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호 성경으로 보는 세상만사] 시골 할아버지가 ‘젊은 파수꾼’들에게

필자는 본지를 통해 ‘칼을 의지하는 ‘제국의 평화’를 거부하라’(2016년 9월호), ‘국가 공동체의 두 기둥은 정의와 사랑이란다’(2016년 12월호), ‘‘촛불’은 권력에 취한 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싸움이란다’(2017년 1월호), ‘죄를 벌하지 않는 공동체는 망한다’(2017년 4월호), ‘코로나19 사태와 문명에 대한 성찰’(2020년 4월호) 등 성경으로 사회 전반을 통찰하여 젊은 세대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글을 써왔다. 이번이 여섯 번째 편지이다. — 편집자 주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을 때 편지를 쓴 후로 3년 만이구나. 정전 70주년을 맞아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에 관해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하다가 어렵게 펜을 들었단다. 요즘은 교회나 사회나 평화에 대한 개념이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할아버지 마음이 무척 무겁단다. 성경을 쓴 누가 이야기로 시작을 한다. 

누가는 마가와 마태와 함께 예수의 구원 사역을 증언하고 있지. 그런데 한 가지 누가에게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아마도 마태와 마가의 복음서를 알고 있었을 누가는 예수가 승천하고 계시지 않은 이 땅에서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었는지 증언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아. 즉 예수 부재의 세상에서, 승천한 예수는 어떻게 제자들을 통해 일하였는가에 대해 증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 그래서 처음부터 사도행전을 쓸 계획을 가지고 누가복음서를 썼단다. 그리고 마가와 마태의 구원사적 증언을 따르면서도 한 가지를 더 첨부하여서 강조했어. 그것이 바로 오늘 말하려는 ‘평화’(샬롬)란다. 예수 승천 후 예수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갔던 제자들의 구원 사역과 예수 생전의 구원 사역을 연결하는 고리가 ‘평화’였다고 누가는 증언하고 있는 것이지.

가짜 평화, 가짜 정의, 가짜 구세주가 지배하는 역사 한복판에서

그런데 ‘평화’는 로마의 자랑이었단다. 로마가 내세우는 로마제국이 이전의 어떤 제국도 실현하지 못했던 역사적 ‘세계 평화’를 이루어냈다는 자부심이 있었지. 그것은 그들이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존재 이유이자 명분이 되었지. 또 그들은 이전의 어떤 제국도 이루어내지 못했던 정의의 세상을 만들었다고 자부했어. 그러니 로마의 자랑은 ‘평화’와 ‘정의’였던 것이지. 로마의 동전에 새겨진 글들과 황제들의 무덤에 새겨진 글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어. 그래서 로마는 이미 예수가 오기 40여 년 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세계의 평화를 이룩한 ‘평화의 왕’이라고 칭송했단다. 세계의 구원자 곧 ‘구세주’라는 칭호를 그에게 부여했지. 구세주라는 칭호, 왕 중의 왕, 평화의 왕이라는 칭호는 기독교가 만들어낸 칭호가 아니란다. 로마의 창안이지. 기독교는 이 로마 황제에게 붙인 칭호가 한낱 허구에 불과하고 진정한 평화의 왕, 왕중왕은 예수라고 했으니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할 수밖에.

역사상 가장 악랄하고 잔인하게 세계를 정복하여 지배하고 착취해온 로마가 내세우는 프로파간다가 ‘평화’와 ‘정의’였다는 사실은 확실히 기억해두기를 바란다.

누가는 예수 승천 후, 다시 말해 예수가 없는 세상, 예루살렘성전도 없는 세상, 가짜 평화, 가짜 정의, 가짜 구세주가 지배하는 역사 한복판에서, 죽어서도(로마와 그 꼭두각시 예루살렘의 지배 세력에 의해 처형당하고서도) 구원 사역을 계속하는 예수의 참 평화를 증언함으로 로마의 평화, 로마의 정의, 그들의 구세주가 가짜임을 폭로하고 있다. 로마가 떠들어대는 평화, 정의, 구원이 가짜임을 증거하는 것이지. 어떤 의미에선 참 평화의 왕이 예수님의 제자들로 부활했다고 선포하고 있지. 

누가가 말하는 평화는 ①제왕들을 끌어내리기 ②비천한 사람들을 높이기 ③주린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기 등이야.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요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눅 1:52-53, 공동번역)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눅 6:20-21, 새번역)

누가복음에서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청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눅 18:18-30). 그러나 사도행전의 기독자들은 자기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신도들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는 공동체를 시작했어(행 2:43). 누가의 평화 개념을 현대에 맞춰 다시 표현하자면 ①전쟁이 없는 세상 ②굶주림이 없는 세상 ③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해 죽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지(예수도 제자들도 모두 돈 받지 않고 각종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었지).

로마가 힘으로 정복한 세상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정복해 나아가다

누가에게 있어서 죄는 예수를 죽인 것이었어(행 2:23; 3:13-15; 13:28). 왜냐하면 예수를 죽인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가치이자 소망인 평화를 죽인 것이기 때문이지(눅 2:14; 행 10:36) 누가복음은 예수가 평화의 왕으로 왔다고 선언한단다. 누가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는 것은 곧 세상에 평화가 임한다는 말과 같았어. 따라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길은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지(눅 1:50-55).

로마의 평화는 힘에 의한 평화라고 얘기했지?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이긴 자가 진 자를 지배하는 가짜 평화이지. 예수의 평화는 십자가로 이루는 평화란다. 십자가로 이루는 평화가 참 평화이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어떻게 예수가 살아서 십자가로 평화의 세상을 열었고, 부활 승천 후에는 제자들로 부활하여 로마가 힘으로 정복한 세상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어떻게 정복해 나갔는지에 대한 기록이란다.

예수와 스데반 둘 다 예루살렘의 지배 세력(대제사장과 산헤드린)에 의해 죽임을 당했어. 사도행전의 스데반도 죽으면서 복음서의 예수와 같이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의 용서를 빌면서 숨을 거두었지(행 7장). 이 스데반의 (참 평화의)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사도 바울이고, 그 바울이 복음을 들고 로마로 가잖니(행 9장).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과 사도 바울을 통해, 힘으로 세상을 정복한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해가는 이야기가 누가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자 소원은 두말할 필요 없이 평화, 즉 함께 사이좋게 사는 것이지. 이기는 쪽이 지는 쪽을 지배하는 평화가 아니야. 이긴 자/집단은 자유를 누리고 진 자/집단은 억압과 착취와 차별을 당하는 상황은 평화가 아니야. 그래서 인류 보편의 소망에 반대하는 일이 죄라고 누가는 말하고 있는 거란다. 누가는 예수를 죽인 것과 스데반을 죽인 것은, 바로 힘에 의한 평화를 거슬러야 할 유대 민족이 대대로 지은 죄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말을 통해 전하고 있는 거야.

누가에게 있어서 예수와 스데반을 죽인 행위는 곧 인류 보편적 가치/소망을 죽이는 행위였던 것이지.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이다

아직도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이야기를 해보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11일, 2023년 외교부 국방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렇게 발언했어.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위협하는 도발에 대해서는 강력한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말이었지.

평화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면, 우리 민족의 최우선 목적은 한반도의 평화다. 평화가 목적이야. 안보는 평화를 위한 수단일 뿐이지, 안보가 목적이 아니거든. 한미동맹은 안보의 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야. 그런데도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지. 율법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단다. 그런데 유대 민족은 수단을 목적으로 삼았기에 죄를 범했다는 것이 바울과 누가 신학의 핵심이지(행 7:51-53).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교회 대다수는 윤석열 대통령의 평화론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이는구나. 그들은 기복적 신앙으로 기독교를 타락시키더니, 이제는 예수를 죽인 예루살렘의 지배층과 같이 십자가의 평화론을 죽이고 있구나.

왜 복음주의라고 자부하는 대형교회들과 그 아류 교회들은 힘으로의 평화론을 지지할까? 할아버지가 고민해본 결과, 그 이유는 다음 셋 가운데 하나다.

① 지배집단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자기들이 지배계급)
② 무지해서
③ 성경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분명 지도자들―목사/신부―은 ①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교인들은 ②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지(행 2:23). 복음주의라고 자부하는 신학자들은 ③의 경우일 가능성이 높아. 성경을 극단적 보수주의로 해석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지. 이와 관련해 사도행전 2장 베드로의 설교와 7장 스데반의 설교를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아, 하나님도 까불면 자기한테 혼난다고 호언하는 망발을 하는 목사들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그들은 기독교가 아니야!)

편지가 너무 길어질 수 있으니, 이번에는 ③의 경우만을 얘기하마. 성경은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지. 하나님은 인류가 만든 가인의 역사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신음을 듣고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셔(출 2:23-25). 이것이 사도행전 2:23에 나오는 ‘하나님의 계획’의 의미란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 극단적 보수주의에 사로잡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누가의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고, 누가가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정리하면 이렇게 되지.

첫째, 하나님의 계획은 역사의 ‘시간표’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란 역사적 시간표가 아니다. 신약에 드디어 ‘때가 되어’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표현이 있지. 그 말은 하나님이 미리 계획해 두었던 때가 ‘되어서’라는 뜻이 아니야.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이 도저히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라는 뜻이야.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맡겨둘 수가 없어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 역사 속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이야. 예를 들면, 나치즘과 파시즘의 탈을 쓰고 2차 대전이 일어나 제국주의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하나님이 연합군 편을 들어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연합국들이 선해서 하나님이 연합국들의 편을 드신 것이 아니야.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연합국들의 백성이든 독일과 이탈리아의 백성이든 일본의 백성이든— 신음을 듣고 더 이상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행동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연합국들은 자만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하나님이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보내셨다는 뜻이야. 흑인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킹 목사라는 모세를 보내셨다는 말이지. 흑인들이 백인들보다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역사의 악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앓는 소리를 들으시고 인간의 역사에 행동으로 개입하신단다.

둘째, 인간의 책임과 무관한 계획이 아니다.

악한 불의의 역사적 상황은 그러한 역사를 만든 세력과 사람의 책임이다. 예수를 죽인 집단과 사람들의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야. 그 집단과 사람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도 벌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 날에도 유죄판결을 받아 벌을 받는다는 말이란다. 한편 그러한 상황을 만드는 역할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책임도 물으신단다. 그러한 악의 집단과 사람들에게 맞서서 싸우지 않은 사람들의 책임도 물으시지. 그러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스데반이라는 모세를 보내셨던 거야. 바울이라는 모세를 보내셨던 것이지.

이스라엘의 창조 신앙은 과학 이야기가 아니야. 하나님은 역사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고 완성하신다는 신앙이지. 하나님은 인간—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단다. 모세를 통해 역사에 개입하신 것처럼 말이야. 출애굽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

셋째, 인간에게 감추어진 비밀이 아니다.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시는 당신의 사랑과 정의를 계시해주셨어. 성서 특히 구약성서는 하나님이 어떤 때에 어떻게 역사에 개입하셨는가에 대한 이야기이지.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인류 역사 개입 사건의 최고점이자 정점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었다고 증언하는 것이고. 그래서 신약성서는 ‘때가 되어서/때가 차서’ 예수가 오셨다고 말하는 거야.

베드로는 십자가 사건이 인간을 위해 스스로 택하신 하나님의 죽음 행동이라고 증언하고 있어. 이 증언을 기록한 것이 신약성서이지. 이러한 성서의 증언은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모세들을 통해 인간이 만드는 악의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계시/예언이야. 오늘날 기독자들은 모두 하나님이 인간의 악이 만들어내는 역사에 보내심을 받은 모세들인 셈이지. 초대교회 모세들의 이야기가 바로 사도행전인 것처럼!

또 우리는 마태가 말한 ‘죄에서 구원’(마 1:21)이라는 말도 오해하기 쉬운데, 마태가 말한 ‘죄에서’는 풀어쓰자면 ①힘의 잘못된 사용(마 20:25-28), ②힘으로 평화를 이룩하여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마 5:38-48), ③경제적 자비의 부재(마 20:1-16)를 뜻한단다. 마태는 이런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한반도에서 예수를 믿는 이들이 수행해야 할 명령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서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어. 한반도에서 평화를 이룸으로써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해야 할 책임이지.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라는 4대 강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남과 북이 사이좋게 살지 못하고 원수처럼 대치하고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계획이 결코 아니지. 오늘의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 기독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한반도에서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집단들이 외치는 ‘힘에 의한 평화’를 반대하고 저지하는 것이 현 한국 기독자들의 의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구나. 나는 ‘젊은 파수꾼’들에게 다음 네 가지 원칙을 고수하자고 말하고 싶다.

①전쟁을 통한 통일은 안 된다. ②한반도를 비핵화 지대로 만들어야 한다. ③전쟁을 위한 비용을 줄여야 한다. ④남과 북은 경제적 협력을 해야 한다. 

이것이 성서가 오늘 한반도에서 예수를 믿는 우리 기독자들에게 주는 명령이라는 사실을 마음을 모아 전한다. 성경을 안 읽어본 사람도 편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많이 덧붙였는데, 지루하게 읽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는구나.

2023년 6월 15일 새벽,
거창에서
시골 할아버지가

전성은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거창고 교사를 시작으로 2006년 교직에서 물러나기까지 41년간 지방 읍내의 학교에서 ‘지천명(知天命)의 교육’에 일생을 쏟았다. 샛별중학교 교장, 거창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으며,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한 바 있다. 퇴직 후에도 교육 정책 및 교사 교육에 관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활발히 이어오고 있으며, 국제성서연합회 세계성경번역센터 한국 편집인으로 성경 번역에도 매진해왔다. 지은 책으로는 ‘교육론’ 3부작인 《왜 학교는 불행한가》 《왜 교육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 《왜 교육정책은 역사를 불행하게 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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