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호 무브먼트 투게더] 스펙 경쟁의 고통을 줄일 ‘스펙 다이어트 캠페인’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90년대만 해도 대학은 해방과 낭만의 공간이었다. 치열한 입시 경쟁을 끝낸 후, 그 결과에 만족하든 만족하지 않든 대학에 들어온 이상 자유를 만끽해야만 했다. 마치 억눌린 시간에 대한 보상인 것처럼, 술자리로, 동아리 활동으로, 미팅과 소개팅으로 1-2년을 보내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권리였다. 소위 쌍권총(F 학점을 두 개 이상 받는다는 뜻)을 차고, ‘학고’를 맞는 것이 훈장처럼 여겨졌고, (‘학고’는 학사 경고이다.) 3-4학년 때 바짝 준비해도 먹고사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느끼던 시절이었다. ‘라떼’는 그렇게 끝이 났다.

2024년 청년으로 산다는 것

IMF를 지나며, 취업 시장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스펙’이라는 용어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기계제품에나 사용될 법한 용어(Spec: Specification의 줄임말)를 사람에게 붙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신자유주의가 우리 삶 깊은 곳까지 침투했음을 보여준다. 5종, 7종 스펙도 모자라 외모도 스펙이라며 성형을 포함해 ‘9종 스펙’을 갖추어야 취업 시장에 이력서를 내밀 수 있게 되었다. 입시 경쟁을 뚫고도 다시 시작되는 무한 스펙 경쟁 속에서 우리 청년들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매달 청년 구직자들은 평균적으로 매달 44만 원 이상의 비용을 들여 스펙 쌓기에 몰두한다. 그나마 집안 형편이 좋으면 다행이다. 청년 구직자 대다수는 아르바이트하며 취업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돈을 모아야 하는, 일명 ‘취준준생’ 코스부터 입문해야 한다. 또한, 지금의 학생들에게 휴학과 졸업 유예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결과, OECD 국가 중 ‘오버 스펙 1위’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게 되었다. 업무에 필요한 것 이상 과도하게 스펙을 쌓고 있다는 말이다. 취업이 늦어지면서 우리나라 신입 사원 평균 나이가 31세에 이른다는 조사가 있을 정도다. 취업이 늦어지면서 초혼 나이도 늦어지고(2023년 기준 평균 남성 34세, 여성 31.5세), 이는 다시 출산율 감소에도 영향을 준다. 보통의 국가에서 청년들이 평균 23세 정도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데 반해, 대한민국 청년들은 스펙 쌓기에 몰두하며 청춘을 낭비한다.

혹자는 그것이 왜 ‘낭비’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세상에 버려질 경험은 없지만, 막상 기업에 입사하고 나면 알게 된다. 고득점을 위해 시간과 돈을 들였던 영어 성적이 기업에서는 쓰일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1점이라도 더 얻고자 시작했던 봉사 활동, 대외 활동, 공모전 등은 아예 채용에서 평가조차 하지 않는 기업도 허다하다.

취준생이 매달 취업 준비에 쏟는 돈이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취준생이 매달 취업 준비에 쏟는 돈이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스펙 다이어트가 필요한 때

‘스펙 다이어트’라고 하니,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데 왜 없는 스펙마저 빼라는 것이냐며 따져 묻는다. 학생들은 잘못이 없다. 최소한 취업을 위해 입사 지원서를 한 번이라도 작성해봤다면 왜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재)교육의봄에서 국내 1,000대 기업의 입사 지원서 150개를 수집해 분석해 보았다. 대부분 각종 스펙을 넣는 칸이 있었다. 비좁은 취업 문을 뚫기 위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돋보여야 하는 마당에 지원서에 빈칸을 남겨둔다는 것은 곧 ‘서탈’을 의미한다. (‘서탈’은 서류 탈락이다.) 그러니, 무한 스펙 경쟁에 돌입할 수밖에.

‘스펙 다이어트’는 기업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 최소한 일하는 데 필요하지 않은 스펙들, 실제 채용 과정에서 평가조차 하지 않는 항목들은 제발 좀 빼주자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기업에도 손해가 되지 않으며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많은 채용 담당자를 만나본 결과, 실제 평가조차 하지 않는 스펙들이 버젓이 지원서 항목에 들어가있는 경우가 상당했다. 이유는 ‘단순 참고’, 혹은 전부터 써온 지원서 형식이기 때문이라는 것. 하지만, 이 ‘단순 참고’와 ‘관행’이 청년들에게는 엄청난 짐이 된다. 조사 결과, 입사 지원서에 있는 스펙 항목 하나에 대해 취준생들은 채용 담당자보다 2배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기업이 먼저 불필요한 스펙들을 제거한다면, 구직자들은 꼭 필요한 역량에 집중할 수 있고 불필요한 시간과 비용의 낭비를 막을 수 있다.

작은 실천으로

15년 전 즈음, 필자는 당시에는 이제 막 한국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던 공정무역 운동을 기독교 내에서 전개한 적이 있었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맞춰, 착한 초콜릿(공정무역 초콜릿) 선물하기 운동을 전개하며 교회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영상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당시, 일부 기독인들이 도대체 초콜릿과 기독교가 무슨 상관이냐고 따져 물었다. 성경에 초콜릿이 어디 나오느냐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저세상 너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그 나라가 여기에 임하게 해달라고(마 6:33)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정의로운 다스림을 뜻한다. 그 다스림은 단지 내 마음에만 임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 사회에도, 그리고 모든 생명체와 온 우주에 펼쳐져야 한다. 어떤 인간 통치자가 흉내 낼 수 없는 그 거룩한 다스림 속에 병들어 있는 우리의 교육도, 청년들의 불필요한 고통의 문제도 놓여야 할 것이다.

스펙 다이어트 캠페인이 시작되고 나서 입사 지원서에 불필요한 스펙 칸을 없앤 기업들이 나타났다. 더 많은 기업이 참여해 불필요한 스펙 경쟁이 사라지도록, 서명으로 이 캠페인을 응원할 수 있다. 현재까지 1,7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이 캠페인에 공감하며 서명했다.

우리는 교회에서 청년들의 취업과 앞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소리를 자주 접하게 된다. 청년들이 불필요한 경쟁으로 고통받지 않는 사회가 되도록, 마음으로 공감하고 서명으로 응원하는 것! 이 또한 우리 기독인들이 부단히 이루어가야 할 기도이며 실천이 아닐까.

전선희
대학 졸업 이후 신학을 공부했다. 주로 탈식민주의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성서를 읽는 연구를 해왔다. 이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에 관심을 두고 ‘공정무역기독인연합’을 시작한 바 있고, 현재는 학벌주의와 입시 경쟁 문제 해결을 위해 (재)교육의봄에서 정책연구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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