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호 예레미야의 말씀들] 예레미야 34장

예레미야 34~36장의 짜임새

예레미야서 31~33장은 위로와 회복에 관한 말씀으로 가득하다.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과 긍휼히 여기심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이를 생각하면, 멸망의 수순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34장 이후의 전개는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예레미야서의 배열을 생각하면, 넘쳐 나는 위로와 회복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유다의 죄악에 대한 확실하고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이 먼저 와야 한다. 그리고 이를 생각할 때, 심판은 그저 심판으로 끝나지 않는다. 심판은 다가오는 상상할 수 없는 회복과 은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실 구원을 기대하는 일은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죄악에 대한 단호한 심판 선포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34장 이후 멸망을 향해 치닫는 유다의 모습을 다루고 있지만, 그 배열은 특이하다. 34장은 시드기야 9년과 10년이 배경이지만, 35장은 갑작스레 여호야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36장은 여호야김 4년에서 5년을 배경으로 한 내용을 보여 준다. 37장부터 44장까지는 시드기야의 즉위 이래 예루살렘 멸망과 애굽으로의 이주까지 유다의 마지막 날들의 모습을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장들과는 구분된다. 이를 생각하면, 연대기적 순서를 깨고 있는 34~36장은 하나의 덩어리로 묶을 수 있다.

33장의 첫머리는 시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에 대한 설명 그리고 “두 번째로”라는 언급에서 32장 1~2절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37장의 첫머리는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과 같은 표제가 아니라, 그 시기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이것은 43장까지 일관된다. 그에 비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는 표현이 34, 35, 36장의 첫머리에 놓여 있다는 점은, 본문 자체가 이 세 장에 실린 내용을 한 덩어리로 볼 것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 장을 묶어 주는 중심 주제는 무엇일까?

34장은 시드기야의 그릇된 행동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말씀을 전하고 있으며, 36장은 여호야김의 잘못된 행동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그에 비해, 35장은 레갑 자손을 칭찬하시며 복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특히 35장은 조상의 명령에 순종한 레갑 자손의 신실함과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대조하여 보여 준다. 이상을 생각하면, 34~36장은 37장부터 시작되는 멸망의 시간표에 앞서서 왜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는지를 적절한 예로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조상의 명령임에도 자손 대대로 순종한 레갑 자손과 하나님의 명령임에도 자손 대대로 거역한 유다를 대조하고 있고, 시드기야와 여호야김은 그 구체적 사례로 제시되었다. 즉 이 세 장의 목적은 34~36장이 담고 있는 ‘시드기야-레갑 자손-여호야김’(a – b - a´)의 짜임새를 통해 37장부터 일어나는 심판의 진전이 왜 돌이킬 수 없는 일인지를 확증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시드기야와 여호야김, 레갑 자손은 일종의 패러다임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윗의 후예인 왕들의 교만과 불순종은 땅조차 소유하지 않은 유랑 지파의 순종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무엇이 약속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며, 다윗 언약이라는 게 얼마나 헛된 기대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시드기야의 자유 선포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에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였다. 시드기야를 향한 말씀이었는데, 하나님이 전쟁에서 성을 바벨론 왕에게 넘겨주고 성은 불타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 말씀을 시드기야에게 전하였다(렘 34:6~7). 예레미야서는 이어서 시드기야에 의한 노예 해방 선언을 서술한다(34:8). 시드기야에게 선포된 멸망 예언과 시드기야의 해방 선언은 아무런 연관 접속사 없이 그저 나란히 서술되어 있을 뿐이지만,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예레미야서의 배열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심판 선포에 대한 시드기야의 반응으로 그의 노예 해방을 이해하게 한다.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에 있는 고관들과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 그 내용은 그들이 거느리고 있던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아무도 동족을 종 삼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가리켜 34장 8절에서는 그가 “자유를 선포(리크로 드로르)”하였다고 전한다. 이 언약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즉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졌으며(34:15), 이 언약에 함께 참여한 이들은 “유다 고관들과 예루살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이었다(34:19). 그리고 이 자유를 선언하는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 고전적인 방식으로 실행하여 참여한 이들이 모두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갔다(34:18). 이러한 행동은 언약을 맺는 양 당사자가 언약을 어길 경우, 제물에게 일어난 일과 동일한 일을 겪는다는 점을 나타내어 고대 중동에서 널리 행했다(Lundbom: 565). 히브리어로 ‘(언약을) 맺다’에 쓰이는 동사(“카라트”)에 ‘무엇 무엇을 자르다’라는 의미의 동사를 쓰는 것도 이런 관행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언약 체결은 창세기 15장에도 나온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남으로 언약이 체결된다(창 15:17).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본문은 시드기야 왕과 고관들을 중심으로 해서 많은 이가 하나님 앞에서 엄숙하고도 단호하게 노예 해방의 언약을 맺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이것은 여호와의 눈앞에 “바른 일”이었다(렘 34:15). 아마도 이러한 조치는 바벨론에 포위된 상황에 직면하여 성중에 있는 모든 이의 화합과 단결을 위한 정치적인 조치였을 것이다(Weinfeld: 152 n.1). 모두가 자유민일 때라야 예루살렘 성을 지키는 행위에 의미가 있다. 만일 다른 사람의 종으로 있다면,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지키는 일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

34장 13~14절은 이러한 언약의 배경에 히브리 동족을 노예로 삼으면 칠 년 되는 해에 해방하도록 한 규례가 있음을 알려 준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에서 노예 해방을 다루는 본문은 출애굽기 21장 2~11절, 레위기 25장 39~43절, 그리고 신명기 15장 12~18절이 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본문은 남자 노예의 경우에만 7년째 해방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본문과 차이가 있다. 그에 비해 신명기의 규례는 예레미야 34장과 어휘 면에서도 일치한다. 그렇지만 신명기에서 다루는 노예 해방은 일시에 모든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예레미야의 내용과 차이가 있다. 신명기에 따르면 어떤 히브리 노예이든 6년을 일하면 7년째에 해방된다는 점에서, 각 사람이 언제부터 노예로 일하게 되었느냐에 따라 해방되는 시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이 점은 출애굽기 해방 규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시드기야가 행한 조처는 일시에 모든 남녀 노예를 자유롭게 했으므로 신명기나 출애굽기와는 구별된다.

달리 생각하면 34장 14절이 언급하듯이, 이제껏 유다 백성이 이 규례를 전혀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렇게 한 번은 동시에 모든 이에게 일괄 적용되는 해방 조치가 필요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적으로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노예 해방은 레위기 25장에서 다루고 있는 희년에 이루어지는 특징적인 일이라는 점에서, 예레미야 34장은 희년 선포를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희년 선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 선포”를 의미하는 히브리 표현(동사 “카라”+“드로르”)이 레위기 25장 10절과 예레미야서 34장 8절(그리고 15절, 17절)에 고스란히 쓰인다는 점도 34장과 레위기 희년 본문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자유”로 번역된 히브리 말 “드로르”는 레위기와 본문, 그리고 이사야서 61장 2절, 에스겔서 46장 17절에서도 희년과 연관하여 쓰인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희년은 50년마다 반복되는 해라는 점에서 예레미야 본문의 7년에 대한 명백한 언급과는 잘 맞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주전 588년 또는 587년이 안식년 내지 희년이 되는 해였으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참고. Bergsma: 160~170; Holladay: 238~239; Lundbom: 560~561). 그런 점에서 예레미야 본문은 오경에 나오는 어느 한 본문을 근거로 한다기보다는 신명기와 레위기의 본문을 “창조적으로 재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Bergsma: 170).

구약이 말하고 있는 “자유”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껏 생각할 수 있는 자유나 자기 일을 자기가 결정하는 권리만은 아니다. 모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종이되 서로에게는 동등하고, 모든 땅은 하나님의 것이되 이스라엘은 그 위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희년에 선포되는 자유는 모든 이스라엘이 자유로운 몸, 자유로운 땅을 회복하는 자유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종이 된 채, 하나님의 소유이되 경작하도록 맡기신 땅 위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레위기와 예레미야가 선포하고 있는 “자유”이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라 할지라도,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들이 이제라도 여호와께서 명하신 것을 따라 노예를 자유롭게 하였다는 점이며, 이것은 그들의 ‘돌이킴’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제 돌이켜 내 눈 앞에서 바른 일을 행하여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계약을 맺었거늘”(렘 34:15).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이 귀환한 후 성벽을 재건하는 상황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가난한 백성의 빚을 탕감하여 땅을 돌려주는 조처가 이루어졌음을 느헤미야 5장이 알려 준다. 이때도 지도자인 느헤미야가 앞장서고 백성 중에 귀족과 민장이 동참하였다(느 5:1~13). 느헤미야 5장에 ‘돌아가다, 돌이키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슈브”를 두 번 쓰고 있는데(느 5:11,12), 이 동사는 레위기 25장의 희년 관련 조처에서도 여러 번 반복되는 동사이기도 하다(레 25:10,13,27,28,41,51,52). 그리고 예레미야 34장에서 시드기야와 백성의 ‘돌이킴’을 표현한 동사 역시 동일한 동사라는 점은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레위기 25장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잃었던 땅과 몸의 자유를 원래대로 ‘돌아가게 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느헤미야 5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가난한 동족으로부터 저당 잡은 땅과 거두었던 이자들을 돌려주는 행위로 나타난다(느 5:9~12).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시드기야와 고관들의 자유 선포와 노예 해방은 여호와의 “눈앞에 바른 일”인 것이다. 이전에 살펴보았던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에서도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여호와의 집이라 칭송하는 행위가 아니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는 것이었음을 생각할 때에도(렘 7:5~6), 시드기야의 자유 선언의 의미는 그저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의 본질에 잇닿아 있다.

시드기야의 변심

포로 후기를 살았던 스가랴에게 그 이전에 활동하던 예언자들의 선포는 한마디로 “돌아오라”였다(슥 1:3~4). 그리고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이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말 3:7).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외침은 예레미야에게서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이미 살펴봤듯이 예레미야 3장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해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애 태우심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제 시드기야와 그의 백성은 바벨론에 포위되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야 하나님께로 돌이켰고 그들이 거느린 노예들을 자유롭게 하였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로 돌이키신다. 아마도 바벨론이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의 포위를 풀게 된 사건은 이 사건과 연관되었을 수 있다. 바벨론이 팔레스타인을 휩쓸며 장악하는 데 위협을 느낀 애굽의 바로는 그의 군대를 출병시켰고,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애굽의 진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다가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렘 37:5). 마치 이 장면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며 엎드렸더니, 예루살렘을 둘러쌌던 산헤립의 군대가 앗수르 본국의 흉흉한 소식으로 인하여 갑작스레 그 포위를 풀고 니느웨로 돌아간 일을 연상시킨다(사 37장). 시드기야에게 그리고 예루살렘 백성에게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떠난 사건은 시온은 결코 함락되지 않는다는 전통을 재확인하게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적은 반복되지 않았다.

시드기야와 고관들은 자유 선포를 취소하고 풀어 준 노예를 다시 잡아들였다. 시드기야의 노예 해방이 바벨론이 일시적으로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떠나기 전인지 후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시드기야와 귀족들이 풀어 준 노예를 다시 잡아와서 종으로 삼았던 때는 이미 바벨론이 포위를 풀고 예루살렘을 떠났던 시기였다(렘 34:21 “…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기리라”). 아마도 상황이 호전되자 풀어 준 노예가 지닌 경제적인 가치가 머리에 떠올랐는지 모른다. 나라가 망할 지경에는 재산 자체를 지키기도 힘들었지만, 시온의 평화가 눈앞에 다가오자 재산을 유지하고 축적하는 일이 그들의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을 것이다. 존재를 뒤흔드는 위기 때에는 하나님 앞에 모두 모여 동족을 향해 자유를 선포하였으나, 상황의 호전은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위기는 위기가 아니며, 평화는 평화가 아니었다. 바벨론의 포위는 동족에게 자유를 선언하게 하되, 바벨론의 떠나감은 풀어 준 동족을 다시 잡아들이게 만들었으니, 이 역설을 어찌할 것인가.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를 삼았더라”(렘 34:11).

흥미롭게도 위 구절은 ‘돌아가다’를 의미하는 “슈브”동사를 두 번이나 쓰고 있다. 그들은 그 뜻을 ‘돌이켰으며’, 풀어 주었던 노비들을 ‘돌아오게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이켜” 자유를 선포하는 일을 행하였으나, 눈앞에 어른거리는 경제적인 이익 앞에서 그들의 마음을 다시 돌이켜 버렸고, 풀어 준 이들을 붙잡아 다시 돌아오게 해 버렸다(34:15~16).

하나님의 심판 선언

시드기야와 그와 함께한 무리가 노예 삼았던 동포에게 자유를 선포하였다가 다시 되잡아 와서 종으로 삼은 것은 단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조치를 취소한 행위가 아니다. 히브리 노예를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 자유롭게 풀어 주라는 신명기와 레위기의 명령은 애굽에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건져 내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언약의 내용이었다. 그런 점에서 시드기야와 그의 무리가 행한 일은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힌 일이었다(34:16). 하나님의 백성에게 사회적인 차원과 신앙적․영적 차원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구약의 말씀을 읽으면서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을 따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기에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괜찮은데 이웃에게는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예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이다.

시드기야와 그 무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이 행한 행동에 상응한다.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선언하신다(34:17). 그들은 칼과 전염병과 기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들의 땅에 살지 못하고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떠났던 바벨론 군대로 “다시 오게” 하실 것이다(34:22). 여기에도 “슈브” 동사를 의도적으로 썼다고 할 수 있다. 시드기야의 무리가 풀어 준 노예들을 ‘다시 오게’ 하니, 하나님께서 떠났던 바벨론 군대로 ‘다시 오게’ 하신다. 결국 시드기야와 그의 고관들의 목숨은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겨지고 말 것이다(34:21).

그들은 원래 자신의 소유였던 노예를 풀어 주었다가 다시 되잡았을 뿐이었겠지만, 그 대가는 그들의 생명과 삶이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고 욕심을 따라 돌이킬 때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칼과 기근, 전염병뿐이다. 그 장소가 하나님의 약속이 빛나는 시온이라 할지라도, 그 왕이 하나님의 언약이 생생한 다윗의 후예라고 할지라도, 되잡혀 온 노예의 생명의 가치는 시온과 다윗의 후예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만다.

모든 히브리 노예가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면, 예루살렘은 모두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루살렘이 지켜진다 한들, 여전히 다른 이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야 한다면, 예루살렘은 더 이상 지킬 만한 장소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다윗의 후예인 왕이 다스릴 때에 예레미야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지만,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이 불타 버린 후,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다윗의 나라에서 한 뼘의 땅도 없던 가난한 이들은 다윗이 사라지고 바벨론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경작할 땅을 받았다(39:10)! 누구를 위한 다윗이며, 누구를 위한 성전인가.

하나님께서 시드기야가 다스리는 유다에 멸망을 이미 선포하셨지만, 시드기야의 불순종으로 그 멸망은 현실이 된다. 하나님이 정한 심판을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 일”을 행하는 일뿐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상관없이 욕심에 사로잡히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재앙과 심판이 그들에게 들이닥쳐 피할 길이 없다. 그것이 바로 애굽의 바로가 그 마음을 완강하게 하니 하나님께서도 그 마음을 완강하게 하신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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