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호 커버스토리]

고향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면 나오는 선착장, 학창 시절 위로가 필요할 땐 거기서 고요하고 평화로운 한낮의 바다와 만났다. 작은 배들이 정박해있는 그 주변 바다는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얕고 투명해서, 곳곳에 삐져나온 적록색 해초들이 알록달록 비쳐 보였다. 영롱한 물결 따라 색색의 빛깔로 일렁이는 모습은 소란스러운 내면을 가라앉히는 데 특효약이었다. 그렇게 가만가만 바닷속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잔잔하고 은은한 물결은 자연스럽게 내 마음 풍경이 되었다.

이렇듯, 내가 바다를 연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지배적인 이미지는 평화로움 가운데 주어지는 위로였다. 이런 이미지를 일거에 뒤집어버린 책이 한 권 있었으니, 바로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의 대표작 《침묵》(1966)이었다. 이 작품에서 엔도가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려내는 것은 침묵의 바다. 수장되어 순교하는 등 막부의 박해 앞에 속수무책인 기리시탄들(16세기 예수회의 선교로 일본에 전파된 기독교 신자들)과 침묵하는 하나님을 비추는 “어두운 잿빛” 슬픔의 바다였다.

“바다는 그들을 죽인 뒤, 그저 음산하게 침묵하고 있다.” “모기찌와 이찌조가 말뚝에 묶이어 가라앉은 비오는 바다, 작은 배를 쫓는 가르페의 검은 머리가 힘에 부쳐 나무조각처럼 표류하던 바다, 그 작은 배에서 수직으로 차례차례 거적에 싸여 농부들이 낙하해가던 바다, 바다는 끝없이 넓고 슬프게 펼쳐 있었는데, 그때도 하느님은 그저 완고하게 침묵을 지켰다.”1)

엔도 슈사쿠를 처음 접한 시점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십몇년 전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던 기독교인 학생이 ‘기독교 문학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던 차에 김은국의 《순교자(The Martyred)》(1965)와 함께 누군가로부터 추천받은 작품이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었다.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만 다녔던 탓에, ‘일사각오의 순교 신앙’ ‘영광과 승리의 예수’는 너무도 익숙한 관념이었다. 엔도는 17세기 일본 기독교(가톨릭) 박해 역사에 근거하여 쓴 소설로 두 이미지를 뒤흔들어 낯설게 보도록 이끄는데, 충격이었다.

작중 사제 로드리고가 박해기 일본의 나가사키 험지에서 맞닥뜨린 것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기리시탄 농민들의 삶이었다. 농민들은 비참한 삶의 탈출구로서 내세 신앙에 붙들려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을 배교시키기 위한 막부의 전략과 포위망은 촘촘했고, 결국 붙잡힌 로드리고는 갈림길에 선다. ‘후미에’(踏繪,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판)를 밟아 배교하는 길을 택하면, 오물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채 극심한 고통 중에 죽어가는 농민 세 명을 살릴 수 있다. 밟지 않으면, 이들은 이대로 죽을 것이다. 배교냐 아니냐. 무엇이 숭고한 신앙 행위인가?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제는 발을 들었다. … 자기는 지금 자기의 생애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왔던 것을, 가장 성스럽다고 믿어왔던 것을, 인간 최고의 이상이라 꿈꾸어왔던 것을 밟는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의 그 사람은 사제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너의 발의 아픔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2)

‘침묵’(沈默)이라는 제목이 갖는 무게감 때문에, 이 작품은 ‘신은 침묵하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식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엔도는 후일 《침묵의 소리》라는 책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한 바가 ‘신이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말씀하고 계신다’였음을 밝힌다.3) 《침묵》을 쓴 엔도의 의도는 ‘순교 신앙’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순교자만큼 강하지 못해서 결국 배교와 배신을 반복하지만 신앙의 언저리를 떠도는 약한 신자가 존재하는 현실을 진지하게 돌아보고자 했다.

이처럼 《침묵》은 그가 그리려 했던 ‘비애의 예수’, 순교와 배교를 비롯한 신앙적 선택의 두터운 층위를 강렬하게 드러내며, 그를 세계적 작가로 올려놓기에 이른다. 이 때문인지 엔도 슈사쿠는 주로 《침묵》을 쓴 종교소설가, 지나치게 진중한 고민을 하는 작가로 기억되곤 했다. 엔도 스스로가 부담스러워했듯이, 이는 그의 모습 중 한 측면을 대변할 따름이다.

엔도 슈사쿠 문학관에 걸려있는 전신사진. Ⓒ복음과상황 강동석
엔도 슈사쿠 문학관에 걸려있는 전신사진. Ⓒ복음과상황 강동석

왜 지금, 다시 엔도 슈사쿠인가

《침묵》이 출간된 지 50년(2016년, 엔도 슈사쿠 20주기)을 즈음한 2016-2017년, 이 책을 원작으로 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사일런스〉가 개봉되었다(미국 개봉 2016년 12월 23일, 한국 개봉 2017년 2월 28일). 《침묵》은 다시 베스트셀러로 올라설 만큼 시선을 끌었고, 엔도 슈사쿠 관련 저술 몇 권이 출간되고, 각종 콘텐츠가 쏟아져 나왔다. 당시 반응에 비한다면, 엔도 슈사쿠 탄생 100주년을 맞는 올해 한국은 무척이나 조용하다. 올해 출간된 엔도 관련 저술은 《나의 예수》(로만)가 유일해 보이고, 특집 기사는 엔도 슈사쿠가 출생한 3월 27일 〈가톨릭평화신문〉에 보도된 내용 정도이다.

사실 일본어판 위키백과로 확인할 수 있는 엔도의 저술은 150권이 훌쩍 넘는다. 작품집으로 묶어 나온 것만 80여 권이다. 그는 기행문·역사소설·유머소설·추리소설·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가로서 활동했고, 유머와 낭만을 좋아했다. 《침묵》 발표 전후로 엔도는 독자와의 대중적 소통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는데, 자신의 집을 ‘고리안’(孤狸庵)이라고 칭했으며4), 스스로는 ‘고리안 선생’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길 바랐다. 그는 커피나 맥주 CF에도 다소 우스꽝스러운 연출로 등장하기도 한 익살꾼이었다. 한국에 출간된 작품은 (일본 출간 도서 목록을 참고해보면) 다양성 측면에서도, 종수를 따져도 한참 못 미친다. 소설의 경우, ‘예수’를 직간접적으로 그려낸 작품이 주로 출간되어, 한국에는 종교소설가로서의 면모가 오히려 부각되는 듯하다.

《침묵》 50주년과 대조적인 엔도 슈사쿠 탄생 100주년의 기독교계(가톨릭·개신교) 반응을 보면, 어쩌면 기독교 쪽에서도 《침묵》 말고는 소구력이 거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여기에 더하면,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사해 부근에서》 정도가 그나마 독자들에게 주목을 받을까? 《침묵》조차도 원문의 뜻에 맞게 읽혀왔는가 하는 비판이 있다. 이는 《침묵》 번역본을 둘러싼 한 연구5)에서 다수 지적되는 사안이다. 김승철 난잔 대학 교수는, 《침묵》 맨 끝에 수록되어 마치 부록인 양 많은 이에게 혼동을 주었던 〈기리시탄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를 번역해 《침묵의 소리》와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에 담아서 출간했다. 그는 이 글이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는 한글 번역본 《침묵》에 누락”6)되어 있었음을 지적한다.

현재 시중에는 저 부분이 포함된 《침묵》 번역본이 나와있지 않은 셈인데, 김진규는 위 논문에서 1982년 중앙일보사에서 출간된 ‘오늘의 세계문학’ 시리즈 15권 《침묵·불타버린 지도》에 〈기독교도 주거 관리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전문이 실려있다고 언급한다. 故 김효자 경기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의 번역으로 2쇄에 보급판까지 나왔으나, 한국에서는 일종의 ‘정본’(定本)으로서 대중에게 채택되지 못하고 완전히 잊힌 셈이다. 홍성사와 바오로딸에서 출간한 두 판본이 살아남아 꾸준히 판매되고 있으나, 여전히 〈기리시탄 주거지 관리인의 일기〉는 수록돼있지 않고, 원작 구성과 차례가 좀 다르다. 김진규는 번역에서도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굴절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데, 꽤 설득력 있는 내용이다.7)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침묵》은 그 자체로 초월적 경험을 다루고 있으며, 한국의 독자에게는 삶과 신앙의 문제를 낯설게 바라볼 기회를 제공하는 ‘종교문학’이다. … 번역에서 굴절은 필연적이다. 단, 그 굴절은 문학과 사회 혁신의 동력이 될 수 있고, 혁신을 억제하거나 왜곡할 수도 있다. ‘한국 기독교라는 늪’에 번역을 통해 심겨진 《침묵》은 어디에 가까운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8)

엔도 슈사쿠가 별세했을 때의 연합뉴스 보도를 보면, 그의 이름 앞에 “일본내 거의 모든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이자 극작가”9)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일본 내에서 대중성과 문학성을 확보한 굴지의 작가였다. 〈아사히신문〉이 2000년에 ‘1000-1999년 사이 가장 뛰어난 일본 문학가’에 대한 독자 투표를 진행했을 때도 13위를 기록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12위, 1994년 일본 작가 중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가 18위였음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위치라 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주요 인터넷 서점의 검색에 잡히는 작품들 면면만 살펴봐도 어느 정도 추론은 가능한 대목이다. 기독교 출판사를 제하고 봤을 때, 순문학에 있어 역사가 있는 출판사인 민음사·창비·문학과지성사 세 곳에서 엔도 슈사쿠 작품을 번역·출간했으며, 여타 출판사들 다수가 각각 에세이집·역사소설 등을 한두 권씩 내놓은 것으로 확인된다.

엔도 슈사쿠는 기존의 기독교에 익숙한 종교적 관념을 낯설게 보여주어 신앙 인식의 지평을 한껏 열어젖힌다. 그런 점에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금, 엔도 슈사쿠를 다시 소환하는 것은, 그가 한국에서 소비돼온 방향을 조금 틀어서 읽는 낯선 시도를 함으로써 엔도에 대한 기존 이해를 입체적으로 넓히려는 데 있다. 단지 《침묵》의 작가로만 그를 기억하지 않고, 엔도 슈사쿠가 다양하게 드러낸 삶과 신앙의 비극과 희극성, 희로애락의 자연스러움을 읽어보려는 시도이다.

엔도 슈사쿠 문학관. Ⓒ복음과상황 강동석
엔도 슈사쿠 문학관. Ⓒ복음과상황 강동석

나가사키 소토메 엔도 슈사쿠 문학관

벌써 5년이나 지나버렸지만, 《침묵》의 바다를 보고자 엔도 슈사쿠 문학관이 있는 작품 배경지인 나가사키 소토메(外海)를 방문하여 새로 만나게 된 엔도에 대한 이야기 일부를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급작스레 정해진 3박 4일의 여정이었다. 2018년 11월 5일, 엔도 슈사쿠 문학관이 있는 나가사키 소토메를 목표로 출국했다. 안식을 위한 여행지를 물색하던 중, 우연히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 파랗습니다(人間がこんなに哀しいのに, 主よ, 海があまりに碧いのです)”라는 엔도 슈사쿠 친필 글귀가 적힌 ‘침묵의 비(碑)’를 보자 갑자기 《침묵》에서의 그 바다 이미지가 떠올랐다. 《침묵》에 나오는 배경지를 탐방하며 그 슬픔의 바다를 직접 보고 싶었다. 마침 동행자가 소토메와 엔도 슈사쿠 문학관을 다녀온 적 있는 엔도 슈사쿠 덕후이기도 했다.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이 좋은 가이드북이 되어주었다.

‘침묵 이후’라는 주제로 이루어진 나가사키에서의 일정 동안 연푸른빛 바다를 보고 또 보았더랬다. 날씨가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어서, 하늘로부터 빛다발이 쏟아지는 듯한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엔도 슈사쿠 문학관은 석양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한 도로휴게소 바로 밑에 있었다. 이곳을 ‘석양의 언덕’이라고도 부르는 만큼 문학관을 둘러본 후 저물녘 벤치에서 마주하는 바다 풍경은 장관일 테다. 좌우로 길게 뻗은, 옅은 바다색의 유럽풍 기와를 올리고 있는 납작 엎드린 건축물. 흰 벽과 아름다운 돌담은 고즈넉한 평화의 기운을 불러왔다. 문학관으로 들어서면,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찍은 정장 차림의 엔도 슈사쿠 전신사진이 시선을 확 당긴다. 사진 속 엔도가 머금은 웃음에서는 특유의 익살스러움과 진솔한 태도가 드러나, 타국에서 찾아온 이들의 다소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었다. 전시관 내부에는 엔도가 예루살렘 취재 여행 도중 시가지에서 찍은 사진이 재미있었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터번처럼 두르는 ‘카피예’(keffiyeh)를 쓰고 있어 유쾌한 느낌을 자아냈다.

전시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엔도 슈사쿠의 부인 엔도 준코와 관련된 물건이었다. 엔도 슈사쿠가 아내에게 헌정한 《침묵》과 《사무라이》 첫 페이지에 적힌 사인이 부부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했다. “준코 여사께. 소생은 여사께 제일 의지하고 있습니다. 슈사쿠.” “엔도 준코님. 병간호해 주신 점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슈사쿠.” 사이 좋은 부부였다. 대담집 《남편 엔도 슈사쿠를 말한다》(성바오로)를 보면 자세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태생적으로 몸이 약했던 엔도 슈사쿠는 결핵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결혼 생활도 40년 중 1/4을 병원에서 보냈다. 엔도 준코가 “내 인생의 반이 나이팅게일”이라고 농담할 정도였는데, 나머지 인생 절반은 “남편의 팬클럽 회원 제1호”로 끝까지 남편에게 반해있었다고 은근슬쩍 고백한다.

엔도 슈사쿠가 ‘비애의 예수’에 주목하며,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에만 천착하면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잦은 병치레 때문이기도 했겠다. 그는 일생에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넘기는데, 《침묵》도 사선(死線)을 넘어 집필한 작품이고, 또 다른 역작 《깊은 강》도 마찬가지였다. 엔도는 신장병으로 3년 반을 병원 생활한 끝에 임종을 맞았다. 이때 붙잡았던 것도 작품 집필 의지였다. 잦은 약물 투여 때문에 욥처럼 가려움증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몸이 다 나으면 욥기를 다루는 평론을 쓰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의 오랜 병원 생활은 존엄사에 관한 글을 적극적으로 쓰게 했으며, 말기 환자나 불치병 환자가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배려하자는 ‘마음 따뜻한 의료 운동’도 촉발했다. 간병인이 쉴 장소를 마련하고, 환자가 직접 소변 컵을 들고 다니는 일이 없어지는 등 실질적 변화를 불러왔다고 전한다.

‘침묵의 비’ 페인트칠 사건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 파랗습니다”라는, 엔도 슈사쿠의 친필 문구가 새겨진 ‘침묵의 비’는 문학관에서 차로 2분 거리에 있다. 글씨체를 품은 울퉁불퉁한 바위는 군데군데 갈라지고 색깔마저 거칠었다. 비취색 단단한 표면에 새겨진 글귀, 바로 옆에 꼿꼿하게 솟은 나무, 초록빛 잎새와 멀리서 들어오는 햇볕,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비석 너머로 조그마한 부두 옆쪽에 펼쳐진 바다 풍경이 보였다. 태양은 저물기 전의 바다로 남은 빛을 흩뿌렸다. 부둣가에 있는 자잘한 배들, 다닥다닥 붙은 시골 기와집들…. 이곳은 4천 명이 채 되지 않는 이들이 거주하는 변방의 어촌이었다.

비석이 세워진 곳은 ‘외해’(外海) 소토메에서도 바다가 보이는 가장자리. 인간의 슬픔을 묵상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장소가 아닐까 싶었다. “저 비석과 장소는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라며, 엔도는 1987년 비석을 세울 때 흡족해했다고 한다. 바다를 보려면 땅의 ‘바깥쪽 경계’에 있어야 한다. 문학비가 땅의 가장자리에 있으니 저 글귀가 사무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변방의 가장자리를 애처롭게 다녔던 ‘비애의 예수’를 되새기게 하는 풍경이 아닌가.

소토메의 바다(위)와 침묵의 비(아래). Ⓒ복음과상황 강동석
소토메의 바다(위)와 침묵의 비. Ⓒ복음과상황 강동석

‘침묵의 비’가 세워졌을 때 엔도 슈사쿠는 나가사키 주민을 포함하여 3천 명이 함께하는 축제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 문학비 건립을 모두가 반기지는 않았다. 지역 주민 일부가 불만을 표한 것이다. 1988년 주민이 비석에 페인트를 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메이지유신 당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기까지 죽음을 담보한 ‘순교적 신앙’으로 대를 이어왔다며 저지른 일이었다. 엔도의 작품이 순교자가 아닌 배교자의 고뇌를 다룬다는 게 불만이었다. 엔도 슈사쿠 문학관이 세워질 때도 비슷한 반대가 있었다고 하니, 긴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금 ‘침묵’이 갖는 의미를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 주

1) 엔도우 슈우사꾸·아베 고보, 김효자·이호철 옮김, 《침묵·불타버린 지도》(중앙일보사, 1982), 64·144쪽.
2) 위의 책, 178쪽.
3) 엔도 슈사쿠, 김승철 옮김, 《침묵의 소리》(동연, 2016), 14쪽.
4) 김승철,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비아토르, 2017), 319쪽. 여기서 김승철은 ‘고리’(孤狸)를 “여우와 너구리라는 뜻으로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인다는 의미”라고 밝힌다.
5) 김진규, 〈『침묵』 번역본에 나타난 굴절과 종교적 이데올로기〉, 《민족문화연구 No. 96》(2022).
6)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 560쪽.
7)  김진규가 논문에서 번역과 관련해 지적하는 내용 몇 가지만 살펴보면, 중앙일보사판만 원작 곳곳에 나오는 포르투갈어를 다른 언어로 대체하지 않고 표기에 맞게 존중하여 살렸고, 원작에 표기된 라틴어 ‘Deus’(デウス)를 ‘하나님’ ‘하느님’이 아닌 ‘데우스’로만 번역함으로써 일본 가톨릭 신자가 그 개념을 ‘다이니찌’(大日)와 혼동했다는 작중 페레이라의 지적을 이해하기 수월하게 만든다. 중앙일보사판은 로드리고가 신과 예수를 ‘그’(彼) ‘당신’(あなた) ‘그 사람’(あの人)이라 표현하며 감정을 토로하는 대목을 원작 그대로 번역했는데, 홍성사판은 전부 존칭어로 바꿔놓았으며 로드리고의 낮춤말이 높임말로 바뀌기도 한다. 논문에서 말하는 가장 큰 문제로는 홍성사판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에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행위를 따르며 배우며”라는 표현을 추가하여 작중 의도와 배치되는 번역을 했다는 지적이다.
8) 〈『침묵』 번역본에 나타난 굴절과 종교적 이데올로기〉, 522쪽.
9) ‘일본 저명작가 엔도 슈사쿠 사망’, 연합뉴스(1996.9.29.)


강동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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