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말씀들 22] 예레미야 46~51장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부분은 열방을 향한 말씀들이 차지하고 있다. ‘열방 말씀’은 애굽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해서(46장) 바벨론에 대한 말씀으로 끝맺고 있다(50~51장). 43장과 44장이 애굽으로 내려간 유대 백성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기에, 그들이 안전을 위해 피신한 애굽에 닥쳐올 미래에 대한 말씀이 열방 말씀의 첫머리에 놓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근동의 질서가 바벨론에 의해 재편되고 있으며, 멸망한 유다 역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는 점에서, 열방 말씀의 마지막이면서 가장 많은 분량은 바벨론에 대한 말씀이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열방 말씀의 내용(46~49장)

46장은 애굽을 향한 말씀이다. 특히 2절부터 12절은 여호야김 4년(주전 605년) 근동의 패권을 두고 바벨론과 애굽이 갈그미스에서 격돌하였던 전쟁에 대한 말씀인데, 이 전쟁에서 애굽이 패배하면서 바벨론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확실한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바벨론이 팔레스타인을 장악하게 되던 이 해야말로 예레미야서 내용 전개의 결정적인 기점임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25장, 36장, 45장)(김근주a: 174). 46장의 말씀은 애굽이 바벨론에게 패배한 날을 가리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로 묘사하면서(46:10), 이 전쟁을 주도하신 이가 여호와 하나님임을 분명히 선언한다. 이어지는 13~26절의 말씀은 예루살렘 멸망 후 느부갓네살의 힘이 애굽까지 미쳐 애굽이 바벨론에게 굴복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 역시 여호와께서 애굽을 벌하신 것임을 분명히 한다. 느부갓네살의 애굽 침공과 애굽의 바로를 교체시켜 버릴 것에 대한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적 사실과 들어맞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에스겔의 예언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애굽 땅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넘기리니 그가 그 무리를 잡아가며 물건을 노략하며 빼앗아 갈 것이라 이것이 그 군대의 보상이 되리라(겔 29:19).

아울러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F. Josephus)에 따르면, 예루살렘 멸망 후 5년이 되었을 때에 느부갓네살이 팔레스타인에 재진격해서 모압과 암몬을 무찌르고 애굽까지 침공하여 애굽의 왕을 다른 왕으로 바꾸었으며, 애굽 땅에 있던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 압송하였다고 한다(Antiquities 10:180~182). 아마도 이 사건은 이스마엘에 의한 그다랴의 암살과 바벨론 군인들을 살해한 것에 대한 바벨론의 보복 침공과 연관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현재의 역사 기록에서 느부갓네살의 애굽 침공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또 다른 근동 기록에 따르면 주전 568년경 느부갓네살이 애굽으로 진격하여 전투하였음을 알려 주지만(ANET 308; 밀러∙헤이스: 539), 이 전쟁으로 애굽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기보다는 애굽과 바벨론의 국경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미에룹: 400), 이 진술이 성경이나 요세푸스의 글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고는 할 수 없다.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제한적이기에 예레미야나 에스겔을 통해 선포된 말씀이 실제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성경의 진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비록 역사적인 자료는 현재 없지만,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예언대로 실제로 느부갓네살에 의해 애굽 왕의 교체가 이루어졌으며, 실제적인 자료가 훗날에 발견될 수도 있다고 선언할 수도 있고, 정반대로 성경의 예언은 현실에서는 성취되지 않은 상징적인 선포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레미야의 예언 가운데 북왕국의 회복을 향한 예언에 대해 살펴본 적이 있다. 북왕국 에브라임을 향한 절절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말씀을 보았지만, 실제 역사 안에서 북왕국의 회복은 구체적인 현실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글 가운데 북왕국 부분은 사라지지 않은 채 보존되고 전달되었다. 그것은 그 말씀의 현실이 당장 성취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마침내 그 일을 진정으로 이루실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다루고 있는 본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이방에 대한 이 말씀 덩어리의 다른 내용도 같은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애굽이 실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언제 멸망당했는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애굽의 미래가 전적으로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며, 그들은 국제적인 정치와 전쟁 속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심판으로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과 사건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사건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않으면, 그 사건은 그저 우연한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평범하고 흔한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사건을 제대로 ‘해석’하면, 그 사건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 일어난 구속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해석되지 않으면 홍해도 우연한 일일 뿐이고, 해석되면 매일 먹는 밥도 하나님의 기적적인 베푸심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겪는 엄청난 기적들 자체가 아니라, 그 기적들 이면에 놓인 하나님의 손길과 행하심을 깨닫는 ‘해석’이다. 애굽으로 시작되는 열방을 향한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해석된 선포이다.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해석하는 이들은 세계정세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진행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들은 열방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에 빌붙지 않고, 오직 한 분 하나님 여호와의 법도를 따라 살게 될 것이다.

47장은 블레셋에 임할 재앙을 선포하고 있고, 이 역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임을 선언한다(47:7). 48장은 상당히 많은 분량을 모압에 임할 재앙을 묘사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압을 심판하시는 까닭은 그들의 교만 때문이다: “이는 그가 여호와에 대하여 교만함이라”(48:26);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의 자고와 오만과 자랑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48:29); “모압이 여호와를 거슬러 자만하였으므로”(48:42).

모압이 여호와를 알고 섬기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에서, 모압이 여호와를 거슬러 교만하였다는 진술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이 역시 모압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압이 교만하고 자만하게 된 까닭에 대해 7절은 그들이 그들의 “업적과 보물을 의뢰”한 연고라고 설명한다. 일찍부터 모압이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48:11), 그들은 스스로를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전사”(48:14)라고 자부하였으며, “강한 막대기, 아름다운 지팡이”라고 여겼다(48:17). 또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에 견주어 이스라엘을 조롱하였다(48:27). 이를 보건대 모압의 교만은 자신들의 번성과 풍요로움에 근거하여 열방의 추앙을 받는 이들이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고 그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이스라엘 같은 민족을 조롱하고 업신여긴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으며, 이를 일러 “여호와를 거슬러 자만”한 것으로 선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과 위세, 풍요로움을 믿고 다른 나라들을 업신여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거슬러 자만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 땅에 있는 민족들의 모든 힘과 부조차도 모두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신앙이 있다고 할 수 있다.

49장에는 여러 열방에 대한 말씀이 담겨 있다. 1~6절은 암몬, 7~22절은 에돔, 23~27절은 다메섹, 28~33절은 게달과 하솔, 34~39절은 엘람에 대한 말씀을 각각 다루고 있는데, 한결같이 각 열방에 임할 심판을 선언하고 있으며, 이러한 심판이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을 강조한다. 이 부분에서도 자신들의 재물을 의뢰하거나(49:4) 스스로에 대한 교만(49:16)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원인으로 제시되기도 하다.

바벨론에 대한 말씀(50~51장)

열방을 향한 심판 말씀의 마지막은 바벨론을 향한 말씀이 차지하고 있으며, 열방 말씀 가운데 가장 방대한 분량이어서, 열방 말씀의 초점이요 결론이 바벨론에 대한 말씀임을 짐작할 수 있다.

50장 1절의 표제는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이르신 말씀’이며, 이것은 51장 64절에 있는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그치니라”와 대칭되어 50장과 51장을 한 덩어리로 묶어 주고 있다. 50장 2절은 “바벨론이 함락”될 것을 선언하는데, 이 말씀 역시 51장 64절에 있는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 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라는 말씀과 대칭을 이룬다. 그러므로 50장 첫머리와 51장 끝머리는 처음과 끝을 맺어 주는 기능(inclusio)을 한다. 51장 64절의 마지막 말씀은 적게는 50장과 51장에 있는 바벨론에 관한 말씀의 마지막을 표시하면서, 현재의 자리에서 1장부터 시작된 예레미야의 말 전체의 마지막을 표시하는 말씀으로 역할하기도 한다(박동현: 721). 특히 예레미야서를 시작하는 첫머리의 표제가 ‘예레미야의 말들’이었는데, 51장 64절에도 ‘예레미야의 말들’이 고스란히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51장 64절은 예레미야서 전체의 ‘인클루지오’로 기능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50장과 51장은 전체가 바벨론을 향한 심판 예언이 주를 이루면서, 그 사이사이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의 회복에 대한 말씀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유다에 대한 말씀이 바벨론에 대한 선포 바로 뒤이어 50장 4~5절에 잇달아 나오는 것을 볼 때, 바벨론에 대한 말씀과 유다에 대한 말씀이 서로 단단히 연관되어 있으며, 바벨론을 향한 말씀의 이면에는 결국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다를 멸망시키고 수많은 나라들을 멸망시킨 바벨론은 참으로 강력한 나라다. “요새”와 “성벽”(50:15), “바벨론의 용사”(51:30)같은 군사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표현뿐 아니라, “온 세상의 칭찬받는 성읍”(51:41) 혹은 “온 세상의 망치”(50:23)와 같은 표현 역시 바벨론의 위세와 영광을 잘 드러내 준다. 바벨론이 온 세상의 망치라는 표현은 바벨론을 가리켜 여호와께서 “나의 철퇴 곧 무기”라고 부르는 표현(51:20)과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바벨론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도구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사용하여 나라들을 분쇄하고 말과 기마병을 분쇄하였기에 참으로 바벨론은 “온 세계를 멸망시키는 멸망의 산”(51:25)이라 불릴 만하다. 예레미야서의 말씀은 바벨론의 위세와 강력함이 그들 스스로에게서 나온 자생적인 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가운데 사용하신 하나님의 도구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안목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열방의 강력한 제국들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안목이기도 하다. 북왕국과 남왕국에 큰 위기를 가지고 온 앗수르는 이사야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세내어 온 삭도”(사 7:20)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였다(사 10:5). 고레스의 진격으로 바벨론의 영광이 쇠퇴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레스를 주관하셔서 메시아로 세우고 열방을 정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였다(사 45:1~3). 비록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고레스의 도움으로 포로에서 해방되는 심히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백성에 불과하지만, 이 말씀들은 그 작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말로 그 기세등등한 바벨론과 고레스를 주관하시고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임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다. 이를 보건대 이스라엘이 세계 열방 가운데 가장 강한 나라가 된다고 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위엄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이렇게 망하고 저렇게 포로에서 풀려나는 빈약한 신세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역사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끌어 가심을 확고하게 붙잡고 증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참으로 이스라엘은 약하되, 하나님은 강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작고 미미하되, 그 백성의 하나님은 세상의 강대국들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도구로 사용하시는 강한 분이시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도구이되, 하나님을 거슬러 대적하면 도리어 바벨론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된다. 바벨론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하는 이유는 50장 이전에 다른 열방들을 심판하는 이유와 흡사하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교만을 대적하신다(50:31). 그들의 교만의 뿌리에는 커다란 강으로 둘러싸인 아주 비옥한 지역을 차지하면서 비롯된 그들의 무수한 재물이 있다: “많은 물가에 살면서 재물이 많은 자여 네 재물의 한계 곧 네 끝이 왔도다”(51:13). 자신들의 풍요에 기반해 그들은 금을 부어 우상을 만들었으되(51:17),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모든 우상들을 멸하실 것이다(50:2; 51:18,47,52).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멸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학대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폭행과 내 육체에 대한 학대가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시온 주민이 말할 것이요 내 피 흘린 죄가 갈대아 주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예루살렘이 말하리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복하여 그의 바다를 말리며 그의 샘을 말리리니 바벨론이 돌무더기가 되어서 승냥이의 거처와 혐오의 대상과 탄식거리가 되고 주민이 없으리라(51:35~37).

하나님의 소유된 이들을 노략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냥 두지 않으시며(50:11),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학대받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신다(50:33~34). 바벨론이 하나님의 도구이되, 이에서 지나쳐 이스라엘과 유다를 학대하고 짓밟는 것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점은 애굽의 노예된 이스라엘을 억압한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연상시킨다. 하나님은 부당한 억압과 핍박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흥미롭게도 51장 7절은 바벨론을 가리켜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벨론은 술이 담긴 큰 잔이고 이 술을 마시고 뭇 민족들이 취해서 “미쳤도다”라고 선언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거슬러 교만하고 자신의 재물과 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열방들에 대한 평가를 보여 주고 있다. 46~49장에 언급된 열방은 바벨론이라는 금잔의 술을 마시고 취해서 미쳐 버렸다.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강력하고 번성하고 풍요로운 힘의 술잔을 마시고 온 열방들도 그 힘과 그 재물에 취하였고, 그로 인해 교만해지게 된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힘과 권력, 강력함과 풍요로움에 대한 숭상, 그리고 힘없고 미약한 나라와 민족들에 대한 학대와 억압이야말로 바벨론의 금잔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바벨론의 금잔을 마시는 이들은 취하여 미쳐 버릴 것이다. 오늘 우리 교회는 바벨론의 금잔을 마셔 버린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치시는 방법은 북쪽에서 불러오실 한 나라를 통해서다(50:3, 9, 41~42 51:48). ‘북쪽’은 강력하고 거센 신화적 힘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김근주b: 159). 이들은 북쪽에 기반한 민족으로 여러 나라들이 함께 뭉쳐 바벨론으로 진격하게 될 것인데(50:41), 메대왕들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51:11,28), “아라랏과 민니와 아스그나스 나라”로 불리기도 한다(51:27).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바벨론은 메대로 대표되는 북쪽에서 오는 왕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멸망당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온 세계를 멸하는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원수라”(51:25) “땅이 진동하며 소용돌이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쳐서 그 땅으로 황폐하여 주민이 없게 할 계획이 섰음이라”(51:29). 바벨론은 함락될 것이며(50:2, 15 ,46; 51:8, 31, 41, 44, 58), 그 우상은 파괴되고(50:2; 51:18, 47, 52), 그 땅은 황폐하게 되며(50:3, 12, 13, 23, 39, 40, 45; 51:2, 25, 29, 37, 43), 약탈당하고(50:10), 그 거민들은 죽임당하며(50:27, 30; 51:4, 57), 성읍은 불살라질 것이고(50:32; 51:58),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되리니(50:40), 결국 영영히 황폐할 것이다(51:26, 62). 여호와께서 그 뜻을 정하시면 누가 그 뜻을 거스를 수 있을까. 견고한 성읍도, 강력한 제국도 천지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앞에(51:15~19) 진멸되고 말 것이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그 힘과 권세를 자랑할 것인가.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요, 이스라엘을 그의 소유 지파로 삼으신 하나님이시며, 야곱은 그의 분깃이다(51:19).

시드기야 4년에 바벨론 왕에게 사절단으로 파견된 네리야의 아들 스라야의 손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닥칠 모든 재난 곧 바벨론에 대하여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의 책을 맡긴다(51:60). 스라야는 바벨론의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렀을 때에 예레미야의 지시를 따라 그가 맡긴 책의 모든 내용을 읽은 후 책에 돌을 매어 강 속으로 던진다. 이것은 돌에 묶인 책이 강 깊은 곳에 가라앉아 다시 떠오를 수 없듯이, 바벨론은 몰락하여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임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흥미롭게도 예레미야의 말이 적힌 책의 특별한 운명이 36장과 51장에서 그려지고 있다(Carroll: 855~856). 두 경우 모두 그의 말을 적은 책이 네리야의 아들들에게 맡겨졌고(36:8), 그들이 그 책을 읽었을 때, 한 권은 불태워졌고, 다른 한 권은 강 깊은 곳에 던져졌다. 한 권은 다시 기록되어 남겨지도록 의도되었고, 다른 한 권은 그대로 파기되도록 의도되었다. 유프라테스 강에 가라앉은 책은 가라앉을 바벨론을 상징하며, 다시 일어나지 못할 바벨론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여호야김이 불태운 책은 불태워질 예루살렘 왕궁과 성전을 상징한다(렘 39:8; 52:13).

열방 말씀의 의의

스라야에 의해 바벨론에 대한 심판 말씀이 강 깊은 곳에 던져진다는 것은 열방 말씀의 의의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열방 말씀은 열방을 향해 선포되는 것에 근본적인 의도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열방 말씀의 청중은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을 향해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열방의 온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드러내는 것이 이 말씀의 기본적인 의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열방 말씀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세계정세에서 강력한 열강 제국이 출현한 이후의 선지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열방 말씀의 최초의 형태는 아모스서 1장 3절에서 2장 3절까지의 본문이며, 이러한 내용의 말씀은 이사야(13~23장), 에스겔(25~35장)에서도 볼 수 있다. 열방을 심판하는 주된 근거의 하나가 교만이라는 점(사 13:11; 14:12~14; 16:6; 겔 28:2~6; 29:2~7, 9; 31:10)은 이 말씀들이 열방 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열방 말씀의 또 다른 의의는 하나님께서 열방 가운데서 그 백성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확신의 선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열방을 심판하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가혹하게 대한 것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도 이 점을 잘 보여 주며, 유다의 멸망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에스겔서의 열방 말씀 역시 동일한 특징을 담고 있다(겔 25:3, 6; 25:12; 26:2; 35:12). 그래서 열방 말씀의 군데군데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하는 말씀이 놓여 있다. 애굽의 패배에 관한 말씀에 잇달아 이스라엘의 포로된 자들의 회복 말씀이 놓여 있으며(렘 46:27~28), 바벨론에 대한 심판 말씀의 곳곳에서 유다의 회복과 귀환이 증거되고 있다(렘 50:4~5, 6~8, 20; 51:5~6, 45). 이러한 본문들은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맞물려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회복하실 것이며, 이러한 회복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결합된다.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남왕국 유다만이 아니라 진작 멸망당한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50장 17~20절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모두 흩어진 양으로서의 그들의 현실과 연관하여 풀이하고 있으며, 50장 33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함께 학대를 받는도다”라고 언급하면서 유다의 곤경이 단지 남왕국만의 고초가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의 고초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유다의 회복은 다름 아닌 온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이러한 본문은 예레미야서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이름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유다를 언급한다 하여 남왕국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며, 북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본문들도 단지 북왕국에만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북왕국의 고초는 다름 아닌 남왕국의 고초이기도 하다. 유다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애통해 하는 본문에서 라헬이나 에브라임이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북왕국을 가리키는 특정한 이름들이지만, 남왕국 유다도 거기에 함께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북 이스라엘을 함께 앞날에 대한 전망 속에 포괄하는 것은 이사야나 에스겔 등에게서도 발견된다. 달리 말해 예언자들에게는 남북 이스라엘을 항상 함께 염두에 두는 “온 이스라엘적 관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근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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