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호 커버스토리]

대놓고 하는 이야기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래 사람들의 삶은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일자리에서부터 대학생 등록금 문제, 서민 가계 부채는 물론이려니와 웬만한 중산층까지 빚을 지지 않고서는 전셋집조차 구하기 어렵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과거에 국가폭력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드러났다면, 지금은 국가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비롯한다. 그 가운데 국가가 개입한 개발을 둘러싼 갈등과 폭력은 심각한 수준에 다다랐다.

2000년대 들어 서울을 중심으로 집과 땅을 둘러싼 사건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용산4가 철거민들의 죽음, 청계천 복원 공사를 둘러싼 상인들과 노점상들의 희생, 강남구 ‘타워팰리스 앞’ 포이동 재건마을 등의 사례는 국가가 도시 빈민의 삶을 어떻게 유린해 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 강남구 포이동 ⓒ최인기

점유권 주겠다던 약속, 무단 점유 과태료로 돌아와

강남구 개포동 1266번지(현 포이동 266번지), 포이동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198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은 노숙인, 전쟁고아, 넝마주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자활근로대를 조직하고 이들 중 일부를 전기는 물론 수도조차 없던 양재천변 포이동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점유권을 주겠다’는 정부의 약속이었다. 포이동 주민들은 이를 철석같이 믿고 폐품과 재활용품 수집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하지만 1988년 자활근로대 해체와 더불어 정부는 주민들의 주소지를 박탈했다. 도리어 시유지를 무단 점거했다며 2006년 기준으로 한 가구당 5000만 원에서 1억 8000만 원씩 총 25억 원가량의 토지 변상금을 부과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1년 6월 12일 96가구 중 74가구가 전소하는 큰 화재가 발생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사실상 포이동의 전 주민이 집을 잃었다. 참사가 발생하기 전 주민들은 그곳이 대부분 판잣집이기에 화재 위험이 많다며 서울시와 강남구청에 환경 개선을 계속해서 요구했다. 이들의 주장에 조금이나마 귀를 기울였다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으나 방치한 탓에 대형 인재로 이어진 것이다.

포이동 주민 82가구 170명에 대한 대책 마련 요구가 높아지자 지난 4월 서울시는 공영 개발 계획안을 담은 재건 마을 정비 방안을 발표했다. “100% 국민 임대주택에 재정착시키고, 공사 기간 동안 주민들은 SH공사가 제공하는 빈 임대주택에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내용이다. 새삼스러울 게 없는 과거에 이미 제시한 대책이었다. 강남구청이 1990년부터 부과하고 있는 총 25억 원이라는 ‘토지 변상금’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82가구 중 17가구가 기초 생활 수급 대상이고 나머지 주민도 폐품 수집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생계는 화재 이후에 더욱 막막해졌다. 강남구 주변 시세를 기준으로 한 현재의 국민 임대주택 임대료는 이들이 감당할 수 없다. 포이동 문제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현재 진행형이다.

▲ 청계천변 상가들 ⓒ최인기

화려한 청계천, 파괴된 공동체

2002년 8월 23일 오후 3시 20분경 서울 중구 청계3가에서 장사하던 노점상 박봉규 씨(남, 당시 63세)가 서울시 중구청 청장실에서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했다. 박 씨는 1남 4녀의 자식을 둔 가장으로 청계3가에서 공구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이명박 서울시장 앞으로 “서민을 돕겠다던 공약을 왜 지키지 않는가?”라는 항의 서한을 보낸 후 분신하여 전신의 80%에 3도 화상을 입고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다 2002년 9월 6일 끝내 생을 달리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서울을 동북아의 중심 도시로 청계천변을 국제적인 상업 도시와 금융 거점 도시로 개발한다’는 목표로 청계천 복원 공사를 추진했다. 그리고 서울시 전역에 뉴타운 사업을 벌이며 건설 경기의 활성화를 꾀했다. 서울시장은 임기 내에 청계천 복원을 마무리하겠다며 2003년 11월 청계천변의 노점상을 상대로 수천 명의 공권력과 용역반을 동원해 행정대집행을 실시, 노점상을 쫓아내거나 구속했다. 2003년 11월 이후 몇 개월 동안 노점상들의 저항으로 여론이 나빠지자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터에 임시 이주 단지를 마련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약 3년 동안 노점상을 방치했고,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주한 노점상이 제대로 장사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일반 상인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겠다던 약속도 허구에 불과했다. 서울시는 ‘2009년 완공 목표로 송파구 문정동에 지하 5층, 지상 11층 높이의 건물 3개 동과 전체 면적이 82만 300㎡로 코엑스의 6.2배, 롯데월드의 1.4배에 이르는 대규모 동남권 유통단지인 ‘가든파이브’를 지어 청계천의 점포를 이전하겠다‘, ’6~7평 기준 약 6000만 원에서 1억 원 정도면 신용 불량자라 할지라도 입점할 수 있게 하겠다‘고 선전했다. 시의 말대로였다면 2004년도 당시 6150명가량이 새로운 상권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 공사가 추진되는 동안 상권은 반 토막이 났고 장사로 생계를 영위하던 많은 사람이 가게 문을 닫고 다른 호구지책을 찾아 나서야 했다.

서울시는 2007년 12월 계약 특수 조건이라는 것을 갑자기 들고 나와 상인들을 압박했다. ‘이중 영업을 금지한다. 계약일로부터 전매 제한 기간을 두도록 한다. 이를 어겼을 경우 단속한다’ 등의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2008년으로 접어들자 입점할 수 있는 상인은 4718명으로 줄었다. 그래도 청계천의 상인들은 ‘가든파이브에 입주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완공 날짜만 손꼽아 기다렸다. 마침내 2009년이 되었으나 1350명 정도만이 계약을 마쳤을 뿐이다. 1억 5000만 원에서 8억 8000만 원을 넘어서는 분양가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6000만 원에서 1억 원 정도면 누구든 심지어 신용불량자 역시 입점이 가능하다던 약속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당시 서울시장 이명박 씨는 언론을 통해 청계천변의 이해 당사자와 대화함으로써 합의를 끌어냈으며 짧은 시간 안에 청계천 복원 공사 성공이라는 신화를 일구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장사하던 5000여 명의 상인과 노점상 중 2000여 명은 뿔뿔이 흩어지고, 삼일아파트에서 살던 저소득 도시 빈민들은 생계 터전을 잃어버리고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청계천의 겉모습은 화려해 보이지만 공동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삶의 자리 대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건물과 이윤에만 혈안인 자본의 논리가 판치는 곳으로 뒤바뀐 것이다.

▲ 용산구 재개발 4구역 ⓒ최인기

인권유린 하는 국가권력

2009년 1월 19일 용산 재개발 4구역 주민과 전국철거민연합 소속 철거민 30여 명은 남일당 5층 건물에서 ‘생존권 수호’를 외치며 저항했다. 정부와 건설사의 막무가내식 철거와 생존권 말살 정책이 아닌 책임 있는 이주 대책을 세워달라고 수차례 요구하다 망루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불과 하루만인 2009년 1월 20일 새벽 5시 30분, 해가 떠오를 무렵 살인적인 진압 작전에 돌입했다. 철거민 30여 명을 연행하고자 무려 1200명의 경찰과 ‘특공대’가 투입됐다. 용역 깡패와 합동으로 크레인과 컨테이너를 이용해 물대포와 쇠 파이프를 앞세워 무차별적인 폭력 진압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불길이 치솟아 건물 안에 갇혀 있던 철거민들은 순식간에 검은 연기에 휩싸여 참사를 당하고 말았다.

사건 발생 이틀 만인 22일 검찰은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의 사망을 부른 화재 원인이 망루 농성자들이 던진 ‘화염병’ 때문이라고 방송과 언론에 발표했다. 검찰은 철거민들은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 등의 혐의로 기소하고, 화재로 6명의 죽음을 야기한 경찰의 강제 진압은 적법한 공무 집행이라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생존권을 달라던 철거민들은 도심 테러범으로 몰린 반면 폭력적인 강제 진압으로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공권력의 책임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검찰은 이후에도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의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왜곡했다. 국민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1만 쪽에 달하는 사건 기록 중 약 3000쪽을 공개하지 않은 채 재판을 진행했다는 사실이었다. 살아 돌아온 철거민들은 대법원에서마저 4~5년의 중형이 확정돼 지금껏 구속되어 있다.

모든 재판이 끝난 후에야 용산 참사 관련 피고인들이 “검찰의 수사 기록 공개 거부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소했다. 이처럼 위헌·위법성이 확실했음에도 재판부는 편향적인 정치 재판을 진행했다. 국가가 철저히 용산 철거민들의 인권을 유린한 것이다.

▲ ⓒ최인기

이름뿐인 생존권보호제도

마지막으로 도시 공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국가폭력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제도적인 방법을 살펴보자. 용산 참사는 사회에 많은 문제를 던지고 있다. 현행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은 재개발 및 정비 사업으로 생계의 터전을 잃은 상가세입자의 보상 문제, 특히 영업 권리금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 이러한 현실은 홍대 앞 두리반, 명동 상가세입자, 북아현동 뉴타운 철거민 문제로 계속 이어졌다. 우리 사회는 용산 참사 같은 대형 화약고를 곳곳에 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재개발의 경우 상가세입자에게 영업 보상 4개월과 시설 투자에 대한 보상의 의무가 있지만 재건축일 경우엔 보상의 의무가 전혀 없다. 이 밖에도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제10조는 ‘상가세입자는 5년간 영업권을 보장받는다’고 하지만 사실상 상가세입자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재개발, 재건축일 경우엔 예외’라는 단서 조항을 달아 5년의 영업권조차 박탈하고 있는 실정이다.

철거를 강행하면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경비 용역들과 이들을 고용하는 데 적용되는 경비업법과 행정대집행법도 살펴보아야 한다. 1990년대 ‘전국철거민연합’의 박순덕, 민병일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철거민이 재개발 지역에서 희생됐으며, 노점상 이덕인 열사를 비롯하여 2007년 경기도 고양시 이근재 열사 등은 경비 용역에 의해 희생됐다. 작년 8월 12일 새벽에는 서울 강남구 포이동에 마스크를 쓴 용역반원 200여 명이 해머를 든 채 기습 철거를 감행하는 일도 벌어졌다. 포이동 주거복구공대위에 따르면 1차로 주거를 복구한 할머니, 할아버지 숙소 3채가 모두 부서졌다. 2차 주거 복구에 돌입해 새로 지은 집 3채 또한 반파된 적이 있다고 한다. 노점상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2009년 말부터 2010년 초까지 신촌·홍대 지역의 노점상들은 용역반원들의 만행에 시달렸다. 2010년 2월 20일 신촌 그랜드마트와 한국전력 앞 포장마차로 마포구청 직원과 용역반원 200여 명이 지게차를 앞세워 포장마차 15대를 철거하고 파손한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의 강제 노점 단속은 불법투성이였다. 행정대집행 전 적법한 계고를 해야 함에도 사전 통보 없이 일방적으로 단속했다. 포장마차만이 아니라 심지어 그날 팔던 개인 물품과 수입까지 모조리 쓸어가 버렸다.

용역반원의 폭력을 막기 위한 현행법상의 처벌 조항은 너무 미약하다. 경비 용역의 자격과 권한 제한에 관한 정확한 법률 적용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경비업법에 따르면 경비 용역 업체가 경비원을 교사하여 경비 업무의 범위를 벗어난 폭행, 협박, 상해를 한 경우 경비원은 1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뿐이다. 단지 그 교사자인 경비 용역 업체의 대표를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경비 용역 업체의 불법 행위로 인한 인권 침해가 빈발하는 상황을 보건대 터무니없이 약한 법 규정이 아닐 수 없다. 참여연대 행정개혁센터가 2010년 10월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경비용역 및 안전시스템 구축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에스원’에는 과거 분당경찰서장을 비롯한 수많은 경찰 직원이 고문과 감사 등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은 이들의 자금이 정치권의 로비 자금으로 사용된다는 설과 경찰과 군부의 고위 관료들이 퇴직 후 경비 용역 업체의 실질적 막후 사장으로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에 신빙성을 더한다.

따라서 위 경비업법의 벌칙 규정은 대폭 강화되어야 마땅하다. 조합과 경비 용역 업체와의 계약의 내용과 범위, 시기 등을 엄격히 제한하는 규정도 병행되어야 한다. 악명 높은 경비 용역 업체와 개인에 대해서는 집중 관리·감독하고 업체 등록을 취소하는 등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또 이들을 충실히 관리·감독해도 모자랄 판에 사실상 수수방관하고 있는 관할 행정 관청과 경찰청에 대한 국정조사도 추진해야 한다.

서울의 포이동과 청계천 그리고 용산은 국가 권력이 도시 빈민의 삶과 생존권을 어떻게 유린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경제적 가치를 우선함으로써 집과 거리는 치열한 경쟁의 장으로 바뀌었고, 장소의 역사성과 공간적 특성은 무시되거나 외면당한 채 일반 서민은 과거를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약 10년 사이에 변해 버린 모습을 지켜보면서 서울을 비롯한 도시를 이윤 확보를 위한 공간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2000년대 대표적인 도시 빈민의 저항으로 자리매김한 포이동, 용산, 청계천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에도 청계천 주변의 재개발을 둘러싸고 철거민들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고, 동대문디자인파크 완공을 앞두고 노점상을 비롯한 도시 빈민들의 크고 작은 항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막개발주의와 국가폭력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소리 없는 전쟁은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는 또 다른 길이며 이 싸움은 정당하다. 힘겨운 싸움이 하나둘 쌓여 미래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최인기 님은 청계천과 동대문운동장 근처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1987년부터 보석 세공 공장에서 일했다. 20년 넘게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 특히 노점상과 철거민들이 처한 한국사회 현실을 삶으로 부대끼며 투쟁했다. 1999년부터 2009년까지 '전국빈민연합' 사무처장으로 일했고 지금은 빈민해방실천연대에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난의 시대>(동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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