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호 발행인논단]

야훼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의 복

묵상(黙想)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가(hāgā)’는 조용한 장소에서 명상에 잠기거니 생각에 빠져 물아일체가 될 때까지 하나의 주제에 파고드는 철저한 상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고 암송하며, 이해하면서 읽고, 소화시켜 가는 영적 수련입니다. 그것은 순종하려고 하는 영적 분투입니다. 이사야 50장 4~10절은 아침마다 말씀을 깨치기 위해 하나님 말씀의 영적 가청권 내에 머물려고 애쓰는 학자들을 소개합니다.

4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여기 등장하는 학자들은 히브리어로 림무딤(limmudim)인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는 자며 마음이 곤고한 사람들을 위로하여 계속 살도록 격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경청하는 귀와 치료하는 혀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당신의 종으로 하여금 곤고한 자를 말로 지탱시켜 주고 위로해 주고, 아침마다 학자들의 귀를 여시고 혀를 단련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새벽에 묵상 시간을 갖는 성도의 특전(特典)입니다. 그러나 5절은 긴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순종하는 것이 두렵고 어려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종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다가 박해와 수욕을 당합니다(6절). 그는 자신을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해도 얼굴을 가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욕과 고독 속에 방치된 것 같은 상황에서도 야훼의 도우심을 맛봅니다. 그래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할 수 있었습니다. 종국에는 영화롭게 되고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을 믿고 그 어려운 순간을 견딘 것입니다. 야훼의 종은 자신을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심을 믿고 담대해 졌습니다(8절). 그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과 신원하심을 믿게 됩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9절). 그래서 종은 적극적인 위로자로 발돋움합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있느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이것이 아침마다 묵상하는 제자의 천복입니다. 시편 1편은 흑암 중에서도 야훼의 말씀을 읽고 암송하며, 말씀대로 사는 자들의 복을 선언합니다. 시편 1편은 시편 150편 전체의 서론입니다. 그것은 나머지 150편이 대부분 그렇듯이 단순한 흑백 논리를 주장합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의 길 아니면 악인의 길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 의인과 악인밖에 없다면 자신은 충분한 의인도 되지 못하고 충분한 악인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체성 혼란에 빠집니다. 나는 누구인가?

악인-죄인-오만한 자의 위계 조직, 악의 왕국 안에서 사는 단독자

시편 1편은 충분한 의인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사람은 악의 잠재적 동맹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선악의 중간에 서 있는 사람, 즉 회색 지대에서 암약하는 악인이 많다는 것입니다. 악인에는 세 등급이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는 악인’, ‘죄인의 길에 선 악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악인’이 바로 그들입니다. 여기서 동사들의 진전 과정을 잘 주목해 주십시오. ‘좇다’, ‘서다’, ‘앉다’ 중 어느 동작이 가장 안정감이 있습니까? ‘앉다’라는 동사입니다. 즉, 오만한 자는 악인과 죄인에 비해서 상당히 확신에 차 있는, 자신의 길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는 안정감이 있는 악인입니다. 자신의 악한 삶의 체계를 다른 사람에게 전도(傳道)할 만큼 사명감 있는 악인입니다.

그에 비해서 꾀를 좇는 악인은 나쁜 꾀를 늘 들으면서 유혹을 받는 단계의 순진한 죄인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쁜 충고에 귀를 개방해 놓고 나쁜 꾀를 수용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우리가 만나는 대다수의 악인입니다. 얼굴은 착해 보여도 알고 보면 대부분 이런 종류의 악인입니다. 신문 보고 욕하는 사람도 이런 악인입니다. 신문에 등장하는 사악한 사람들의 악행을 비난하고 나쁘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번 그렇게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이 악인입니다. 하지만 이 수준, 즉 악인의 꾀를 좇는 수준은 순진무구한 죄인의 단계입니다. C. S. 루이스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는 “지하에 계신 아버지 사탄”의 앞잡이인 고참급 삼촌 악마(Uncle)가 신참 졸개 악마(Wormwood, ‘인진’이라고 번역)에게 보내는 기독교인 유혹 교본을 담은 서간문들입니다.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고 수많은 사람을 파멸로 이끌었던 고참 사탄 출신의 악마 ‘엉클’이 신참 영업사원 악마 ‘웜우드’에게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유혹해 파멸시킬 것인가에 대한 자상한 지침으로 가득 찬 편지를 보냅니다. 그 글 중 다음과 같은 지침이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을 전형적으로 사악한 사람들로 만들지 말라. 그러면 의인이 분기탱천해서 일어난다. … 어떤 악인을 많이 만드는 게 제일 유리한가 따져 보아라. 선인처럼 보이는 악인을 많이 생산해서 사회 요소요소에 배치하라.” 한데 어리석게도 웜우드가 이렇게 순진한 대답을 합니다. “대장님, 어제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제가 한 명의 신자를 완전히 녹다운시켜 누가 보더라도 완벽한 악인으로 타락시켰습니다.” 그러자 엉클이 “이놈아 그것이 바로 우리 사탄이 빠져서는 절대로 안 될 악한 시험이란다”라고 말합니다. 엉클은 누가 보아도 악인들보다는 의인처럼 보이나 실제 악인으로 사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의인인 것처럼 말하고, 의인의 고민은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귀는 악인의 꾀에다 열어 놓는 악인들이 사탄의 충실하고 안전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의인의 삶을 즐거워하지 않으면 우리는 악인의 꾀를 좇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단계의 죄인은 죄인의 길에 서 있는 죄인입니다. 꾀를 좇는 악인보다는 한 단계 진화된 죄인입니다. “길에 들어섰다”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악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죄인은 ‘나는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은 생명의 길보다는 사람이 붐비는 넓고 광활한 이 길로 갈래. 지옥으로 가는 이 길이 아무리 무섭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간다면 가 볼 만한 거겠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단 자신의 길을 확정하고 걸어가는 죄인을 돌이켜 의인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인의 길에 들어서려고 결단하기까지는 그 사람은 수없이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도 지하에 계신 어둠의 아버지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죄인보다 더 무섭고 위험한 악인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자입니다. 서울역 앵벌이가 악인의 꾀를 좇는 죄인이요, No.3 같은 사람이 죄인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조폭 두목 같은 사람들, 뉴욕 월 스트리트의 금융 공학적 도적 떼나 부산저축은행 임원들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악인들인 셈입니다. 오만한 자들은 앵벌이나 날치기처럼 거리를 활보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빛의 대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사와 권세의 우두머리요, 공중 권세 잡은 자이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보좌’에 앉아 고도로 분화된 악의 봉건 제국을 다스립니다. ‘앉아서 일하는’ 그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할 악의 왕국 통치자입니다. 사회의 표면에 출현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자들은 대개 No.3, No.2 서열의 악인들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자는 앉아서 백지에 서명하거나 많은 서류에 결재서명을 함으로써(해고 결정 등) 수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자는 숫자는 매우 적지만 어마어마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소수의 오만한 자가 악의 제국의 보좌에 앉아 죄악된 삶을 확신 있게 살면서 죄악을 전도하면서 부하를 길러 거대한 악의 왕국을 만들어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왕국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실력(지적, 문화적 창조력)과 물적 토대를 확보하고, 심지어 이념적 토대를 구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만한 자의 한 사람은 일당백의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집니다.

이처럼 악은 철두철미한 위계 조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사람 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만들려면 강고하게 결집된 악의 모든 위계질서와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충돌을 영적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선한 싸움, 즉 누가 더 의롭고 정당한 삶을 사는가를 다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말합니다. “너희들이 싸우는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보좌와 주관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다.” 바울은 악을 뿌리 채 뽑는 것, 악과의 영적 전쟁이 얼마나 힘들며 그것이 치명적인 정도로 영적 에너지를 크게 소진시키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악은 철두철미한 위계질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악한 사람 한 사람을 구출하려고 할 때, 그 악한 사람을 자기 휘하에 두었던 악한 위계질서가 세차게 요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악한 세계와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고는 악의 위계질서로부터 한 사람도 건져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전도할 때 낙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임과 동시에 영적인 긴장을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혼하기 이전의 청년들과 더 어린 사람들은 대부분이 1단계 죄인입니다. 꾀를 좇는 수준이기 때문에 일반 사회인들과 그들을 비교해 볼 때 회개하기 쉽습니다. 이런 ‘젊은 악인’들에 비하면 일반인들은 삶의 기득권과 관련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쉽게 돌아오지 못합니다. 이런 악인들은 하나님께 한두 번 매 맞고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깜부기 재앙과 메뚜기 재앙과 황충 재앙을 주어도 안 돌아옵니다. 매 맞는다고 다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재난과 재앙이 우리를 자동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한 길로 들어선 사람들의 극적인 간증이 주는 안도감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는 악한 길로 들어선 사람은 길을 돌이키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예 죄인의 길로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에 비해서 ‘젊은 악인’들은 악의 위계질서에 편입된 정도가 적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돌이키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악의 위계질서에 이해관계가 얽혀 소속하게 된 어른들은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못 믿는 것입니다. 파라오의 세력이 놓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결단에 달린 것이라면 대부분의 ‘젊은 악인들’은 결단만 하면 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개인의 결단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때는 오로지 20대 밖에 없습니다. 나이 들어서는 그렇게 믿고 싶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악의 조직과 위계질서 속에 철저히 배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하게 살기로 작정하지 않으면, 그 조직원의 일원으로 인정되어 조직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악한 직장 상사의 명령을 받을 때에도 “아니오”를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때문에 한 번이라도 “아니오”를 해 본 사람은 자신이 악한 정사와 보좌와 권세, 주관에 속하지 않았으며 속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주 작은 양심의 목소리로도 악의 왕국의 위계 조직을 허물어뜨릴 수가 있습니다. 요즘 화제인 영화 <도가니>는 이런 진실의 힘이 어느 정도의 위력이 있는가를 예증합니다. 악의 위계질서는 작은 진실의 음성 앞에 허약할 정도로 쉽게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 세 가지 단계의 악인들의 동아리에 속하지 않고 대신 두 가지 일에 힘쓰는 사람입니다.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일, 그것이 복 있는 사람의 전공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해야 하는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복된 자입니다. 그는 진리의 음성에 악의 제국이 얼마나 세차게 흔들리는가를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소화시킨 사람이야말로 악한 꾀가 의인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악인의 꾀는 이런 의인 앞에서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 의인들은 여호와의 율법과 명령을 주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현실이 돌아가지 않을 때는 왜 그런지 고민하고 고투하면서 하나님 율법의 진리됨을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 2절에서 “묵상하는 것”과 “즐거워한다”는 것은 시적 대구를 이룹니다. “즐거워한다”라는 것은 말씀대로 잘 운행되는 세상 현실을 보고 기뻐 “아멘”하는 것이고, “묵상”은 말씀대로 운행되지 않는 세상을 보며 신음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의 세상 통치를 믿으려고 애쓰는 행위입니다. 시편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 한 복판에서 살면서, 즉 단기적으로 볼 때는 말씀이 주도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세상에 살면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내면화시켜야 되는 말씀입니다.

악한 위계질서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은 압니다. 위에서 자세히 살펴본 세 종류의 죄인들은 각종 매스컴을 장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더럽고 추악한 소식을 듣는 사람도 그들의 악에 오염됩니다. 악인들의 악행 보도를 너무 자세히 읽으면 오염됩니다. 도덕적 감수성이 하향 평준화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문 지상에 등장하는 악인들-죄인들-오만한 자들의 타락한 이야기를 자세히 읽지 말고, 대신 선한 사람들의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듣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살아있는 진리임을 온 몸으로 입증하는 사람들의 삶을 사모하고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내적 동기를 부여받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삶은 그 자체가 엄청난 도덕적 저항력을 키우는 삶이며 악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감미로운 사귐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보살핌을 세밀하게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고도의 자발성으로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자유케 하는 멍에를 메지 않으면 여전히 내가 파라오의 채찍 아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1편은 악인․죄인․오만한 자를 내적, 인과적 고려 없이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세 부류의 죄인의 삶을 거부하려면, 오직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야훼의 율법은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하는데, 토라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도적인 감미로운 구원의 이야기인데, 토라의 90%를 차지합니다. 우리가 이 강력한 구원의 역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계산해 넣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처럼 내 구원을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 구원을 창조하려는 사람은 이기적으로 사는 것을 정당화하기 쉬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토라를 읽는다는 것은, 즉 하나님의 객관적인 다스림의 원리를 읽고 그것을 내면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토라를 읽으면 하나님 구원의 역사에 안도감을 느끼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율법을 오랫동안 잊고 지내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라는 진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들에게만 당연하고 절대적인 진리이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고 낯선 이설(異說)로 들릴 것입니다.

야곱은 십대를 사기꾼으로 시작합니다. 십대를 사기로 시작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그의 인생 전체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라반이라는 더 큰 사기꾼을 붙여 주십니다. 그를 볼 때마다 야곱은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야곱에게 수많은 환난과 연단, 징계를 주시면서도 그를 철두철미하게 돌보고 후견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을 맛보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는 상대방에게 사적 보복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돌보심을 믿는 사람은 이기적인 욕망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않는 자, 즉 세리나 이방인은 자신이 신처럼 자신의 구원을 창조하려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못하고 저마다 자기가 자기의 하나님이 되어서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려는 것은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삶은 세상에서 도무지 인정을 못 받고 사는 삶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동생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고독한 삶을 사셨습니다. 내가 제단에 깃들이는 한 마리의 연약한 작은 참새 같이 아주 작은 존재가 될 때 넉넉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악인-죄인-오만한 자들의 삶이 얼마나 큰 유혹이 되는지 우리는 압니다. 명예와 권력 등 모든 직업 세계에는 이런 유혹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길로 들어서면 내가 나의 하나님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돌보심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구원의 감격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덕적인 장치입니다. 시편 19편을 보면 야훼의 구원 이야기는 우리 삶의 모든 상황에 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증거하는 확실한 증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읽으면 내가 유순해지며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출세를 꿈꾸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며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 이것이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감미로움이 없으면 우리는 어디에 넘어가게 됩니까? 악인의 꾀가 더 감미롭고, 죄인의 길이 더 장밋빛처럼 보이고, 오만한 자의 자리가 더 안정되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안정감 있는 삶을 원합니다. 이런 와중에 오만한 자의 안정을 부러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편 19편은 야훼의 증거는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닻을 내리면 확실한 것입니다.

묵상한다는 말은 현실이 하나님 말씀대로 진행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율법이 별 것 아니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조차도 의심하게 만드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겠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묵상은 영적인 고투를 하면서 말씀과 현실이 일치되지 않는 상황을 극복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묵상이라는 단어와 가장 비슷한 뜻이 ‘신음하며 읊조리다’라는 뜻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묵상을 깊이 하지 않으면 세 종류의 악인에게 휘둘리거나 그들과 엮이게 됩니다. 이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의인은 하루 종일 하나님의 객관적인 원칙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에 의심을 품게 되고, 하나님께 속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는 것을 선한 사람이 자꾸 보게 되면 선한 사람들이 오염되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악인이 행복하고 의인의 행세를 하고 대접받으며 의인이 현실에 부대끼고 고난당하기까지 하면 이런 의구심은 더욱 우리를 짓누르게 됩니다. 세상은 악인이 더욱 형통해지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은 살기가 더욱 힘들어집니다(렘 12:1~4).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가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를 죽였지만 이세벨-바알체제는, 즉 악의 위계질서는 완강하고 견고했습니다(왕상 19:1~3). 그는 죽음의 공포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망친 곳에서 죽고 싶다고 해 놓고는 잠시 안도의 숨을 돌릴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불평했습니다. 예레미야 12장을 보면 예레미야도 30년 동안 절대적인 배척과 외면을 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예레미야의 고통에 대한 반증입니다. 예레미야 12장이 바로 묵상입니다. 그는 거기서 시냇가에 심겨진 것이 의인이 아니라 악인이라고 불평합니다. 악인이 훨씬 더 번성하고 형통한 그 현실에 대해 예언자는 고통스러워하며 하나님께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 1장 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용어들인 겁탈과 강포는 사회 유력층이 약자를 괴롭히는 전문용어입니다. “율법이 해이하다”라는 말이 바로 야훼의 율법을 묵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해이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로 믿어야 했던 것이 묵상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의인들은 하나님 말씀의 진리됨을 고투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방법론적 의심을 거쳐서 도달한 진리의 확실성

우리는 의심을 거쳐서 온 확실성, 즉 방법론적인 회의를 거치는 묵상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이 혼탁한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공의를 붙들어야 합니다. 시편 73편 17~20장을 보면 묵상의 한 실황이 소개됩니다. 비록 시냇가에 악인이 심겨져 창창한 것 같아 보일지라도, 의인이 심겨졌다고 믿으며 의인들이 상록수의 숲을 이룰 것을 믿는 것이 간절한 묵상의 예입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우리가 과연 의인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의인이 맺은 열매는 자신만이 누리는 열매가 아닙니다. 의인의 상록수 숲에서 열린 열매는 사회와 이웃이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 되어 열매를 맺으면, 우리의 삶과 설교가 열매가 됩니다. 우리의 삶은 걸어 다니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어 다른 사람이 우리 삶에서 맺혀진 열매를 누리기를 소원해야 합니다(에스겔 47장의 1년 열두 번 결실하는 유실수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시편 1편 6절에 보면 다수의 악인에 비해 단 한 사람으로 표현되었던 의인이 결국에는 회중으로 성장해 있습니다. 의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감미로워 하고 묵상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시고 후견하십니다. 6절 말씀에서 “대저”는 ‘왜냐하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6절의 말씀은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지만(후견하시지만, 돌보시지만) 악인의 길은 결국 망하기 때문입니다”와 같습니다. 결국 6절은 5절에 대한 이유절인 셈입니다.

시편 1편 6절을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가짜가 되어 버립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생각 있는 사람들은 자주 신음하고 있고, 생각 없는(?) 사람들은 항상 즐거운 듯이 보입니다. 이런 현실에 아직까지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초청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말씀과는 정반대로 움직이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뛰어넘어 계시는 하나님을 확고부동하게 믿으면 우리는 의인의 회중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악인-죄인-오만한 자들이 이루는 악의 제국의 위계 조직을 붕괴시키는 데 일조(一助)하는 공세적인 의인이 되고 복 있는 사람이라는 평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형통케 되어 악인의 꾀를 피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악의 강력한 진을 파하는 공세적인 의의 군대가 됩니다. 악은 위계질서로 되어있지만 선은 거룩한 단독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선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입니다. 의인들은 단독자처럼 고독하게 세상을 살아가지만 결국 의인은 회중을 이루게 되고 우리의 신문지상을 가득 채우는 악인은 홀연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공세적인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세계 통치를 증언하는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김회권 본지 발행인,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haekwon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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