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호 책과 사람] 12년 만에 《김교신 평전》을 새로 쓴 전인수 교수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복음과상황 정민호

또 하나의 ‘김교신 평전’이 출간되었다. 같은 저자가 쓴 두 번째 평전이다. 2012년 처음 출간된 《김교신 평전: 조선을 성서 위에》(삼원서원)도, 올해 출간된 《김교신 평전: 세속성자, 일상에서 영원을 일구다》(서로북스)도 강서대 전인수 교수가 썼다.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은 그동안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기독교의 예언적 정신을 지키려 한 인물로 소개돼왔다. 전인수 교수는 김교신이 부르짖던 무교회주의를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안적 신앙으로 소개하며 김교신을 역사적·신앙적으로 깊이 연구했다. 그는 첫 평전을 집필한 후 4년간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총무로 일하면서, 김교신 연구자들과 동역하고 유족들을 만나왔다. 김교신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는 가운데, 새로운 평전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많은 부분을 다시 쓰고 새로운 사실을 추가했다.

전인수 교수를 만나기 위해 강서대학교 연구실을 찾았다. 인터뷰는 이 책 발행일인 6월 5일 진행됐다.  

오른쪽이 새로 쓴 평전. ⓒ복음과상황 정민호<br>
오른쪽이 새로 쓴 평전. ⓒ복음과상황 정민호

- 2012년 출간된 평전의 부제는 ‘조선을 성서 위에’였다. 이번에 부제가 ‘세속성자, 일상에서 영원을 일구다’로 바뀌었다.

기존 책 개정판이 아닌 새로운 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완결판’이라는 생각으로 집필했다. ‘김교신 평전’이라는 제목은 똑같다. 물론 부제뿐 아니라 제목도 아예 다르면 새로운 책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평전’이라는 단어가 갖는 거리감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김교신에 관한 책 중 ‘평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은 내가 쓴 것이 가장 먼저다. 이 ‘오리지널리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김교신이 지금 한국에서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 가장 먼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한국을 성서 위에 세운다’라는 거대한 메시지보다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을 사는 오늘 우리에게 김교신이 어떻게 보일지가 먼저 생각났다. 김교신은 목회자가 아니었다. 평생 교사로 일했고, 편집자로서 10여 년간 잡지를 발행했다. 말년에는 흥남의 비료 공장에서 근로계장으로 일했다. 우리도 김교신처럼 한 명의 평신도로, 일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지 않은가.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한국교회사 속 인물 중 특별히 김교신을 연구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일단 기독교인으로서, 성서 말씀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쳤던 김교신의 삶이 산속 계곡물처럼 깨끗하고 청명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특히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그를 보면서 그의 삶이 사회적 책임과도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져서 끌렸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 속에서 하나님 앞에 책임감 있게 살아가려 한 정결하고 치열한 정신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과 사회를 향한 관심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면서, 이런 모습이 내 삶의 자세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일본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가 김교신의 스승이었는데, 그는 김교신보다 사상적으로 깊고 창조적인 면이 강했다. 그런데 삶을 보면 김교신이 더 헌신적이고 치열하지 않았나 싶다.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복음과상황 정민호

- 12년 전 《김교신 평전》이 출간된 후로 김교신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궁금하다.

가나안 성도 현상이 김교신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전에는 교회로부터 독립된 신앙생활을 상상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이제는 기성교회를 견디지 못하고 여러 교회를 전전하다가 가나안 성도가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김교신이 추구한 무교회주의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코로나 팬데믹도 불을 붙였다.

한국 사회가 교회에 요구하는 것들도 달라졌다. 한국교회는 1990년대까지 비행기가 이륙하듯 양적 성장을 이뤘다. 사회의 비판을 크게 고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체 활동력이 대단했다. 그런데 성장이 정체되고, 본격적 쇠퇴가 시작되면서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교회가 사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기회가 마련됐다. 사회는 교회가 바른 교리로 신앙의 정통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사회의 일원이 되어 사회에 기여하는 교회가 되길 기대한다. 이런 점이 김교신을 더 주목하게 만든 요인이 아닐까. 김교신은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삶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번에 출간된 《김교신 평전》이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는지?

김교신이 한국교회 부활의 지침 중 하나로 쓰이길 바란다. 마지막 장을 ‘김교신, 한국 기독교에 어떤 유산을 남겼나’로 정한 이유다. 한국교회는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다. 종교개혁의 유산을 계승해야 한다며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지만, 2017년이 지나자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 그리스도를 향해 전적으로 삶을 돌이키는 회심이 일어나지 않고는 한국교회 부활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김교신이 주는 지침이 한국교회 회복에 좋은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평전을 새로 쓰면서 김교신에 대한 어떤 새로운 통찰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새롭게 알게 된 역사적 사실들이 있었다. 모두 담지는 못했지만,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고, 잘못된 점들을 수정하고 싶었다. 어떤 부분은 기존 연구자들 결론과 다른 결과가 도출되었다. 예를 들면, 그가 일제강점기에 중국 국민당을 이끌었던 장제스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런 이해가 당시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그는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왜 들어갔는가? 기존 연구에서는 단지 노동자 교육과 복지를 위한 헌신적 태도 때문이었다고 강조했지만, 최근에 그 흥남질소비료공장이 군수공장이었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말년 삶을 재조명하는 연구가 중요해졌다.

나의 초기 연구에서 김교신을 보던 관점과 달라진 부분도 있다. 예전에는 그를 산봉우리에 우뚝 솟은 소나무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연구를 거듭할수록 그도 연약한 인간이며, 우리처럼 한 시대를 고민하면서 최선을 다하려 몸부림쳤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다. 이런 관점은 김교신을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예언자적인 면모로만 봤던 기존 연구와 다르다. 나 역시 영웅 김교신을 향한 관점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우리 시대에는 영웅으로 내세울 수 있는 김교신이라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게 영웅 김교신은 사라졌지만, 인간적으로 여러 한계를 가진 김교신이 더 익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 인간적인 김교신, 그가 연약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어떤 부분에서 알 수 있나.

보통 김교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김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압도적으로 몰두해있다. 제도권에 있는 사람들은 김교신을 상대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김교신을 사랑하는 사람 중에는 그에게 여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단순한 소문으로 여기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료를 읽고 연구할수록 그렇게 부정하기만 할 수는 없는 부분들이 있다.

이런 내용을 책에 담을 때, 김교신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여자 문제와 관련된 내용은 책에 인용된 자료가 전부이긴 하지만, 꽤 노골적이다. 실상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를 종합해보면 분명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함석헌도, 송두용도 이 문제를 언급했기 때문에 부인할 수는 없다.

- “한국교회 대다수가 오랫동안 김교신을 무교회주의자로 이단시했다”고 언급했다. ‘무교회주의’가 한국교회에서 이해되지 못하고 이단시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교회 중심적 신앙을 강조해왔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설교 단상에서 선포했지만, 그 신앙은 제도교회와 완전히 결합한 것이지, 분리된 개념이 아니었다. 한 10년 전,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를 공부하고 싶다고 한 석사 지망생에게 대학 선배 교수님이 “무교회주의를 공부한다고? 교회가 필요 없다는 사상 아니야?”라며, 그 면접생과 나를 동시에 공격하는 듯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전형적인 오해다. 김교신 사상을 제대로 알면 그런 오해가 생길 수 없다.

더 마음 깊이 다가오는 에피소드도 있다. 김교신의 넷째 따님이 무교회주의를 ‘참교회주의’로 바꾸어 부르자고 제안하신 적이 있다. 무교회주의가 마치 교회를 부인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김교신이 참교회를 추구했으니 참교회주의라고 불렀으면 하셨다. 그동안 아버지 때문에 받아오셨던 ‘한’과 ‘오해’가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 김교신이 조직 교회를 넘어서는 신앙을 추구했음에도 교회 출석을 금기시하지 않았다는 점, 심지어 장로교회 주일학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는 사실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 이는 ‘무교회주의’가 단순히 교회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 같다.

맞다. 본래 무교회주의가 생긴 이유는 ‘교회’가 우리 신앙의 유일한 대상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데 오히려 방해되고,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우치무라 간조나 김교신은 기성교회가 제도교회를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나 절대적 기준으로 제시하면서 오히려 그리스도가 뒤로 밀리는 현상을 목격했다.

무교회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을 믿는 것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갖기보다는 이 그리스도를 알리고 예배하는 데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답이 나온다. 만약 우리가 교회를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자, 구원의 절대적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교회에 다니되, 그리스도 중심적 신앙생활을 하면 된다. 무교회주의는 제도교회가 그리스도 중심성을 전복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사상이다. 우리가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를 신앙의 중심으로 놓는다면 무교회주의는 자연스럽게 소멸할 것이다.

- ‘성서조선’과 ‘조선산 기독교’라는 표현이 김교신 사상을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성서중심주의와 민족애에 기대는 그의 사상에 대해 더 설명해주면 좋겠다.

김교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그는 우리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는 것을 목표했던 사람이다. 조선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성서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조선인이 성서적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조선이 바른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성서를 가르치며 성서가 조선인의 책이 되게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성서조선’이라는 표현에서 ‘성서’는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앙의 특수성은 어떻게 담았을까? 바로 ‘조선’이다. 이 조선에서 ‘조선산 기독교’가 도출된다. 김교신은 복음의 보편성과 특수성이 충돌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성서의 진리가 조선인의 마음과 혼을 통해 표출된다면, 그것은 보편성을 잃지 않는 상태에서 복음이 조선인의 복음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는 복음이 한국 땅에 떨어졌다면 한국인의 혼과 마음, 정수를 담아 표현되어야 마땅하다고 보았다. 조선인은 마치 구약 율법처럼 복음과 연결되는 마음과 정신을 갖고 있으며, 이 마음이 복음과 만나면 신앙의 진리는 더 선명하고 적합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조선산 기독교이다.

- 당시 조선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김교신의 관심은 어느 정도였나.

김교신은 조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을 것이다. 그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오사카마이니치신문〉 〈런던타임스〉, 영어 신학 학술 잡지인 〈익스포지터리타임스〉(The Expository Times)를 구독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야말로 엘리트였다. 김교신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았다. 왜 조선이 망했는가, 이 상황에서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바벨론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올렸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백성이 되는 길이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신앙적이고 도덕적인 백성으로 만들 것인가 고민하다가 성서를 가르치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성서를 통한 철저한 인격적 변화를 기대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는 지점이다.

전인수 교수와 ‘서로북스’ 민대홍 대표. ⓒ복음과상황 정민호<br>
전인수 교수와 ‘서로북스’ 민대홍 대표. ⓒ복음과상황 정민호

- 지금도 김교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가 있는지 궁금하다.

김교신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대전 현충원에 위패가 모셔졌다. 그는 1945년에 전염병으로 사망해서 당시 규정에 따라 급하게 화장 처리되어 유해는 북한 함흥에 묻혔다.

〈성서조선〉 영인본(복사본) 전집이 있다. 이 자료는 일제에 의해 압수되었으나 해방 후 무교회 신자들이 한 권 한 권 모아 전권을 수집했다. 이 자료는 일제강점기의 중요한 자료이자 한국교회사의 소중한 신앙 유산이다. 〈성서조선〉 원본이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무교회 모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김교신 사망 후 1세대 무교회주의자인 송두용이 모임을 이어갔고, 2세대 무교회주의자인 노평구가 김교신의 자료를 수집, 출판하며 그를 기념하는 활동에 힘을 쏟았다. 현재 3-4세대 무교회주의자들 모임이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데, 무교회 특성상 모임 규모나 신자 수는 내부인들도 잘 모르고 있다.

무교회 신자들은 한일 간 친선과 교류도 증진해왔다. 해방 후 한일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으나, 한일 무교회주의자들은 이미 그때부터 서로 간의 유대를 확인하고 일본의 죄책을 사과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국이 가난했을 때 일본 무교회 신자들이 여러 서적을 지원하고 경제적 도움을 주며 유대를 강화해왔다.

- 책에는 싣지 못했지만 기억에 남는 특별한 자료나 사실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평전과 어울리지 않는 학술적 내용은 많이 생략했다. 지금 다른 책도 준비하고 있다. ‘김교신을 다시 읽다’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책은 학문적 내용을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의 사상과 당시의 복잡한 역사적 사실을 쉽게 해명하는 책이 될 거다.

《조선출판경찰월보》라는 자료가 있다. 일제가 출판 검열 현황을 기록한 문서로, 〈성서조선〉이 검열에 자주 걸렸기 때문에 참고할 가치가 있다. 작년 김교신 연구에서 이 월보를 이용한 적이 있는데, 앞으로 본격적으로 분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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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정민호

-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총무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궁금하다.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는 김교신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와 교회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초대 회장은 이만열 교수님이었고, 현재는 박상익 전 우석대 교수님이 맡고 계신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4년여 동안 전체 실무를 담당했다. 가장 큰 소득은 유족을 만나고, 무교회 신자분들과 교류하고, 김교신에 대한 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보람 있었던 일은 《김교신 일보》를 제안하고 출판했던 일이다. 《김교신 일보》는 김교신의 개인 일기로, 원래 30여 권이 있었는데 지금 전해지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이 일기는 한국어, 한자, 일본어, 헬라어 등 손 글씨로 작성되어 전문 연구자도 읽기 어려웠다. 우치무라 간조 전집을 번역했던 전문가 한 분이 1차 번역을 해주셨고,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에서 오랜 교정 작업을 거쳐 2016년에 발간했다.

- 그동안 김교신 연구를 하고 평전을 집필하면서 그의 삶과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사실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늘 생각했지만, 이를 정리해서 말하려니 쉽지는 않다. 가장 많이 고민한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문제다. ‘기독교인으로서 이 시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문제다. 김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를 실천하려고 정말 치열하게 애를 썼다. 그것 자체가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책에서는 가나안 성도를 언급할 때 가나안 성도가 되려면 최소한 김교신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말한 내용도 있다. 이런 말을 할 때는 죄송한 마음도 든다. 가나안 성도가 아니더라도 김교신처럼 살기는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가나안 성도에게 그런 것까지 요구하는 것은 다소 계몽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무교회주의라는 것이 단순히 교회를 나가지 않겠다는 결정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김교신은 교회 안에서만 신앙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와 시간의 모든 영역을 신앙생활로 삼았다. 모든 장소와 시간이 신앙 영역이었기에, 그에게는 따로 교회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삶 전체가 교회였다. 

진행 정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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