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호 예레미야의 말씀들] 예레미야 35~36장

지난 호에 살펴본 대로, 예레미야 34~36장은 한 덩어리로 묶여 있으며, 앞으로 닥칠 멸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시드기야와 여호야김의 모습, 이에 반대되는 레갑 자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시드기야는 국가적인 위기 시에 노예 해방이라는 희년 조치를 실행했지만, 얼마 후 이를 철회해 버렸고,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잠시 예루살렘을 떠났던 바벨론 군대가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며 유다의 멸망을 기정사실로 선포하였다. 35장과 36장은 다시 여호야김 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34장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레갑 자손의 순종(35장)

레갑 자손에 대한 언급은 열왕기하 10장에서 볼 수 있다. 엘리사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의 반란을 통해 오므리 왕조는 종언을 고한다. 예후의 혁명은 단지 왕조를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오므리 왕조 이래 북이스라엘 전역을 휩쓸고 있던 바알신앙의 모든 잔재를 청산하는 일을 목표로 하였다. 아합의 아들인 요람왕을 비롯해서 요람과 동맹하였던 유다왕 아하시야, 그리고 그의 형제들도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세벨 역시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아합 가문 전체를 몰살한 예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알을 섬기는 모든 제사장과 선지자를 진멸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 일에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도 함께 참여하도록 요청한다.

예후가 거기에서 떠나가다가 자기를 맞이하러 오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난지라 그의 안부를 묻고 그에게 이르되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하니 여호나답이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이르되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손을 잡으니 예후가 끌어 병거에 올리며 이르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왕하 10:15~16)

본문에 따르면 여호나답은 예후의 혁명을 지지하였으며, 예후의 조치가 “여호와를 위한 열심”이라는 데 동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예후와 손잡은 여호나답은 예후가 아합에 속한 자들을 모두 죽이는 모습을 목격하였을 것이며, 특히 바알을 섬기는 수많은 사람을 진멸하는 자리에도 함께하게 된다(왕하 10:23). 열왕기에 실린 짧은 내용은 여호나답이 순수하고 격정적인 야훼신앙을 견지하였던 인물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를 예레미야 35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레갑 자손들을 성전으로 초대해서 포도주를 마시도록 권유한다. 그러나 레갑 자손들은 이를 거절하는데, 그 까닭은 그들의 선조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조상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 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렘 35:6~10).

예후 혁명을 지지하고 참여하였던 여호나답이 이러한 명령을 후손에게 명한 때가 예후 혁명 이후인지 이전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명령은 정착하는 삶을 거부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포도원과 포도주는 정착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과 즐거움을 상징하는 소재들이지만(창 27:28; 신 7:13; 11:14; 왕하 18:32; 사 27:2; 렘 32:15), 여호나답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뿐 아니라 농사도 짓지 않고 집도 짓지 않되 장막에 거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이것은 자손 대대로 정착하지 않고 유목하며 떠돌도록 명령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사실 “레갑”이라는 이름은 ‘~을 타다(ride)’라는 동사와 동일한 자음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름 자체가 유목 생활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호나답은 광야에서 지내는 삶의 형태야말로 이스라엘의 온전한 모습이라고 여겼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조상의 이러한 강경하고 원칙적인 명령이 레갑 자손들 대대로 지켜졌다는 사실이다.

조상의 명령에 순종하는 레갑 자손에 대한 묘사는 곧바로 이와 연관된 야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어진다.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하나님의 말씀은 레갑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의 대조에 근거하였다. 레갑 자손은 조상의 말에 순종하여 대대로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살아왔으되, 이스라엘 자손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이르시는 데도 순종하지 않았다(35:13~14). 여호나답이 후손에게 약속한 내용은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였고(35:7), 레갑 자손은 이를 믿고 그에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약속하신 내용은 “너희는 내가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 살리라”였으되(35:15), 이스라엘은 그 보내신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된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자손과 레갑 자손에 대한 마지막 대조는 그들에게 닥칠 미래에 대한 모습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하나님께서 이미 선포하신 재앙을 모두 겪게 될 터였다(35:17). 그러나 여호나답의 명령에 순종한 레갑 자손에게는 하나님 앞에 설 자가 끊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다’라는 표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중보기도 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창 19:27; 렘 15:1),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왕상 17:1). 예레미야는 그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하던 이였고(렘 18:20), 하나님께서 그 앞에 서서 섬기도록 구별하신 이이기도 하였다(렘 15:19). 레갑 자손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자가 끊어지게 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레갑 자손이 대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될 것을 선언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당시에 대부분의 유대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났지만,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레갑 자손 역시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백성의 본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레갑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의 대조는 왜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임하게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처럼 멸망과 재앙을 향해 달려가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요를 바알에게서 온 것으로 여기는 이스라엘에 비해, 레갑 자손은 그 풍요로운 산물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 야훼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과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겼다(von Rad: 113). 아마도 레갑 자손은 땅에서 나는 선물을 쥔 백성의 타락을 직면하면서, 야훼를 섬기는 삶과 선물을 누리는 삶은 공존할 수 없다 판단하며, 정착과 그 산물을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살면서 그 땅이 주는 풍요로운 선물을 취하지 않고 살아간 레갑 자손은 그 땅을 영원토록 누리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되, 그 땅의 선물에 취하여 살아가면서 이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은 도리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스라엘이 부에 매달려 야훼를 버린 백성이라면, 레갑 자손은 야훼를 얻기 위해 부를 버린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호야김의 불순종

선조의 말을 듣고 대대로 순종한 레갑 자손에 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이어지는 36장에서 그 생생한 실례를 통해 드러난다. 아울러 그 예를 들되,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 개인을 예로 드는 게 아니라 다윗의 자손인 왕을 예로 든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순종하는 사람의 본으로는 후손의 이름조차 제대로 소개되고 있지 않으며 정착해서 사는 기업도 없이 떠도는 레갑 자손이 거론된 데 비해, 불순종하는 사람의 본으로는 최고의 권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다윗 가문의 왕이 거론되고 있다. 예레미야의 이러한 배열은 다윗 가문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짐작하게 한다.

여호야김 4년(주전 605년), 하나님께서는 옥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에게 이제껏 이르신 말씀을 기록하도록 명령하신다. 입으로 선포된 말씀을 두루마리에 기록하도록 명하시는 까닭은 오직 한가지다.

유다 가문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난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용서하리라(렘 36:3).

말씀을 기록하여 선포하는 까닭은 그 말씀을 들은 이들로 하여금 가던 길을 돌이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경험케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과연 그 백성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을까? 아니, 다윗의 후손된 왕은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을까?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그 모든 말씀을 불러 주며 기록하게 하였고, 옥에 갇힌 자신을 대신하여 가서 두루마리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낭독하라고 명하였다. 이 두루마리에는 예레미야의 사역이 시작된 이래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 담겨 있었다. 이 말씀을 백성이 들은 날은 여호야김 5년 9월의 금식일이었다. 이스라엘에서 공식적인 금식일은 속죄일(레 16)뿐이었다는 점에서, 36장에서 언급되는 금식일은 특별한 상황 때문에 선포된 날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여호야김 4년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서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상대로 대승을 거둬 근동의 패권을 확고하게 장악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김근주: 174). 예루살렘 모든 백성과 유다 성읍에서 예루살렘에 이른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금식을 선포했다는 것은 바벨론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고조되는 위기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참고. 대상 20:1~4). 그러므로 이 금식은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우리 민족의 살길은 무엇인가와 같은 현실적 문제에 직면하여 하나님만이 우리의 살길이요 생명임을 선언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예레미야가 이 금식일에 맞추어 바룩으로 하여금 두루마리를 읽도록 한 것은 지극히 적절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두루마리의 말씀은 처음에 성전에 있는 사반의 아들 그마랴의 방에서 거기 모인 모든 백성을 향해 낭독되었고, 그마랴의 아들인 미가야에 의해 왕궁 고관들에게 전파되었다. 이 고관들은 사람을 보내어 바룩을 데려오게 하였고, 바룩은 다시 한번 그 두루마리를 이 고관들을 상대로 낭독하였다. 두루마리의 내용에 놀란 이들은 바룩과 예레미야에게 몸을 숨기도록 지시한 채, 벌어진 상황을 여호야김왕에게 보고하였으며, 왕은 즉시 그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낭독하도록 명하였다. 왕실에 있던 신하에 의해 그 두루마리가 하나하나 낭독될 때마다 왕은 칼로 그것들을 베었고, 베어진 두루마리 조각들은 화롯불에 던져졌다. 왕의 행동을 말렸던 이들도 있었지만(렘 36:25), 왕과 그의 신하들은 두루마리의 모든 말씀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다(36:24). 자신의 옷을 찢기는커녕 왕은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찢어 불태웠으며, 전부를 불태운 후 바룩과 예레미야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이전에 성전에서 했던 심판 설교 때문에 죽을 뻔했던 예레미야를 살려 준 이가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었다면(26:24), 두루마리에 적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도운 이들은 사반의 아들 그마랴를 비롯한 몇몇 서기관과 고관이었다(36:10~12,19,25).

나라에 닥쳐오는 위기는 누가 보더라도 분명하였고, 그러한 위기감이 온 백성에게 선포된 금식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금식을 위해 모여든 백성이나 이 금식을 선포한 왕은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라고 야훼를 경외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라고 하나님을 거역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외양은 갖추었지만, 정작 그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는 완전히 귀를 닫아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폭로하면서 오직 그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외침이 담겨 있었을 두루마리에 대한 여호야김과 신하들의 반응은 그들이 선언한 금식의 의미를 재고하게 한다. 그들이 원하는 금식의 효과는 무엇인가? 그들에게 있어서 금식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금식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놀라운 기적으로 다가오는 바벨론의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건져 내리라고 기대했던 것일까?

분명한 점은 여호야김과 그 백성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책망하시고 무엇을 요구하시는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레갑 자손은 그 선조가 명한 명령의 의미를 알고 대대로 순종하지만, 정작 이 다윗의 후손 왕은 하나님의 뜻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숨어 있던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결정을 알리신다(36:27~32).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말씀을 다시 두루마리에 기록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신하들과 백성을 그 죄악으로 인해 벌할 것임을 알리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인 왕을 향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가 없게 될 것이요 그의 시체는 버림을 당하여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라고 선언하신다(36:30).

다윗에게 주신 영원한 언약이 생생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다윗의 후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의 후손 가운데 왕위에 앉을 자가 없고 그의 시체는 제대로 매장도 되지 못한 채 길가에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여호야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은 인간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제 것인 양 당연히 여길 수 없음을 확실히 보여 준다. 다윗에게 영원한 약속을 하셨지만, 그 모든 주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인 열심과 외양으로 금식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다윗의 후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언약이 아니라 비참한 최후일 뿐이다.

예레미야 26장과 36장은 여러 공통점이 있다. 시대적 배경으로 여호야김 시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26:1; 36:1), 특별한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선포된 말씀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26:2; 36:9~10), 야훼의 말씀의 목적이 회개와 용서를 위한 것이라는 점(26:3; 36:3), 경고-거절-심판 선포라는 내용의 흐름, 선포된 말씀에 대한 다양한 응답 등, 여러 점에서 두 장은 공통된다(Stulman: 296~297). 26장이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고 저주거리가 되고 말 것이라는 선포라면, 36장은 다윗 가문이 비참하게 몰락할 것에 대한 선포다. 그러므로 공통된 패턴을 따라 구성된 26장과 36장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유력하게 붙잡고 있던 신앙의 두 기둥을 산산조각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자랑이 그들 가운데 세워진 성전이었지만, 그 성전은 전혀 그들을 도울 수도 건질 수도 없다. 다윗에게 주신 언약은 영원하고 예루살렘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으리라 여겼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가 없게 하시며 예루살렘이 멸하여지고 사람과 짐승이 사라지게 되리라 선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마리에 응답하지 않는 한, 성전도 영원한 언약도 무의미할 뿐이다. 아울러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기둥과도 같다고 할 수 있는 이 두 가지를 산산조각 내고 있는 예레미야의 사역은 결코 평안할 수 없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바룩의 비망록

37장부터 44장에 실린 내용은 시드기야의 즉위 이래 유다의 마지막 날들을 숨 가쁘게 보여 주고 있다. 예레미야 수난기 혹은 바룩의 비망록이라고 불리는 이 본문은 “예레미야의 고백” 본문만큼이나 고난으로 가득 찬 예레미야의 삶을 보여 준다. 예레미야에게 계속해서 밀어닥치는 고난의 물결에도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마실 물조차 없어 죽을 지경인 예레미야에게 먹을 것을 날라다 주는 까마귀도 없고, 사자의 입을 막으신 기적도 없다(von Rad: 176). “대적들에게 이리저리 당하고 있는 예레미야는 완전히 아무런 힘이 없다. 그의 고난도 그가 하는 말도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뿐이다”(von Rad: 177).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신을 풀어달라고 탄원하는 예레미야의 모습(렘 37:20)은 예언자와 그 인내에 대한 영웅적인 묘사와는 거리가 멀다. 마치 예수께서 골고다 길을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면서 여기저기에서 멈추어 서시듯이, 바룩의 비망록은 예레미야가 걸어갔던 “비아 돌로로사”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레미야의 첫 소명에서 제시되었듯이, 이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고 뽑고 파괴하시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의 한가운데에 서서 고스란히 그 모든 파괴의 과정을 겪고 있는 예레미야의 모습이 이 장들에서 그려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 인간이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고통의 한 부분을 감당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von Rad: 178).

앞으로 좀 더 살펴보겠지만, 바룩이 전하고 있는 예레미야 이야기는 ‘그리고 이후로도 행복하게 살았다(happily ever after)’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는 해피엔딩이 없다. 예레미야의 삶의 마지막은 계속된 고난의 점철, 그리고 처절하고도 안타까운 끝만 있다. 이러한 이야기로 예레미야를 영광스럽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오늘의 간증 이야기와 바룩이 전하는 예레미야 이야기는 얼마나 다른가? 그의 고난은 영웅적이지도 않을뿐더러, 그가 겪는 고난과 사건에 대해 어떤 긍정적인 신학적인 의미도 설명되지 않은 채 전해졌다. 아마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통 가득한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삶의 길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는 사실 민족이 당할 고난에 미리 참여하고 있었다. 예언자들이 다가올 새로운 날들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처럼 민족이 당할 고난을 미리 보여 주는 삶도 있었다.

김근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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