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호 커버스토리]

▲ 정보공개센터의 '탈바꿈(탈핵으로 바꾸는 꿈) 프로젝트' 일환으로 국내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을 인포그래픽 작업한 이미지. (인포그래픽: 장병인)

‘군사적 핵’과 ‘평화적 핵’의 차이?
우리는 잊는다. 체르노빌도, 후쿠시마도. ‘죽음의 재’와 가까이 살아가면서도 망각의 은총으로 우리네 일상을 지켜낸다. 그러는 사이 후쿠시마 사고 3주기가 되었고, 일본의 아베 총리는 핵발전소 재가동을 선언했다. 우리나라도 이미 핵발전소를 증설하고 있다.

“군사적 핵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던 것이지만, 평화적 핵은 집집마다 있는 전구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군사적 핵과 평화적 핵이 쌍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범자라는 사실을….”(《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인류가 통제할 수 없는 핵에 대한 경고이자 세계적 재앙인 1986년 체르노빌 원전폭발사고. 그 재앙의 증인이자 기자로서 10년 넘게 체르노빌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기록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독백인터뷰에 남긴 글이다. 그렇다. 사고는 비군사적 핵시설이었던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당대에 일어났다. 그러니 ‘평화적 핵’이 과연 가능한 걸까?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원자 속 핵이 분열할 때 발생하는 엄청난 열에너지 일부를 전기로 발전시킨다. 핵분열 과정에서 나오는 우라늄, 플루토늄 같은 방사성 물질들을 재처리하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 한편 물리학 용어인 ‘원자력’은 굉장히 적은 에너지를 표현하는 것으로 힘으로 따지면 발전에는 사용할 수 없는 정도라고 하니, 원자력발전소가 아닌 핵발전소가 과학적으로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한다. 당연히 핵발전을 가동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핵무기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핵발전소는 어떻게 세워진 것일까. 《야누스의 과학》이 제시하는 하나의 답이 설득력 있다.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책은 두 얼굴을 가진 과학의 면모를 살피는데, ‘핵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이란 애당초 군비경쟁의 목적을 덮으려 했던 미사여구에 불과했다.

“1950년대 미국의 상업용 원자력 발전 도입을 부추긴 것은 역설적이게도 미국 해군의 핵잠수함 개발 노력과 1949년 소련의 원자탄 개발 성공으로 인한 미-소의 역관계 변화였다.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은 다름 아닌 군사적이고 체제대결적인 여러 계기들에 의해 추동되었던 것이다.”

냉전 시기인 1949년 소련도 핵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미국은 소련의 원조로 핵발전소를 도입한 제3국가들이 소련으로 넘어가 그 세력이 커지는 상황을 우려했고, 세계 대전 이후 해군에서 개발된 핵잠수함의 경수로를 핵발전소의 원자로로 사용하여 1957년 최초의 미국산 핵발전소를 상업 가동했다. 소련과 군비 경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1953년 12월 유엔 총회에서의 ‘평화를 위한 원자’(Atoms for Peace) 선언의 숨겨진 얼굴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 원자로 대부분이 이때의 경수로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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