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호 예레미야의 말씀들 21] 예레미야 41~44장

붕괴된 희망(41장)

“그다랴와 함께 동이 튼 미래, 포로들의 귀환과 수확물을 추수하는 일들은 왕실의 후예에 의해 무너져 버렸다”(Carroll: 708). 그다랴라는 인물이 지닌 미덕 -그의 순전함과 선함, 남은 공동체의 삶을 제대로 중재하고 대변했던 그의 활동-은 다시금 민족주의와 전쟁의 야만 속에 희생되어 버렸다(Carroll: 708). 그다랴를 죽인 지 이틀이 지났음에도 사람들이 이를 알아채지 못하였다는 것은 역으로 그다랴의 통치가 얼마나 평화적이었는지, 그리고 그다랴와 그의 주변 인물들이 현실의 약삭빠르고 탐욕스러운 정치와는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좋은 통치자는 그의 존재 자체를 백성들이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점도 그다랴와 그의 죽음에서 볼 수 있다. 그다랴의 죽음이 유대공동체에 가져다 준 충격은 포로기 70년 동안 준행된 7월 금식(슥 8:19)에서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7월 금식이 그다랴의 암살과 연관하여 지켜졌다고 여긴다(Meyers and Meyers: 388). 그다랴의 통치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이에 대해 알베르츠는 예레미야 52장 30절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23년(주전 582년)의 포로 이송을 주목한다(134). 예루살렘이 이미 멸망하고 다수의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는데, 새삼 그로부터 5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포로를 끌고 간 이유가, 아마도 바벨론이 세운 총독 그다랴를 암살한 것에 대한 대응이 아니었을까 유추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다랴를 암살한 이스마엘은 그다랴와 함께 있던 사람들뿐 아니라, 그다랴 진영에 머물던 바벨론 군사들도 죽여 버렸다. 이스마엘의 잔혹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세겜과 실로, 사마리아 등 북쪽 지역에 머무르던 이들이 야훼의 성전으로 가고자 하여 미스바에 들렀다(41:5~6).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낸 채 성전을 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무너진 성전과 멸망당한 나라를 애통해하는 무리들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스마엘은 아무 일도 없는 척, 그다랴에게 데려가 주겠다고 속인 후 그들을 일거에 죽이고는 구덩이에 던져 넣어 버린다. 팔십 명의 무리 중, 이스마엘에게 곡식을 바치겠다고 한 이들만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이스마엘에 의해 죽임당하여 구덩이에 던져졌으니, 그야말로 끔찍한 학살이 일어난 셈이다.

이후에 이스마엘은 남아 있는 사람들을 사로잡아 자신을 후원하는 암몬 진영으로 넘어간다. 그렇지만 그의 속셈은 이전부터 그를 경계하던 요하난에 의해 저지되었고, 요하난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마엘은 겨우 몸만 살아 암몬으로 빠져 나간다. 비록 요하난에게 패배하긴 하지만, 평화롭던 공동체의 모든 삶을 파괴한 이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무사히 빠져나간다는 점에서도 예레미야의 본문은 충격적이다(Stulman: 326). 스툴만(L. Stulman)의 지적대로, 무죄해 보이는 예배자 칠십 명의 죽음과 이스마엘 등의 무사 탈출은 예레미야서에서 일관되게 볼 수 있는 주제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번성’과도 연결된다. 암몬 진영으로 피한 이스마엘의 모습은 암몬 땅으로 피신한 다윗의 모습과 겹친다(Sweeney 2005: 116~117). 다윗은 그곳에서 다시 힘을 모아 압살롬을 이겼으나, 이스마엘의 모습은 암몬 진영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다시 회복되지 못할 다윗 왕권을 상징하고 있다.

기도를 요청하는 사람들(42~43장)

이스마엘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남은 백성들을 이끌 지도자로 등장한다. 이스마엘의 학살에 대한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한 요하난은 남은 공동체를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다. 애굽으로 향하던 도중 베들레헴 인근 게롯김함이라는 곳에서, 요하난을 비롯한 무리는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한다. 나라가 망한 후에 적은 무리가 그 땅에 남겨졌으되, 그마저도 이스마엘의 음모와 학살로 많이 죽고 이제 참으로 적은 무리가 남았으니, 이 남은 무리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볼 수 있기를 구하는 것이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부탁하는 그들의 자세는 아주 진지하고 비장하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야훼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훼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야훼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야훼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렘 42:5~6).

기도 부탁을 받은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의 응답은 십 일 후에 임하였다(42:7). 예레미야가 이 공동체를 향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이 땅에 유하라’였다. 특히, 42장 10절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예레미야의 소명 기사(1:10)에 나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너희가 이 땅에 눌러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42:10).

헐고 뽑고 세우고 심는 것이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었으되, 이제 요하난의 무리들에게 전하는 예레미야의 말 역시 그 사명의 한 부분이었다.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공동체는 세워지고 심겨질 것이로되, 이를 거역하면 헐리고 뽑힐 것이다. 만일 이 백성들이 바벨론 군대가 두려워서 전쟁 없는 애굽으로 도망친다면, 야훼 하나님께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칼이 그들을 뒤쫓아 애굽까지 이르게 할 것이다. 칼을 피해 다니면 내내 칼에 뒤쫓기는 삶을 산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여 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그 칼이 그들에게 미치지 않게 하신다. 그 땅은 조건이 좋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땅이며 약속이 있는 땅인 것이다. 심판 이전에는 그 땅에 그저 거하려는 이들의 태도가 문제였으나, 이제는 위험으로 가득 차 보이는 그 땅을 자꾸 떠나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전쟁 없고 양식이 풍부한 땅이라 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면 하나님께서 기근이 그들을 뒤쫓게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신 유다 땅에 머물게 되면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사 칼과 기근이 사라지게 하시고 그들로 그 땅에 심겨지고 세워지게 하실 것이다. 참으로 이스라엘에게 안전한 땅은 야훼와 함께하는 땅이지, 전쟁 없는 땅이지 않다.

42장 18절까지 야훼의 말씀이 선포되었으되, 19절에서 22절은 이 공동체를 향한 예레미야의 말을 전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도 그 백성을 향해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하시고, 예레미야 역시 동포들을 향해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경고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미 이 백성들이 자신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거역할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야훼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야훼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42:20).

예레미야에게 기도 부탁을 할 때에 이미 요하난과 그의 공동체는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작정한 상태였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들의 결정과 판단에 대한 하나님의 추후 승인이었다. 그렇기에 예레미야는 그들이 기도 부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속였다고 폭로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만, 실상 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안전과 유지이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이든 “주님 말씀하시면 순종하겠습니다” 말하지만,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마음을 속인다. 기도하는 그 순간은 진심이지만, 그 모든 진심과 때로 흘린 눈물은 사실 자신들이 이미 결정한 사항을 하나님께서 정당화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곤 한다. 자신들의 결정을 신앙적으로 치장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덧칠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공동체 내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난무한다. 이미 28장에서 살펴보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일수록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직접 주신 말씀이고 환상임을 더더욱 확신 있게 증거하지 않던가! 그리고는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욕심과 안정 추구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덮어서 모든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예상할 수 있듯이, 요하난과 그 공동체는 예레미야의 말이 거짓이라고 선언한다(43:2). 나아가 예레미야의 말은 바룩과 결탁하여 유다 공동체를 바벨론 군대의 손에 넘겨 포로가 되게 하려는 친바벨론적 음모라고 뒤집어씌운다. 기도를 부탁하고 순종을 다짐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의 마음에 있는 것은 자신들의 평안과 안전뿐이었고, 이에 부합하지 않는 그 어떤 하나님의 말씀도 그들에게는 “거짓”일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배격하는 수단은 상대를 친바벨론 분자로 규정하는 것, 교묘하게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진리를 말하고 참된 살 길을 말하는 이들을 반민족주의자의 이름표를 붙여 제거하는 것은 변함이 없는가 보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오늘의 분단된 한반도의 상황에서라면 예레미야에게 붙여질 이름표는 “빨갱이”였을 것이다.

결국 이 공동체는 예레미야와 바룩까지 모두 끌고 애굽으로 기어이 내려간다. 그들이 버린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고, 그들이 취한 것은 눈앞의 평화와 안전이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예레미야의 모습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모세의 모습과 대비된다(Sweeney 2005: 115). 출애굽의 역전이 이루어진 셈이며 그 백성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애굽 땅 다바네스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왕의 군대가 애굽 땅에까지 미치게 될 것이며, 애굽 곳곳에 전쟁이 미치게 될 것임을 선언하신다(43:8~13). 애굽은 결코 평화로운 땅이 못 될 것이다.

하늘 여왕 숭배(44장)

44장은 애굽 땅 곳곳에 이른 유다 백성들을 향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 주고 있다. 2~6절은 왜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하였지를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전하고 있다. 예루살렘이 겪은 재난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제사하고, 자신들의 악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다면 결코 새롭고 나은 미래는 다가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시대를 다루고 있는 구약의 본문들은 도처에서 지난 역사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증거하고 있다(가령, 느 9:5~38; 시 106:6~43; 단 9:4~19). 여호수아서부터 열왕기하에 이르는 역사 서술의 관점 역시 ‘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불러내신 이스라엘이 이렇게 멸망당하게 되었는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철저하게 반성하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고, 재난을 겪고 난 후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도리어 지난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고 그저 장밋빛 미래만을 바라보기 쉽다. 그러다보니 도리어 과거를 반성하려는 이들을 향해 과거 지향적이라고 몰아붙이며, 다가올 미래만을 생각하고 바라보자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난 과거를 덮거나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때가 그래도 좋았지’하며 미화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애굽 땅에 내려간 유다 공동체에서도 발견한다.

애굽에 내려간 이들은 그곳에서도 애굽의 우상들을 섬기며 우상숭배를 일삼았다(44:8). 자신들의 고집으로 애굽에 내려왔고, 일단은 바벨론의 위협으로부터 놓여났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여겼을 것이며, 그로 인해 스스로 우상을 만들고 애굽의 우상을 섬기는 일을 일삼았을 것이다. 과거를 잊어버린 채, 또다시 애굽 땅에서 우상숭배를 일삼는 동포들을 향해 예레미야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하는데, 예레미야의 말에 대한 이 백성들의 반응은 그들이 지난 과거를 어떻게 돌아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네가 야훼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으니라 하며(44:16~18).

멸망 이전 예루살렘과 유다에서는 “하늘 여왕” 숭배가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었다. “하늘 여왕”은 구약 전체에서 오직 예레미야서에만 언급되고 있어(렘 7:18; 44:17, 18, 19, 25), 더 자세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대 근동 지역 신들의 경우 주신의 짝이 되는 여신이 늘 함께 숭배되었고, 가나안의 바알 역시 그의 배우자인 아낫 혹은 아세라가 함께 숭배되었다는 점에서, 하늘 여왕 숭배도 이와 연관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여신 숭배의 흔적은 엘레판틴(Elephantine)공동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전 5세기 후반 페르시아 캄비세스의 애굽 원정과 더불어 수많은 유대인과 아람인 용병들이 동원되었고, 그들에 의해 애굽 남부 나일강 유역의 섬인 엘레판틴에 유대 용병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남긴 아람어 기록들(엘레판틴 문서)을 보면, 그들은 야훼 하나님의 배우자를 섬기는 제의를 거행했다. 하나님의 배우자에 대한 인식은 이스라엘 안에 꽤 오랜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헤브론 서쪽에 있는 키르벳 엘-콤(Khirbet el-Qôm) 유적지를 비롯한 여러 유적지들에서 발견된 주전 8세기경의 것으로 여겨지는 글들에서도 볼 수 있다. 키르벳 엘 곰 무덤 벽에 새겨진 축복문에는 “야훼와 그의 아세라”가 복을 주기를 구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아울러 야훼의 이름 다음에 아세라의 이름이 잇달아 나오는 축복문은 쿤틸렛 아즈룻(Kuntilet Ajrud)에서도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사마리아의 야훼와 그의 아세라를 따라 내가 너를 축복하노라”로 풀이될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나온 기록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Dever 1984; Lemaire), 최소한 일반적인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의 배우자에 대한 생각이 일상적이었음을 알게 된다(Dever 2008: 55). 모압 지역에서 발굴된 어떤 성소의 경우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보좌를 지니고 있다는 점도 야훼의 배우자에 대한 민속 신앙의 흔적을 반영한다(Dever 2008:54).

이상을 볼 때, 야훼의 배우자로서의 아세라에 대한 인식은 고대 이스라엘 가운데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쿤틸렛 아즈룻의 벽화는 고대 이스라엘이 여러 신을 섬겼음을 확실히 보여 주는 증거로 여겨졌으며, 야훼는 아세라와 나란히 숭배되었다는 것이 대다수의 견해로 받아들여졌다. 산당을 파괴한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노력은 이러한 경향들에 대한 신명기적 개혁과 변화를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게 청산될 수는 없었고, 예레미야서에서 여전히 그 영향을 보여 주고 있으며, 엘레판틴도 그러하다. 이것은 야훼와 그 짝인 아세라로 상징되는 비옥과 풍요 제의의 영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증거하고 있다. 야훼 하나님을 남성으로 묘사하고 표현하는 한, 그 짝이 되는 여신, 그리고 남성신과 여성신의 결합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풍요와 번성이야말로 이스라엘을 멸망에까지 이르게 한 바알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레미야서에 전해지는 하늘 여왕 숭배는 바로 이 지점에 맞닿아 있다.

애굽에 내려간 유다 백성들은 그들과 그들의 선조들이 예루살렘에서 하늘 여왕에게 분향하고 제사를 드렸으며, 이러한 분향과 제사의 결과는 “먹을 것이 풍부하고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않음이었다고 대담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의에 유다 백성들과 그 선조들, 왕들, 방백들이 모두 참여하였으며,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모든 거리에서 자행되었다. 하늘 여왕 숭배를 고발하는 또 다른 본문인 7장의 경우,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 드리러 오는 백성들을 향한 말씀이고 그들의 그릇된 생각에 대한 고발임을 생각할 때, 결국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와 더불어 하늘 여왕에 대한 제의도 겸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고백하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를 보면, 하늘 여왕 숭배의 핵심에 놓인 것은 넘쳐 나는 제사, 그리고 제사에 수반되어 주어지는 풍요, 이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바알 숭배가 이스라엘에 가지고 온 최대의 폐해는 제사 혹은 예배의 남용, 그리고 복받음과 풍요로 입증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제의(祭儀)만큼 정성이 필요한 것도 없고, 제의만큼 행하기가 명확하고 분명한 것도 없다. 제의는 절차가 중요하며 드려진 예물과 횟수가 의미 있다. 그래서 제의는 예배자들이 그 하나님께로 나아가기에 가장 쉽고도 인상적인 통로이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제의야말로 예배자들이 그 하나님을 움직이고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통로인 셈이다. 더 정성껏 예배드리고, 더 온 마음을 다해 예배드리는 것이야말로 종교의 본질 중 하나이면서,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미혹되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넘쳐나는 예배의 절정은 수천수만의 제물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신 제사일 것이다. 자기 몸을 혹은 자녀의 몸을 산 채로 드리는 것만큼 정성스러운 예물이 어디 있을까. 미가의 선포는 이러한 현실을 통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야훼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야훼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 6:6~7).

애굽의 이스라엘은 지난 역사를 반성하되,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에 인용한 미가의 대답–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미 6:8) –은 성전 설교에서 제시된 예레미야의 대답과 본질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렘 7:5~7).

이러한 정황은 곧바로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오늘 우리 위태로운 교회의 살 길은 무엇인가? 예배의 회복이 살 길이라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는 예레미야 시대 제사의 번성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예배의 감격을 되찾자는 구호나 예배가 살 길이라고 제시하는 소리는 그리스도인들을 다시금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예배의 정성은 해결책이 아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외친 말씀에서 예배나 제물의 정성이 부족하다는 외침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건만, 오늘의 한국교회는 오직 모든 문제를 예배의 회복으로 해결하려고 오늘도 변함없이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서 교회로 불러들이고 있다.

유다 백성들의 남은 무리는 자신들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와 바룩까지 끌고 내려갔으니, 애굽 유다인들을 향한 예레미야의 선포가 예레미야의 역사적인 모습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참으로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레미야는 멸망받을 백성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 그는 이 백성에게 임할 멸망을 선포했을 뿐 아니라, 그 죄로 인해 멸망받는 백성들과 마지막 순간까지 같이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평생의 동역자인 바룩도 마찬가지였다. 45장 3절(“화로다 야훼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에서의 “나”는 바룩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바룩은 단지 예레미야의 기록자일 뿐 아니라, 그도 역시 예레미야와 함께 탄식과 고통 속에 살아간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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