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호 이한주의 책갈피]

영화로도 만들어진 《노예 12년》(열린책들)은 미국 남부에서 12년 동안 노예로 생활했던 솔로몬 노섭의 자서전이다. 이 책에는 주일마다 노예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백인 주인이 나오는데 어느 주일 노예들을 불러 모아 누가복음 12:47을 읽는다. (누가복음을 몇 번 읽었으면서도 있는 줄도 몰랐던 구절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그는 이 구절을 읽어주며 이렇게 말한다.

주의하지 않는 깜둥이들, 자기 주인 나리에게 순종하지 않는 깜둥이들, 그런 깜둥이들은 매를 아주 많이 맞을 거야. … 채찍 40대, 100대, 150대란 말이야. 성서에 그렇게 나와 있어! (《노예 12년》, 130쪽)

 

카렌 암스트롱은 《신의 전쟁》(교양인)에서 미국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두고 격렬한 신학 논쟁이 벌어진 사실을 전하며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노예제 찬성론자는 수많은 성경 텍스트를 마음대로 갖다 댔지만, 노예제 폐지론자는 노예 소유자에 대한 명백한 비난이 성경에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성경의 정신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전쟁》, 446쪽)

성경을 인용하며 노예들을 채찍질하고, 성경을 근거로 노예제를 정당화했던 때가 불과 160년 전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노예제는 성경적인 제도였다.

 

레이첼 에반스는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본 1년》(비아토르)에서 ‘성경적’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질문하면서 성경 몇 구절을 예로 든다. 그중 하나가 신명기 22:28-29이다.

만일 남자가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동침하는 중에 그 두 사람이 발견되면 그 동침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아내로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

레이첼 에반스는 ‘여성이 자신을 강간한 사람과 억지로 결혼해야 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묻는다. 이 시대 아무리 보수적인 목사라도 이 질문에 ‘그렇다’ 대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의 딸을 강간한 놈이 합의금을 들고 찾아와 자신이 딸과 결혼하는 것이 성경적인 해결 방법이라 말하는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불쾌하다.

 

토마스 하디의 고전 《더버빌가의 테스》(문학동네)에 신명기 22장 율법과 관련 있는 대목이 있다. 부잣집 아들 알렉은 자기 집 하녀로 온 테스에게 반해 치근대다 숲으로 유인해 순결을 빼앗는다. (사실 이건 테스의 아버지가 은근히 기대했던 상황이었는데 그는 자기 딸이 부잣집 총각과 맺어져 경제적 도움을 받길 바랐다.)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알렉은 테스에게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 사과하며 원하는 대로 보상하겠다고 한다. 알렉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테스 아버지는 돈을 얻고, 테스는 결혼해서 부잣집 마나님이 될 수 있다. 신명기가 의도했던 그 해법이다. 그러나 테스는 제안을 거절한다.

당신을 정말 사랑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요. … 지금 이 상황에서 사랑한다고 거짓말하는 것이 나한테는 제일 이로울 거예요.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을 만큼의 자존심이 ―보잘것없는 자존심이지만― 남아 있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할 좋은 이유가 있다고 해야겠지요. 하지만 사랑하지 않아요. (《더버빌가의 테스》, 124쪽)

신명기 22장의 율법은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하고도 아무 책임을 지지 않던 시대에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알렉의 제안은 신명기 22장의 율법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적용 사례다. 하지만 테스는 가부장적이고 불공정한 해결을 거부한다. 거짓된 사랑에 자기를 팔지 않는 것이 테스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130년 전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독자들도 신명기의 해결 방법을 따르지 않은 테스를 성경적이지 않다 비판하지 않았을 것 같다.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유년기를 보낸 캐나다 작가 미리엄 테이브스가 2009년 남미 볼리비아의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일어났던 성폭력 사건을 소재로 소설 《위민 토킹》(은행나무)을 썼다.

몰로치나라는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남자 8명이 동물용 마취제를 사용해 마을의 거의 모든 여자를 집단 강간한 사건이 벌어진다. (실제 사건에서는 어린아이를 포함해 151명의 피해자가 있었다 한다.) 마을 원로들과 남자들은 재판받고 있는 가해자들이 마을로 돌아올 수 있도록 보석금을 마련해 도시로 간다. 이때 마을 지도자 피터스는 여자들에게 남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강간범들을 용서하고 모두 다 천국에 갈지, 아니면 공동체를 떠나 바깥세상으로 나갈지 선택하라고 한다. 몰로치나의 여자들은 바깥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글을 모른다. 심지어 그 나라 말도 못 한다. 살려면 공동체에 남아야 하고, 공동체에 남으려면 강간범들을 용서해야 하는 처지인데 여자들은 얘기하고 또 얘기한다. 그리고 마침내 공동체를 떠나기로 하고 자신들의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소설에서 제일 감동적이었던 부분이었다.)

“그건 사실이야. 신이라면 우리가 떠나는 것을 다른 말로 정의하실 거야”

메얄이 말했다.

“그럼 넌 신이 우리의 떠남을 어떤 말로 정의할 것 같은데?” 

오나가 물었다.

“사랑과 평화를 위한 시간” 메얄이 말했다.

“아하!” 오나가 기쁨에 넘쳐 손뼉을 짝짝 쳤다.

살로메는 미소를 지었다. 메얄의 얼굴에선 환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위민 토킹》, 237쪽)

남자들이 강요한 ‘용서와 천국’이란 성경적 해답을 거부한 여자들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하나님의 말을 해석하는 법을 배웠고 자신들의 결정을 사랑과 평화를 위한 시간으로 정의하며 함께 기뻐한다.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성장했던 작가는 유럽과 러시아를 거쳐 캐나다로 이주하고 남미까지 갔던 메노나이트의 역사가 사랑과 평화를 위한 시간이었고, 이 역사가 떠나기로 결심한 여성들을 통해 새롭게 시작될 거라 말하는 듯하다.

 

목사면서도 ‘성경적’이란 말이 아득하다. 자신의 결론과 태도를 정당화하는 데 성경을 인용하고, 자기 집단의 권위를 관철하고자 ‘성경적’이란 말을 사용하는 장면을 자주 봤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자기 입장과 이익에 따라 해석과 강조점이 다르니 사회 이슈나 윤리 문제를 성경적으로 토론해도 합의점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성경적으로 토론하자 모여서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만 내세우다 마치 다른 성경을 읽은 사람들처럼 헤어진다. 그래도 목사인 나를 믿고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무엇이 성경적인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레이첼 에반스의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본 1년》에 나오는 결론 부분을 읽어준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성경적인 대답이다.

성경을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해석이란 선택을 할지 말지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선택할 것이냐의 문제다. 우리는 모두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우리 삶에 적용할지 고민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찾아 성경을 펼쳐 읽으며, 그것을 찾을 때 어떤 경향을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문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편견으로 읽고 있는가, 판단과 힘, 자기 이익과 탐욕이라는 편견으로 읽고 있는가?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본 1년》, 400쪽) 

이한주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했다. 책과 책 읽는 사람과 책 읽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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