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호 동교동 삼거리에서]

한 사람이 무언가를 기억할 수 있는 시간과 용량은 정해져 있습니다. 심지어는 중요하게 여겼던 기억조차 왜곡되곤 합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지요. 특히나 요즘처럼 이슈나 담론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때는 우리의 뇌가 휘발성 기억장치가 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책임지는 이 없이 미해결 상태로 쌓여온 이슈들이 한 가득입니다. 1년 전 10월 29일은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던 날이었습니다. 지난여름의 지하차도 침수 사고, 잼버리 사태, 교권침해 논란과 무차별 이상동기 범죄, 일본의 오염수 방류 등… 쏟아지는 사건과 사고들은 조만간 또 다른 재앙으로 들이닥칠 것을 예고합니다.
이슈로 이슈를 덮는 세상, 오늘의 화가 어제의 화를 밀어내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호흡을 찾는 것을 돕고자 10월호를 꾸렸습니다. 잊히는 희생, 사라져가는 생명, 진실의 왜곡 앞에서 꼬리에 꼬리를 잡는 기도를 담았습니다. 간토 학살 100주기를 기억하는 기도(김응교), 바다를 살리려는 온몸의 기도(이지연), 세상의 아픔 앞에 선 기도(이광하)는 모두 “기도의 소재는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자크 엘륄)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세상에서 잊히거나, 덮이는 아픈 이야기를 꺼내어 더 세차게 기도해야겠습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격월 연재가 두 편 있습니다. 《20세기, 세계, 기독교: 지난 100년간 세계기독교를 만든 21명의 증인들》의 저자 이재근 교수가 ‘20세기, 한국, 기독교’를 격월 연재합니다. 첫 번째 인물은 길선주 목사입니다. 정다운 번역가의 ‘질문의 시간: ‘사이’에서 묻다’는 답이 아닌 질문을 통해 신앙 여정의 신비와 풍성함을 전합니다. 두 편 모두 이 달에는 기도의 관점에서 읽어도 흥미롭겠습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 외쳤던 그리스도인 김현승. 왜 하필 가을이었을까요? 어린 아들을 하늘로 먼저 보내고 쓴 시 〈눈물〉에서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라고 했던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이 주님께 드린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라는 기도의 무거움 앞에서 함께 두 손을 모읍니다.
이범진 편집장 poemgene@gosco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