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호 커버스토리] 국가폭력 피해자 송경동 시인 인터뷰

▲ ⓒ이종연
도심의 정오,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노동자들이 ‘오늘은 뭘 먹을까’ 고민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틈, 송경동 시인이 등산용 지팡이를 짚고 저 굽은 골목을 돌아오는 게 보였다. 송경동, 작년 한진중공업 사태 때 ‘희망버스’를 기획했던 시인이다. 공장 노동자이기도 했던 그는 노동운동 현장에서 늘 노동자를 위해 싸우고 시를 쓰고, 노동자들과 함께 ‘사람’이 중요하다 외쳐 왔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은 희망버스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고, 농성장에서 발목을 다쳐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하는,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다.

공권력으로 위장해 불법 체포와 불법 채증, 불법 폭행도 서슴지 않는 국가의 폭력이 노동 쟁의 현장에서 어떻게 노동자들의 숨통을 조이는지, 폭력의 실상이 어떻고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저 노동자들은 국가폭력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송경동 시인에게 묻는 것이 왠지 미안했다. 폭력의 흔적들을 되짚어 보는 것이 그에게 아픔일 수도 있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 아픔을 ‘평등하고 조화로운 사회에 대한 꿈꾸기’로 ‘사람에 대한 긍정과 믿음’으로 승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꿈꾸기를 멈추지 않고 사는 시인 송경동을 5월 30일, 서울 정동에서 만났다.

국가폭력을 얘기하자니 신체적 폭력을 당한 직접적인 피해자로서 아직도 치료를 받고 있는 송 시인에 관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기륭전자 농성장에서 발목을 크게 다쳤고, 평택 대추리에서 벽돌로 머리를 가격당하기도 하셨는데요.

2010년 10월, 기륭전자 농성1) 중 포클레인에서 떨어져 두 달간 병원 생활을 했어요. 퇴원하고 6개월을 요양하다가 간신히 목발을 짚을 때쯤 희망버스를 기획했는데, 그 일로 체포 영장이 발부돼 수배 생활을 하면서 치료를 더 못 했어요.2) 감옥에 다녀오고 나서 재수술하면서 박혀 있던 금속핀 14개를 제거했어요. 의사 말로는 약간의 장애가 남을 거라고 해요. 어느 정도일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아요.

대추리3)에서는, 2006년이던가요. 평택 대추초등학교에 700명 정도 남아 있었는데, 전경 1만 5000명이 몰려 왔어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초등학교 안으로 밀려들어 갔고, 어느 순간 저는 옥상까지 올라갔어요. “방패로 곤봉으로 치지 마라, 사람 죽는다”고 악을 쓰는데, 어느 순간 머리가 띵하며 힘이 쭉 빠졌어요. 반대편에서 전경들이 벽돌을 던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맞은 거예요. 그러고는 병원에 실려 갔다가 치료하고 다시 대추리로 들어갔죠.

몸의 상처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 공포, 트라우마 그런 것들로 힘들지 않을까 우려가 되네요. 그러면서도 늘 현장에 계시는데, 폭행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는 않나요?

두렵습니다. 무법천지인 현장에서 막무가내로 진압당하다 보면 저를 포함해 누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 과정에서 사람도 많이 죽지 않았나요. 2004년 여의도에서 농민 집회할 때 대낮에 전경들이 농민들을 토끼몰이식으로 진압해 2명이 죽었습니다. 2006년에는 포항 형산강로터리에서 집회를 하던 건설 일용 노동자 하중근 씨가 뒷머리 세 군데가 열리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양팔에 피멍이 든 채 의문사를 당했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부슬부슬 오던 날이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공권력 타살을 인정했지만 아직 의문사로 남아 있습니다. 경찰의 폭력 이상으로 무서운 게 사재 용역이에요. 거의 폭력 기계들이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현장에서 린치를 가하면 정말 두려워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요. 익히 기억하듯이 용산에서 철거민들이 너무 절박해 망루에 올랐는데 하루도 안 돼 경찰 특공대를 진입시켜서 6명이 희생됐잖아요. 어디서든 그런 가능성이 열려 있어요. 그런 점에서 두렵기도 하죠.

작년에 제1회 구본주예술상4)을 받으셨죠. ‘희망버스’ 기획으로 사회적 연대를 이끌어 내, ‘노동과 자본의 경계를 매개하는 소통의 예술가’로 평가받으셨는데요. 그래서인지 희망버스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2차 희망버스를 탔는데 밤을 새우고 다음 날 봉래삼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을 그리는 풍경 너머로 차벽을 세우고 서 있는 새까만 전경들이 극한 대비를 이룬 모습을 보기도 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안타깝죠. 평화로운 행진을 막고 불법화하고 탄압합니다. 그렇지만 경찰이 물리력으로 막을수록, 참가한 분들이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고 건강한 공동체의 문화를 만들고자 많이 노력해 주셨어요. 절망적인 순간도 있었지만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지금 말씀하신 내용도 그렇지만, 평소 송 시인의 시나 산문을 보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특히 ‘인간에 대한 긍정’이 무척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본에 사로잡히고 포섭된 이들이나 폭력적인 권력에 무조건 복종하는 이들이 모두 같은 사람임을 생각하면, 인간됨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인류 역사 속의 그 모든 것이 한 개인, 한 개인에게 들어 있다고 봐요. 비과학적인 얘기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악하고 인성이 파괴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 안에는 본인이 찾지 못한 인간애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은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수많은 사람의 힘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잖아요. 누구에게나 그런 인간애가 있다는 건 중요하다고 봐요. 현실이 아무리 왜곡돼 있더라도 말이에요. 그리고 그걸 안 믿으면 무엇을 믿을까 싶기도 하고…. 우리 전에도 많은 사람이 살았고,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서 자기 시대를 살아갈 겁니다. 저는 어쩌다 보니 이런 시대에 태어난 거고요. 좀 더 불행한 시대도 있고, 좀 더 행복한 시대도 있어요. 그 속에는 한 개인이 넘을 수 없는 시대의 벽이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개인을 미워하는 편이 아니에요. 사람은 자신이 처해 있는 조건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어요. 개인을 책망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에요. 누구나 한계가 있는 거예요. 구조나 당대의 역사적 한계를 고려하면서 개인을 얘기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요. 또 그 한계를 넘어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삶의 진실을 찾고자 하지 않을까요.

그 한계 중 하나가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대중의 무관심은 아닐까요. 노조의 투쟁이 장기화하는 데는 사측의 무시와 무성의한 태도 등이 크게 작용하고, 거기에 대중의 무관심이 더해지면, 그에 편승해서 자본과 국가가 무력(폭력)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수순을 밟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국가폭력은 자본의 폭력을 넘어 (대중의) 무관심이 낳은 폭력이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그럴 수 있어요. 나의 무관심이 어떤 측면에서든 어떤 사람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눈감아 주는 역할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눈앞에서 폭력이 버젓이 자행되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에 체념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보통은 ‘나는 정치적인 게 싫다’고 하는데, 그런 얘기조차 정치적일 수밖에 없죠. 그런 사람들조차 뭔가 느끼고는 있을 것 같아요. 나의 무관심이 어떤 정치적 자리에 서 있는 것인지 고민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 2차 희망버스 때의 시민들(위)과 경찰의 모습(아래) ⓒ김은석

그간 목격하고 당했던 국가폭력 중, 가장 비난받아 마땅한 폭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용산이죠. 경찰 특공대의 ‘테러 진압 작전’에 시민 5명과 경찰 1명이 희생됐잖아요. 용산 사건은 ‘작은 광주’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잔인했어요. 용산 재개발 지역은 5조 원의 개발 이익이 떨어지는 곳이었어요. 건설 자본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공사를 하고 싶었겠죠. 그럴 때 분쟁이 있다면 어떻게 평화적으로 해결할지 모색하는 게 최소한 국가가 할 역할이잖아요. 사장이나 대주주 몇 명은 이익을 챙기지만 나머지 다수는 피해를 보는 절대적 약자예요. 그러니 약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줘야 하는데, 국가는 완전히 자본의 편에 섰어요. 평범한 국민을 하루 만에 테러범 잡듯이 잡아 죽였어요. 마음이 그토록 상해 있는 사람들에게 특공대를 투입해서 폭력을 자행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거기가 정말 심했어요.

또 지금도 진행 중인 쌍용자동차 문제5)는 구조적 폭력이 극심하게 가해지고 있어요. 그 폭력에 의해서 근 3년 걸쳐 22명이…. 가공할 폭력이에요. 구조적 폭력이라는 건, 쌍용자동차가 상하이자동차로 넘어갈 때, 산업은행을 통해서 운영권을 국가가 갖고 있었거든요. 상하이자동차는 먹튀 기업이어서 핵심 기술만 빼서 튀었잖아요. 그때 국가는 아무런 조치도 안 했어요. 이후 법정 관리에 들어갔을 때도 쌍용자동차는 여전히 국가 소유였는데 안정적으로 운영할 생각은 하지 않고 대규모 정리 해고를 단행했어요. 이런 게 바로 구조적 폭력이죠.

국가의 직접적 책임을 넘어서 사회구조적 폭력도 있어요. 지난 십수 년간 우리 사회는 수많은 노동자를 정리 해고하고, 비정규직 노동자 900만 명을 양산했어요. 게다가 쌍용자동차 출신이라고 하면 어디서도 취업이 안 돼요. 또 정규직으로 일하다가 해고당하고 비정규직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 심리적 박탈감은 엄청난 거예요. 이런 구조적 모순 앞에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죠. 22명의 사망자가 자살이나 스트레스성 죽음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사실 우리 사회가 이분들을 죽인 거예요. 정리 해고시키고 경찰 동원해서 때려잡고 사회에 나갔더니 비정규직밖에 없고…. 직접적인 폭력보다 이렇게 일상적인 구조적 폭력이 더 무서워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것만 봐도 결국 구조적 학살임을 알 수 있잖아요. 안정되고 평화롭게 살 수 없는 사회에 절망해서 죽는 거니까요.

국가폭력은 물리적 폭력이나 구조적 폭력 등 양태가 다양한데,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폭력의 양태는 무엇이라고 보세요?

구조적 폭력이죠. 직접적 폭력은 많은 사람이 동시에 당하지는 않지만, 구조적 폭력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힘들게 합니다. 저는 인류 사회의 가장 큰 구조적 폭력은 자본주의 체제라고 생각해요. 수많은 사람의 노동, 자원을 1%도 안 되는 개인이 독점해 버리니까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빈곤과 미래에 대한 불안,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그게 가장 큰 폭력이죠.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국가폭력에 맞서는 한국의 저항운동에 관해 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요. “국가권력의 폭압에 대해 저항 세력은 쇠 파이프를 드는 대신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저항 세력의 폭력은 분노에서 나오는데 저항 폭력이 권력에 의해 길든 한국 사회에서는 그 폭력의 방향이 ‘적’보다는 ‘자신’을 향하곤 했다.” 안타까운 내용인데요. ‘저항 폭력’에는 어떤 입장이신가요.

그건 폭력이 아니죠. 말 그대로 저항이고, 최소한의 인간다움과 자기 권리를 지키려는 안간힘이라고 봐야겠죠. 거기에 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폭력에 저항하는 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어요. 어떤 인간이든 밟으면 꿈틀하잖아요. 그걸 폭력이라고 얘기하면 안 된다고 봐요. 노예사회에서 노예들이 봉기했던 역사가 있는데, 그걸 (저항) ‘폭력’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렇게 단순 비교를 할 수 없죠. 그건 안간힘이에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 때 경찰이 컨테이너를 쌓았고, 시민이 이를 명박산성이라 부르며 그 앞에 스티로폼을 쌓은 일이 있지요. 그때 한편에서는 ‘비폭력’과 ‘쌓지 마’를 외치면서 새벽 늦게까지 ‘비폭력’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그때는 너무했죠. 당시 사람들이 그 벽이라도 넘어 보자, 그 정도라도 하자고 한 거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비폭력’ 논의가 된다면 그건 역사의식에 관한 고민이 덜한 것 아닌가 싶어요. 폭력, 비폭력 논의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봐요. 작년에 아랍 국가에서 민주화운동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나라별로 수천 명이 죽기도 했어요. 그런 강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할 때도 있어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잖아요. 원하지 않지만 사회적 갈등에서 피치 못하게 누군가 희생과 헌신을 해야 하는 역사가 있기도 한 거예요. 그게 참다운 자신, 참다운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희생과 헌신이라고 말할 것도 없어요. 그렇게 역사적 삶을 사는 거죠. 역사적 삶을 산다는 건 수많은 질문을 내포하고 있어요. 인간은 무엇인가, 사회적 불의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그런 질문 말이에요. 그러니 단선적으로 어떤 상황에 대해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건 쉽지 않아요. 우선은 어떤 상황에서 시대적 요구가 생겨나는지를 봐야 하지 않을까요.

▲ ⓒ이종연
이명박 정부가 ‘법치’ 운운합니다만, 그 경계를 넘는 폭력 행위가 다반사입니다. 혹 노동운동과 관련해서 어떤 경우에 국가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국가의 행위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 일쑤예요. 그런데 사실 그런 공권력 행사의 내용은 오히려 반공공적일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노동 현장에 분규가 있을 때 국가가 한 번도 사측을 때려잡아 본 적이 없어요. 늘 노동자가 잡혀가고 끌려가요. 그런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는 어렵죠. 공권력이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자행하지만 역사의 법정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늘 재평가되기 마련이에요. 광주 5·18 때 공권력을 투입했던 전두환을 국가내란 수괴로 바로잡기도 하잖아요. 이처럼 공권력이라고 해서 늘 정당하다고 생각해선 안 돼요. 정말로 공공적인 성격을 가졌는지가 평가 기준이 되어야죠.

그 공공성이 언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국가 공권력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일부에서는 국가 공권력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도 해요. 이건 본질적인 문제인데요. 우리나라는 헌법에 기초를 둔 자유 민주주의 국가잖아요. 그건 사유재산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과도한 부를 개인이 독점하는 것을 용인한단 말이죠. 그런데 저는 사회적 자본은 개인이 과도하게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봐요. 사회적 부 중에는 자연에서 빌려 온 자원도 있어요. 그것과 수많은 인간의 노동력이 결합함으로써 사회적 부가 창출되는 것인데, 그걸 특정 개인이 소유할 수 있나요? 타인의 노동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나요? 자본주의사회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와 체계를 지키기 위한 형태로 조직돼 있어요. 그러니 국가는 본질적으로 가진 자들의 편에 설 수밖에 없죠. 즉 국가 공권력이 철저히 자본의 이해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만인에게 폭력이 아닌가 하는 얘기까지 나오는 거죠. 본질적으로 이런 지점에 관하여 사회적 고민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실제로 국가폭력의 정당화 및 심화가 자본주의의 심화와 맞물려 있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는데요, 최근 <오마이뉴스> 좌담에서 쌍용자동차 문제의 실질적 해결을 ‘공장의 사회화’라고 주장하신 것도 같은 맥락인 거죠?

그렇죠.

대화를 나누다 보니 노동운동 과제가 한둘이 아니네요. 대중성 확보를 비롯해 노동운동이 정치운동으로도 이어져야 하고, 최근 대선 이슈로 떠오른 경제 민주화에 관해서도 점검이 필요할 듯합니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게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꿈이 커지면 좋겠어요. 사람들의 꿈이 너무 작아졌어요. 노동운동의 기본을 구호로 표현하자면 자본·소유로부터의 노동 해방, 존엄한 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해지는 인간 해방 같은 것들이었어요. 그런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그 안에서 각각의 사업이나 운동이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자꾸 꿈을 잃고 체제 내화돼 버리는 모습을 봅니다. 그건 모두의 삶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지요.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초등학생들에게 ‘불의에 저항하라, 약자와 연대하라’고 가르칩니다. 폭력이 나에게 가해지든 혹은 타인에게 가해지든, 또 공동체 전체에 자행되는 이데올로기적 폭력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런 것에 당연히 저항해야 해요. 그리고 좀 더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을 당당하게 요구해야 하고요. 실천적 연대를 통해 조화로운 사회 운영 원리를 만들기 위한 모색과 실천도 필요할 듯해요.

손석춘 교수도 노동대학 강의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학습”이라는 얘기를 했죠. 이념적으로 ‘승리’하고 난 다음의 세상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이들이 없다는 지적이기도 했는데요.

저는 희망버스 같은 실천적 공간이 사회적 학습 공간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우선 거리에서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만남을 이뤄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어요. 사실 저 스스로 공부가 더 필요해요.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상 무지가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죠. 기생적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려면 우매한 대중이 가장 먼저 필요하거든요. 생각하는 기능을 잃어버린 멍청하고 일만 하는 기계가 필요할 뿐 역사적 의식을 대중이 갖추는 걸 자본주의 체제는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회가 바보를 만드는 체제라고 말하는 거죠. 자아를 찾고 공동체를 이루는 개인으로 거듭나는 길이 막혀 있거든요. 이 길을 뚫기 위해 역사의 진실, 사회의 진실을 찾으려는 부단한 노력과 학습이 필요합니다.

바쁘신 중에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쳐야 할 시간인데요, 기획 중인 행사나 주요한 일정이 있다면 나눠 주세요.

작년 희망버스 참가자 중 130명이 기소되어 벌금 폭탄을 맞고 있거든요. 이런 사법 탄압에 맞서 기소된 사람을 지원하기 위해 공동기금을 마련하는 일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건 좀 널리 알려 주세요. 쌍용자동차에서 22명의 사회적 죽음이 있었는데 이에 연대하고자 6월 16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여의도공원에서 시청까지 걷기대회를 해요. 저녁에는 난장이 있고요. 분향소를 하룻밤 동안 지키자는 건데요. 주변에 알려서 많이 좀 와 주세요. 밑도 끝도 없이 1만 명이 오리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 인터뷰를 하고 대한문 앞 쌍용차 분양소를 향하는 송경동 시인 ⓒ이종연

바쁜 틈에 잡힌 인터뷰를 끝내고 다시 일하러 가려다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로 향하던 그 고운 마음을 기억하며, 6월 16일 토요일 오후, ‘함께 걷자, 함께 살자, 함께 웃자’ 행사에 갔다. 희망과 연대를 위해 모인 시민들이었건만, 여의도에서 대한문까지 평화로운 행진을 이어가던 시민들이었건만, 그날 역시 경찰은 마포대교 입구에서 차벽을 세우고 시민들을 막았다. 돌멩이 하나 들지 않았던 4명의 시민이 연행됐고, 참가자들은 지하철을 이용해 가며 대한문까지의 행진을 마쳤다. 언제쯤 국가 공권력은 시민의 시위를 ‘보호’해 줄까. 언제쯤 시위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각주-
1) 기륭전자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서울 금천구 기륭전자 구사옥 앞 컨테이너에서 2005년부터 6년간 농성했다. 한 달에 64만 1850원을 받고 일하던 그들은 대부분 파견 근로자였고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문자를 받으면 그게 해고였다. 김소연 지회장은 농성하며 94일간 단식하기도 했다. 기륭전자 사태는 비정규직 문제의 절정판이었다. 2010년 10월, 농성장을 강제 진압하기 위해 회사가 포클레인으로 밀고 들어왔을 때 송경동 시인은 포클레인에 올라가 투쟁하던 중 아래로 떨어져 발뒤꿈치뼈가 으스러져 큰 수술을 받았다. 2010년 11월 1일, 1895일간의 최장기 투쟁을 끝으로 조합원 전원 10명(노조를 설립할 당시 200명이던 조합원이 6년 동안 10명으로 줄었다)이 정규직으로 복직했다.

2) 2011년 11월 15일 송경동 시인은 기자회견을 하고 부산영도경찰서에 자진 출두했다. 그러자 검찰이 바로 구속영장을 청구해 구치소 생활을 하다가 12월에 구속 기소됐다. 송 시인은 올해 2월 보석으로 풀려났고 재판이 진행 중이다.

3) 평택 대추리는 2004년 용산 미군기지 확장 이전지로 확정되면서 주민이 강제 추방당한 곳이다. 노무현 정부는 대치가 가장 격렬했던 2006년 5월 4일, 수천 명의 사설 용역과 군대를 동원 1만 5,000명의 공권력으로 524명을 강제 연행했고, 그 과정에서 300여 명이 부상했다. 935일간 1,000여 명이 연행됐고 특히 김지태 이장 구속 때는 국제엠네스티까지 나서 ‘양심수석방운동’을 하기도 했다. 송 시인은 그해 3월에도 강제 집행에 맞서 문화 예술인들과 항의하다가 폭행을 당했다. 송 시인의 목에 감겨 있던 펼침막을 경찰들이 양쪽에서 잡아당긴 것이다. 주위에서 ‘목 졸려 죽는다’고 항의했지만 막무가내로 “저 새끼들 연행해”라는 폭언을 들었고, 의식을 잃을 뻔했다. 대추리 사건은 2007년 4월 주민 전원이 이주함으로써 강제 퇴거가 마무리됐다.

4) 미술가 구본주는 자본주의사회의 계급성을 주요 모티프로 삼아 작업하던 젊은 예술가였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그의 작품 ‘갑오농민전쟁’ 동상은 평택 대추리 대추초등학교에 전시되기도 했다. 구본주예술상은 그의 예술정신을 잇고, 세대 간 소통과 공감을 확장하며, 자유·평등·노동·평화·인권·생명 등의 가치를 옹호하는 예술을 활성화하기 위해 2011년 제정됐다.

5) 쌍용자동차는 재정 악화로 2005년 상하이차에 매각됐다. 매각 초기부터 핵심 기술만 빼 가는 이른바 ‘먹튀 논란’이 일었던 상하이차는 4년간 쌍용자동차에 전혀 투자하지 않았고, 후에 핵심 기술과 핵심 인력을 중국으로 빼돌린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상하이차는 판매 부진과 경기 악화 등으로 2009년 1월 법정 관리를 신청했다. 이후 7000명 노동자 중 2600여 명의 정리 해고를 단행, 1500명은 희망 퇴직했고 1000명의 노조원은 5월부터 77일간 평택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농성 진압을 위해 경찰이 대테러 장비인 테이저건과 고농도 최루액, 진압용 총기 등을 사용해 부상자가 속출했고, 사측이 수시로 단수·단전하고 식료품과 의료진 출입마저 막는 등 인권 침해도 극심했다. 이 사건으로 64명이 구속됐고, 지금까지 22명의 노동자 및 노동자의 가족이 목숨을 잃어 ‘정리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2010년 11월 인도의 마힌드라가 인수 합병 계약을 했지만,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진행 및 정리 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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