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호 나의 순정만화 순례]
나는 순정만화잡지계 우등생이었다. 순정만화잡지계 레전드 〈윙크〉의 전성기 시절에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나 언니가 둘이나 있는 관계로 어깨 너머로 대한민국 최초의 순정만화 전문잡지 〈르네상스〉와 두 번째 잡지 〈댕기〉까지 읽었으니까! 〈윙크〉는 창간호(1993년 8월 1일 자)부터 몇 년간 모았고 지금도 소장하고 있다. (이때부터 시작된 종이잡지 수집병. 집안 구석구석 내가 모은 잡지들로 시시때때로 가족의 화를 돋움.) 〈윙크〉 창간호 앞표지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상큼함이 느껴지는 원색 톤으로 이은혜 작가 캐릭터들이 채웠다. 창간호에 작품이 실린 강경옥, 신일숙, 이은혜, 박희정, 나예리 작가 라인업은 지금 봐도 ㄷㄷ. (당시 창간호 부록이었던 이은혜 일러스트 틴케이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나, 제정신이냐.)
매월 1일과 15일에 나오던 격주간 잡지 〈윙크〉를 학교 앞 문방구 겸 서점에서 구입해 소중히 안고 교실에 들어와 내가 먼저 일독하고 나면, 나의 〈윙크〉는 우리 반을 한 바퀴 돌고 옆 반까지 원정을 다녀왔다. 두 개 반 학생들 손을 거쳤음에도 처음 샀을 때처럼 거의 깨끗한 상태로 다시 도착했으니, 책이 갈라지지 않게 책등 꼭 쥐고 열독한 내 고교 동창들의 도서 대여 윤리 의식에 새삼 감탄이 밀려온다.
미술 시간이 체육 시간 다음으로 괴로울 정도로 그림을 못 그려서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만든 만화 동아리에 끼지는 못했다. 그림 실력이 뛰어난 베프 덕에 그들이 엮은 만화 창작집 한 권 얻은 적은 있다. 그 시절 우리는 (웬만하면) 함께 순정만화를 사랑했다. 내 분야는 중학교 때부터 팬픽을 ‘쓰는’ 쪽이었다. 만화 창작에 스토리 작가가 따로 활동하기도 한다는 개념을 모르던 때라 내 자리는 그저 만화를 ‘읽고 비평하는’ 일이라고 진작 결정했던 것 같다.
대학 다닐 때는 더욱 진지하게 순정만화를 읽으며 만화평론가(웹툰평론가 아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루 정도 고민한 적도 있다. 아마 김혜린의 《비천무》를 읽고 난 다음이었을 거다. 왜 이런 작품을 아직도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지? 순정만화는 왜 더 많이 읽히지 않는 거지? 이렇게 놀라운 세계를 지니고 있는데! 참을 수 없었다. 많은 것을 사교육 시장에서 배운 모범생은 학원 등록을 할 길이 없었으므로 일단 참기로 했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 커뮤니티가 모두 활발했던 2000년대 초중반이었던지라 만화책 읽은 감상을 한양 죠이 ―당시 내가 활동했던 대학 선교단체― 게시판에 구구절절 올린 적도 있다. 내 감동을 가장 먼저 나누고 싶었던 가까운 사람들이었으니까. 지금은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이 소중한 소통 매개이자 영향력을 갖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래, 지금은 어떤 콘텐츠를 읽고 감동이 일면 인스타 스토리에 ‘독백’ 중이다. 좀 쓸쓸하다.
그래서일까. 복상 연재 〈나의 최애들〉 시즌1이 끝나고 시즌2에 어떤 글을 쓸까 고민하는데 내 머릿속에 순정만화를 소개하고 싶다는 열망이, 불타오른 것까지는 아니고 문득 떠올랐다. 교복 입고 학교 근처 벤치에 앉아 만화책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었던 것 같다. “미래는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을 열심히 읽고 있었는데 그때 근처 남중고생들이 지나가며 날 비웃던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순정만화 읽고 있나 봐.(낄낄낄낄)”
지금 글을 쓰면서도 좀 믿기 어려운데 바로 저 태도가 당시 순정만화의 위상(!)을 단번에 알려주는 장면이기는 하다. 여자 중고등학생이 순정만화를 읽는 모습은 대사회적으로 지지받지 못했달까. 여학생과 순정만화 조합, 심히 불온. 아니, 심히 우스운 조합이다. 순정만화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큰 눈의 공주가 나오는 이야기일 텐데, 교복 입고 저렇게 진지하고 당당하게 열독하는 소녀라니. 권김현영 표현을 빌리자면 “순정만화는 눈물을 펑펑 흘리는 과잉 멜로 장르의 다른 말”이었다. 이 표현이 나온 글 ‘순정만화, 여성들의 정서적 문화동맹’에서는 남학생이 화장실에 숨어 순정만화를 보다가 친구들에게 들켜 놀림받다가 인터넷 순정만화 동아리를 찾아 행복을 찾았다는 당시 인터넷 광고를 언급하며 황미나 작가의 일갈을 인용하기도 한다. “순정이 무시되는 것은 남성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기 때문이며 사회적 아웃싸이더인 여성이 그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시 순정만화에 대한 사회적 상식이었다는 게 여성주의 연구자의 분석이다. 어쩌면 난 그 사회적 상식을 온몸으로 경험한 셈이다.1)
재미는 기본이고 역사와 시간을 다루는 스케일, 완성도 높은 서사 퀄리티, 심오한 인간 내면 탐구, 로맨스보다 깊은(?) 남녀 관계의 스펙트럼, 무엇보다 당시 어떤 매체에서도 볼 수 없었던 순정 없는(!) 여성 캐릭터의 향연이 ‘순정만화’라는 네 글자에 갇혀 평가절하당하던 그 순간, 어린 마음에도 속으로 ‘저 무지한 놈들… 아무것도 모르면서…’라며 화를 냈다. (나 순정만화 사랑하나 봐.) 그때 읽은 순정만화들이 내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일일이 규명할 방법은 없다. 순정만화는 그저 내 삶 곳곳에 ‘순며들어’ 피와 살이 되었으므로. 나와 같은 ‘갬성’과 경험을 지닌 이들이 앞서 《아무튼, 순정만화》(이마루, 코난북스, 2020),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전혜진, 구픽, 2020), 《안녕, 나의 순정》(이영희, 놀, 2020) 등을 썼고 이 책들을 읽으며 말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2020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런 책들이 한꺼번에 나왔으니 말이다. 2020년 12월에는 알라딘에서 무려 《아르미안의 네 딸들》 레트로판 20권 세트 북펀드까지 이루어졌고 펀딩 당일 목표 금액을 달성했으며, 당시 “124,676,800원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펀딩 금액을 달성”했다. (나도 당당히 펀딩 참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그 시절 순정만화를 사랑했던 이들이 이제는 목소리를 낼 위치에 서고, 돈도 가졌나 보다. 다 가졌네.
아무튼 그런 현실적 이유도 있겠지만, 어쩌면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흥했던 순정만화는 2020년대인 지금에 더 어울리는 캐릭터와 서사, 주제 의식을 지녔기에 다시 소환된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보는 거다.
여성의 삶이 얼마나 형형색색이며 주체적일 수 있는지 전 사회적으로 그 감각을 공유하는 오늘. 오래된 미래처럼 먼저 도착한 생동하는 여성 서사는 참으로 시의적절하지 않은가. 자기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그리스 신화 속 신들과 인간의 조력을 받으며 인생은 ‘여정’임을 보여주는 《아르미안의 네 딸들》 속 아마조나 레 샤르휘나,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질문하며 자기가 쟁취해야 하는 권력의 자리에 대해 사색하는 《별빛 속에》의 지적인 여자 군주 시이라젠느, 적으로 만났지만 남성들이 구축한 세계 역사를 바꿔보고자 다른 방식으로 투쟁하며 끝내 연대의 마음을 나누는 《불의 검》 속 두 무녀 소서노와 카라. 이렇게 운명을 개척하는 여성들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말, 여성 연대의 여러 빛깔이 촘촘히 박힌 1980-1990년대 순정만화는 오늘 우리가 재발견해야 할 여성 서사의 보고다. 여성 서사는 많을수록 좋다. 아직 지구상의 여성 인구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게 여성 서사니까.
‘소녀들이 보는 과잉 멜로의 유치한 만화’라는 편견으로부터 벗어난 순정만화의 해방은 2020년대가 도래하기 직전 한국 사회 변화와 관련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연재에서도 말했듯 2015년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삶은 피부로 느끼게 달라졌으므로. (감이 안 잡히신다면 ‘페미니즘’을 키워드로 2015년에 한국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시길 권한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변하고 있고 출판물 내용도 그때 이후로 쌈박해졌다. 이런 맥락 속에 귀환한 그 시대 순정만화의 해방은 곧 그 만화를 읽고 세계관을 형성하고 지성과 감성을 연마한 여성 문화 향유자들의 해방이기도 하다.
마음껏 이야기해 보라고! 너를 만들었고 네가 좋아했으며 네가 누렸던 그 어떤 것들이든.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거대한 것과 사소한 것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어진 지금!
시대가 막 이렇게 소리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귀에만 들리나? 해방 공간을 맘껏 누리다 보니, 숨어있던 순정만화가 소환되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나도 목소리를 보태고 싶어졌다. 1980년대에서 2000년대에 출판된 순정만화의 진가를 혼자 알고 있기 아까워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던 오래된 열망을 지금, 오늘, 펼칠 수 있게 된 이유를 참 길게도 말했다. 그동안 사소한 것으로 취급받았으나 사실 엄청난 세계를 품고 있는 순정만화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나 지금 되게 신나. (갑자기 반말 죄송.)
그러니까 10대에 순정만화를 읽고 성인이 되어 자기 목소리와 (책 살) 돈을 가지게 된 평범한 한국 여성이 여성 정치인, 여성 전사, 왕위를 계승받기 위해 투쟁하는 여성 왕위 계승자, 여성 기술자, 소위 ‘여성성’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은 외양과 성향의 여성 주인공을 영화와 드라마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일찌감치 순정만화에서 만났던 이야기를. SF와 판타지와 미스터리와 호러 장르를 처음 접했던 통로가 순정만화였던 이야기를. 세계 역사와 서양 고전과 한국 고대사와 한국 고전문학과 심지어 천문학까지 입문하게 만들어준 순정만화 이야기를. 페미니즘과 퀴어의 세계를 가르쳐준 놀랍도록 선도적인 그 순정만화 이야기를. (순정만화 만세!)
좀 거창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재밌자고 쓰는 글이다. 그러면 안 돼? (갑자기 반말 죄송 2.)
1) 권김현영, ‘순정만화, 여성들의 정서적 문화동맹’, 〈여성과 사회〉, 한국여성연구소, 2001년 3월, 121쪽.
박혜은
문화기획자. 뉴스레터 〈에밀앤폴〉 발행인. 책을 직접 만지는 일에서 책 문화를 다루는 일로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