신앙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 지난 7월에 검사님이 쓰신 《계속 가보겠습니다》(메디치미디어) 첫 장엔 아가 2:10이 나옵니다. 책을 접한 후에야 검사님이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언제부터 신앙생활을 하셨나요?
어릴 때부터요. 친구들 따라 성당과 교회를 다녔는데, 아버지가 교회를 싫어했어요. 그래서 저도 교회를 가지 않았죠. 대신 매일 하나님께 찬양하는 동시를 쓰고 잤어요. 우리 집 형편에 성경을 사기는 어려웠어요. 중학생 때 친했던 ‘술라미’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부모님이 의사였고 형편이 넉넉했어요. 제가 술라미와 얘기하던 중 성경책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술라미가 선물해줬어요. 그때부터 매일 성경을 읽고 잤어요. 기도도 혼자 했고요. 고등학생 때, 저희 둘째 언니가 아버지 몰래 교회를 다녔는데,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언니를 탄압했어요.(웃음) “학생이 공부해야지 교회를 왜 가!” 하면서요. 대학 가서 주일마다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어느 목사님이 제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자생 기독교’라고 하시더라고요.
- 교회 영향을 덜 받으셨겠어요.
대학생 때 선교단체 모임에 갔는데, 선배들이 고린도전서를 설명하면서 사도 바울 시절의 남존여비 사상을 그대로 답습한 듯한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때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사도 바울 시절, 사도 바울의 하나님이셨고, 지금 내 하나님이기도 하시다”라고 하면서 박차고 나왔어요. 아마 그때도 말씀에 대해 저의 해석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 얼마 전 ‘NCCK 인권상 특별상’을 받으시며 수상소감으로 박형규 목사 재심 사건을 언급하셨는데요. 박형규 목사에 대해 무죄 구형을 하며 박 목사처럼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밝히셨습니다.
2012년 박형규 목사 민청학련 재심 사건을 맡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무죄라, 무죄 구형 논고문을 준비하면서 어떤 분이신지 찾아봤어요. 이런 분의 재심 사건이라면 검사로서 내 마지막 사건이 된다고 하더라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뜻밖에 무죄 구형이 일사천리로 결재 났죠. 무죄 구형만 하기에는 부족했어요. 검찰의 잘못을 사과드리고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전할까가 고민이었습니다. 일주일 정도 논고문을 고민하다가, 재심 있는 날 아침 재판 들어가기 직전에 논고문 초안을 완성했습니다. 제가 쓴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박 목사님을 칭찬해주시는 것 같았어요. 쓰임 받는 것도 영광이고, 이렇게 칭찬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때 박 목사님처럼 하나님께 칭찬받는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한 것 같아요.
판결문에 담긴 논고문 일부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하여 권력의 채찍에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몸을 불살라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 온몸으로 민주주의의 싹을 지켜낸 우리 시대의 거인에게서 그 어두웠던 시대의 상흔을 씻어내며 역사의 한 장을 함께 넘기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위반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는 헌법에 위반되어 무효인 법령이므로 무죄이고, 내란선동죄는 관련 사건들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관련 증거를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정권교체를 넘어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한 폭동을 선동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해에 바로 고 윤길중 재심 사건을 맡게 됩니다.
박 목사님 때 다짐해놓고, ‘왜 하필 또 접니까’ 절망적인 심정이었어요. 박형규 목사 재심 사건으로 간부들에게 불려 다니며 마음고생 심했거든요. 제 과거사 반성 논고에 소위 공안통들이 모욕당했다고 생각하고 이를 갈았습니다. 과거사 재심은 공안 사건이라, 규정상 공안부 검사가 법정에 나가 공소 유지를 해야 하는데, 마치 바지사장 세우듯 만만한 공판부 검사를 대신 내세워 공안부 뜻대로 ‘백지구형’하게 하고, 무죄판결에 항소해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대로 무죄 구형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공안부는 공안부대로 공판부 검사가 나가서 자기들 입맛대로 구형하고 항소하라는 입장을 강경하게 유지했어요. 중간에 낀 공판부장이 제 입장을 확인하고 이 모 검사에게 법정에 들어가 백지구형하라고 지시했지요. 그날이 재판까지 일주일 남았을 때였어요. 주일예배에서 사도신경을 외우는데, 여기서 발을 빼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본디오 빌라도와 내가 뭐가 다를까 싶었습니다. 제가 가만있으면 백지구형과 무죄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는 검찰의 악습이 계속 반복되는 거잖아요. 저는 그날 제가 무죄 구형을 하고 사직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무죄 구형 며칠 전, 도망가지 말자고 마음을 고쳐먹고, 징계 청원으로 글을 고쳤지요. 2012년 12월 28일 아침 무죄 구형 시간에 맞춰 제 글이 검찰 내부망에 공개되도록 예약 게시하고, 법정에 들어가 무죄를 구형했죠.
- 담당자가 이 모 검사로 바뀐 건데, 임은정 검사님이 구형하신 건가요?
그래서 제가 4개월 정직이라는 징계를 받았는데, 징계 취소소송에서 승소했어요. 부장이 검사 교체 지시를 한 건데, 부장은 검사를 바꿀 권한이 없거든요. 검사장 권한입니다. 또 서울고등법원에서 백지구형은 적법하거나 정당한 구형이 아니라고 판결하기도 했고요.
법정에서 검사가 구형하면 소위 ‘낙장불입’이에요. 이 모 검사가 법정에서 백지구형하기 전에 제가 무죄 구형하고 법정에서 죽으리라 하는 심정이었죠. 무죄 구형하는 날 아침, 법정 법대 뒤편에 있는 검사 출입문을 걸어 잠갔는데, 이 모 검사가 문이 잠겨있어서 그 문으로 못 들어오고 법원 청사를 돌아 민원인 출입문으로 뒤늦게 들어왔어요. 무죄 선고 중이었는데, 저도 겁에 질려있었고, 후배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습니다.
- 이 사건으로 정직 4개월이 결정되면서 징계 취소소송에 들어갑니다. 검사 수뇌부와의 싸움도 그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지요?
네. 그때 저는 정말 무서웠어요. 죽을 줄 알았는데 죽지는 않았으니까 각오했던 것보다 덜 아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아프기도 했어요. 검사 징계위원회 출석을 앞두고 기도했어요. 늘 기복신앙에 가까운 기도만 하다가, 생애 처음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흉내 냈지요. ‘이 잔을 내게서 돌리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솔직히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내용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저를 측은하게 여겨 살려주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어요.(웃음) 결과는 정직 4개월이었잖아요. 그때 많이 울었죠.
검사 징계위원회가 열렸을 때 예수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저와 함께 대기했던 사람들이 다단계 회사 관계자에게서 8억 원 이상 뇌물받은 혐의로 구속된 김 모 부장검사, 서울동부지검에서 실무 수습 중에 검사실에서 피의자와 성관계한 초임 전 모 검사, 자신이 수사 중인 사건 피의자에게 매형을 변호사로 선임하도록 알선한 박 모 검사였어요.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생각이 났어요. 예수님이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었을까, 예수님이 아닌데 왜 평범한 나한테 이런 일이…, 별의별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정말 그전까지 온실 속 화초였단 말이에요. ‘도가니 검사’라고 사랑받고 일 잘한다고 칭찬 들으며 1지망 희망지로 늘 발령 나던 검사여서 선후배들에게 밥 먹자 술 먹자 연락이 끊이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동료들이 손가락질하고 막무가내 검사, 얼치기 운동권 검사라고 언론에서 비난했어요. 그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막 들더라고요. 제가 했던 일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욕을 먹으니까 흔들리더라고요.
- 검사 조직 안에 고충을 나눌 신우회나 모임은 없나요?
신우회가 있긴 한데요. 검사 조직의 문제들을 문제라고 말하다가 탄압받은 시간이 10년이라 너무 길잖아요. 예컨대, 대검에 근무할 때는 야근은 물론 점심도 같이 먹자고 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때 대검은 추미애 장관이 윤석열 총장을 치려고 보낸 자객처럼 절 취급하는 분위기였거든요.(웃음) 야근할 때나 주말에 남편이 샌드위치, 빵 같은 걸 갖다주러 종종 왔었는데, 신랑 출입 기록을 가지고 극우 매체에서 공사 구별 못 하고 남편을 사무실로 들인다는 기사를 쓰려고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인간극장〉이었나요? 야근하는 남편을 위해 검사실에 도시락 싸 들고 들어오는 아내를 미담으로 방송하던데, 제가 그러면 공사 구별 못 하는 거라고요. 제가 신우회장일 때는 몇 명 모이지 않던 신우회 예배였는데, 제가 전출한 후 검사장이 신우회를 챙기자, 검사들이 피아노를 치며 성가 합창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슬프죠.
- 가까운 사람들의 외면은 더 아프게 느껴질 것 같아요.
이명박 정부 시절, 제가 잘나가는 법무부 검사였는데, 학교 후배라며 인근 검찰청에 근무하니 밥 사달라고 불쑥 연락하는 검사가 있었어요. 모르는 사이인데, 제가 잘나갈 때이니 알고 싶고 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때라. 제가 무죄 구형한 이후에도 제가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연락을 끊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이었어요. 검찰에서 제가 대나무숲 같은 역할을 했거든요. 본인이 힘든 일이 있으면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고. 어느 날인가 그 후배가 되게 뿌듯해하면서, 이프로스 제 글에 댓글을 달았다고 하길래, 기특해서 보려고 최근 제 글을 열어보니 댓글이 없는 거예요. 찾아보니까 이제 아무도 보지 않는 아주 오래전 글에 댓글을 달았더라고요.(웃음)
한번은 병가 기간에 의정부지검에 나와서 후배 컴퓨터를 빌려서 이프로스에 글을 올린 적이 있어요. 조력자 색출 지시가 떨어졌고, 각 부 기획검사가 검사실을 돌아다니면서 누가 컴퓨터를 빌렸는지 확인하고 다녔습니다. 후배는 부장실로 끌려가 다시는 빌려주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어요. 이런 작업이 의정부지검, 수원지검 등지에서 이루어졌어요. 발각 위기에 처한 또 다른 후배가 제게 급히 전화를 걸었는데, 제가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를 보내더군요. ‘저도 큰일 나는 거예요?’ 다들 임은정을 부인했어요. 급기야 생존을 위해 색출 작업에 가담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할 때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생각해봤어요.
- 이런 일들을 겪으면, 조직원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 신뢰하기가 어려워질 것 같아요.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시잖아요. 저는 그게 안 되던데요.(웃음) 죽기 전에는 용서할 건데요. 침묵하는 사람들은 이해해요. 무서우니까. 저도 그랬으니까요.
서지현 검사의 미투에 제가 ‘위드유’를 했었잖아요. 그런데 당사자 이름은 밝히지 않았어요. 어느 날 제가 하나님께 제가 ‘그를 용서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했더니 마음에 평화가 오더라고요. 저는 그때 용서한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 이명박 정부 시절 검사장이 될 뻔한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이 법무부를 통과해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검사장 승진자로 올라갔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용서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저는 이 사람이 천벌 받는 걸 전제로 용서했던 거죠. 용서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스스로 고통스럽지 않을 때가 되어야 비로소 용서를 할 수 있어요. 계속 피를 흘리고 있을 때는 용서할 수가 없죠. 세상은 금방 바뀌지 않잖아요. 저도 서서히 미움을 놓지 않을까요?
- 힘들 때 위로가 된 건 무엇이었나요?
검사들이 ‘임은정은 언행에 신중하라’ 집단 댓글 놀이를 할 때, 정말 억울하고 분하더라고요. 그때 며칠 잠도 못 자고 눈물이 쏟아졌는데, 신랑이 여행을 가자고 하더라고요. 부마항쟁 기념비가 있는 부산대에 갔다가 국립3·15민주묘지에 갔다가 국립5·18민주묘지에 데리고 갔어요. 제가 송건호 언론상을 받은 적 있어요. 송건호 선생님 묘가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 있어요. 저는 별생각 없이 그 앞에 섰는데 남편이 송건호 언론상 수상 선정 사유를 낭독해주는 거예요. 늦은 겨울, 초봄쯤이었어요. 햇살은 따뜻한데 잔디는 말랐고, 이곳에 잠들어있는 분들이 조용히 귀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이분들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고생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이제는 게시판에 있는 독한 말들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죠. 모진 고문도 아니고 안 보면 되는 말들에 불과한데요. 아예 신경을 안 쓸 수는 없겠지만, 연연하지 않겠다고요.
- 검사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엘리트잖아요. 그런데 그런 분들이 두려움에 벌벌 떤다는 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분들의 두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건가요?
검찰은 구성원 개인보다 조직이 강조되는 집단이잖아요. 조직 외각이 튼튼하죠. 내부는 순두부 같아요. 되게 약해요. 수사권, 기소권을 가지고 외부에 큰 힘을 휘두르는데, 그런 것들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개인에게도 향할 수 있죠. 되게 무섭죠. 조직이 적이 되면 버티기가 힘들어져요. 검사들은 그걸 너무나 잘 압니다. 더군다나 좁은 사회거든요. 김홍영 검사가 왜 목숨을 끊었겠어요. 김 검사는 2015년 직속 부장과 귀족 검사가 동료 검사들을 추행하는 것을 보았고, 대검까지 나서서 성폭력 범죄를 덮고 거짓 해명하는 모습도 보았어요. 2016년 갑질 피해를 입고 하소연할 데가 없는 김 검사는 결국 하늘로 간 거죠. 땅에서는 검찰로부터 도망칠 곳이 없거든요.
그렇게 내부에서 법이 안 지켜지고 스폰서, 전관, 정치권 등과 적당히 타협하고, 이런 것들이 일상화된 죄의식 없는 조직이라는 건 말을 하지 않으면 국민들은 알 수 없죠.
- 검찰 개혁의 희망은 어디에 있나요.
저는 정치권을 그리 믿지 않아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정치는 어느 정도 타협을 해야 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땅에 뿌리내리고 신념을 지키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여리고성이 어떻게 무너졌나요. 성궤를 들고 침묵하면서 일곱 바퀴를 돌다가 결국 함성을 지르는 사람들 때문에 무너졌잖아요. 저는 그게 시민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민이 움직이면 정치인들도 어쩔 수 없죠. 갑자기 변화되는 게 아니라 천천히 조금씩 달라지겠죠. 깨어있는 시민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이 되는 일이 중요하죠. 시민들을 깨우는 목소리가 제 역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변화의 시기가 결국 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세 때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잖아요. 눈앞에 있는 이익을 보는 게 아니라 하늘을 보는 거고,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보는 거죠. 그게 소명이자 사명이고 믿음인 것 같아요.

- 검사님 책에는 신앙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동안의 이력을 말할 때 신앙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려워서 그렇게 쓰셨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신앙이 아니었으면 저는 견딜 수가 없었을 거니까요. 박형규 목사님 재심 사건을 할 때는 정말 벅찼거든요. 하나님께서 저를 쓰신다는 게 느껴져 감격스러웠어요. 과거사 재심 사건 같은 경우도 60년 뒤에 무죄 선고가 났으니까요. 길어도 60년이면 세상이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죠. 사육신이 신원되기까지 한 340년 정도 걸리는데 저로서는 너무 긴 것 같고요. 저는 한 60년 뒤면 내 억울함을 세상이 알아줄 것이다, 60년 정도만 견뎌보자 했어요. 징계 취소소송을 하면서 5년 만에 승소했고요. 7년 만에 무죄 구형하라는 과거사 재심 대응 매뉴얼이 만들어졌죠. 60년 바라봤는데 7년 만에 바뀌는구나 싶어 놀라고 감사했습니다.
저는 검찰 개혁 중기, 단기 프로젝트를 계획해뒀어요. 어떤 분은 제게 정년까지 있으라고 하던데, 제가 너무 힘들 것 같지 않나요.(웃음) 물론 할 수도 있겠지만요. 힘들어서 그렇게 길게 생각하지는 않고, 5년 이상 걸리는 중기 계획들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나가기를 원하는 분들도 꽤 있는데요. 지금 나가기는 싫고요. 저는 국가배상 소송을 하고 있으니까, 대법원 판결을 받을 때까지는 아무리 괴로워도 버티려고 해요. 징계 취소소송으로 무죄 구형 매뉴얼이 만들어지기까지 무죄 구형부터 7년이 걸렸으니까 국가배상 소송도 지금까지 4년이고, 앞으로 5년에서 7년 정도 각오하고 있어요. 그사이 고발 등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계속 병행할 생각이고. 대법원 판결을 받은 훗날 여전히 싸울 힘이 남아있다면 나가지 않고 또 다른 중기 계획을 세울 생각입니다.
저는 예레미야를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아요. 검찰이라는 조직에 애정을 품고 있으니까 바로 서라고 고언을 하는 거죠. 검찰은 언젠가 부서지고 무너지고 결국 새로 서게 될 텐데 그때를 준비하면서 일몰의 검찰 안에서 기록하고 일몰을 맞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죠.
- 이번 호 커버스토리 주제가 ‘안전’입니다. 어떤 조직이든 사회든 안전한 공간으로 바뀌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게 슬픈 일입니다.
‘내부 고발자’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해요. 누군가 문제가 있다고 의견을 냈을 때 흔쾌히 받아들여진다면, 그 사람은 내부 고발자가 아니라 좋은 의견을 낸 능력자가 되는 거니까. 내부 고발자가 있다는 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모든 걸 걸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고 모든 걸 걸어야 외칠 수 있다는 사회라는 말이죠.
내부 고발자라고 하면 따라오는 숙명 같은 그림자가 있잖아요. 내부 고발자가 받게 될 핍박은 내부 고발자가 많아질수록 줄어들어요. 한 명에서 두 명이 되고 두 명에서 세 명이 되면 그만큼 위험 부담이 줄어들죠. 누군가 주변에서 용기를 내어 말할 때 외면하지 말고 ‘저도요’ 한마디만 해줘도 상황은 달라져요. 누군가 무너지는 기둥을 받치고 있을 때, 힘든 일이라고 외면하고 도망가버리면 건물은 무너지고 맙니다. 힘을 모아서 기둥을 바로 세워야 건물이 무너지지 않죠.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까, 내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안전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안전해지기 위해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일의 나도 안전하지 않을 겁니다.
정리 정민호 기자 pushingho@gosco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